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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간 질서를 상징하는 색, 오방색五方色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4. 18. 20:29

제목 우주와 인간 질서를 상징하는 색, 오방색五方色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4-15 조회수 63

 

오방색, 동양의 사상체계를 담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힘없는 존재였다. 카오스, 무질서의 세계는 두려움의 공간이고 질서의 세계인 코스모스는 미래를 예측할 있어 평화를 예견한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은 안전을 담보한다. 오방색은 우주와 인간의 질서를 상징한다.

 

 

음양오행 사상은 고대의 동양에서 우주에 대한 인식과 사상을 정립한 원리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음과 양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 또한 하늘의 별을 항상 제자리를 지키는 항성恒星보다 일정한 괘도 없이 떠도는 별인 행성行星의 신비로움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여할 것이란 믿음을 가졌다. 그래서 해와 달의 음양과 5개의 행성, 목성·화성·수성·토성·금성·수성을 우주관의 기본으로 삼았다. 지구의 구성요소인 나무木·불火·물水·흙土·쇠金의 5원소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색채의식은 기원전 1세기 전한前漢시대에 성립된 음양오행 사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오방색은 음양오행 사상에 따른 방위와 상징을 나타낸다. 동방東方은 태양이 솟는 곳으로 나무가 많아 항상 푸르기 때문에 청색을 의미하고 봄을 의미하며 탄생하는 곳으로 양기가 강하다. 서방西方은 쇠가 많다고 생각하고 쇠의 색깔을 희게 보아 백색으로 표현하였고, 가을을 의미하며 해가 지는 곳으로 음기가 강하다. 남방南方은 언제나 해가 강렬해 적색이고 만물이 무성하여 양기가 왕성한 곳으로 여름을 의미한다. 북방北方은 깊은 골이 있어 물이 있다고 여겨 이를 검게 보아 흑색으로 표현하였고 겨울을 의미한다. 중앙中央은 땅의 중심으로 해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 여겨 광명을 상징하는 황색으로 표현하였다.

 

음양오행의 상징적 원리는 색깔뿐만이 아니라 신체와 감정, 계절, , 소리에도 적용했다. 원리로서 한의학의 기본이 마련되었고, 음악의 체계가 수립되었고, 한글의 창제가 가능했으며 한양의 도시설계에도 적용되었다.

 

 

신분을 색으로 상징하다

오행의 기운과 연결된 청·적·황·백·흑의 다섯 가지 순수한 기본색인 오방색은 오정색五正色, 오색五色, 오채五彩라고도 하였다. 오방색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색이 오간색五間色이다. 서방金과 동방木 사이에는 벽색碧色, 동방木과 중앙土 사이에는 녹색綠色, 남방火과 서방金 사이에는 홍색紅色, 남방火과 북방水 사이에는 자색紫色, 북방水과 중앙土 사이에는 유황색硫黃色이 놓인다.

 

오래전 동양에서는 신분의 높낮이를 오방색 옷으로 적용해왔다.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황색은 황제의 색이다. 조선의 국왕들은 고구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적색 곤룡포를 입었다.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 면모를 보이긴 하지만, 관직에서도 품계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여 위계질서를 잡고자 했다.

 

조선에서는 당상관인 1품에서 3품까지는 적색을, 당하관은 청색을, 품계가 낮은 7품에서 9품은 녹색 관복을 입었다. 여성의 예복인 원삼은 황후가 황원삼을, 왕비는 홍원삼을, 비빈은 적원삼을 입었고, 공주나 사대부 집안 부인들은 녹색원삼으로 신분을 과시했다. 민간의 평상복으로 이러한 색깔의 옷을 금지한 사연은 염색에 들어가는 노동력과 경제성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색깔로써 신분질서를 정립할 필요성이 우선하였던 셈이다. 단지 혼례 때만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옷을 허용했다.

 

생활과 문화 속으로 뿌리내리다

오방색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저세상으로 떠날 때까지 삶의 여러 영역에 관여해왔다. 아기가 태어난 21 되는 삼칠일이나 백일에는 백설기를 먹는다. 중요한 행사에 등장하는 백설기는 백색이 신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적색은 벽사의 의미로 활용되었다. 인간을 해코지하는 귀신은 언제나 음기가 서린 곳을 좋아한다. 양의 색깔인 적색은 액을 면하게 해준다. 동짓날 집안 여기저기에 팥죽을 뿌리는 것도 악귀를 물리치기 위함이다. 아기가 태어난 집에서 두르는 금줄과 간장항아리에 담구는 고추 또한 적색이 가진 주술의 위력을 보여준다. 혼례식에서 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를 바르는 것도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상가喪家에서 전문적으로 울음을 파는 곡비哭婢는 반드시 손톱을 빨갛게 물들였고, 여름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풍습도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적색으로 그린 부적은 주사朱砂에 황성분이 있어 살균이나 해독작용을 하는 측면도 있다.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빨간 내복을 선물하는 것도 이러한 색채의 벽사 기능이 이어져온 풍습이다.

 

청화백자나 청백리淸白吏에서 보듯이 청색과 백색을 지향하는 우리 민족의 의식 또한 오방색이 갖는 의미와 상징에 연유한 경우라 하겠다.

 

사람들은 우주를 관장하는 제왕 밑에 방위를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 있다고 보았다. 고구려 석실 무덤의 동방에는 청룡,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주작, 북방에는 현무의 사신도나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좌청룡·우백호 또한 오방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궁궐이나 사찰, 사당 건물의 단청 또한 오방색을 기본으로 삼는다. 단청은 건축물의 주재료인 나무를 보호하는 물리적인 목적과 건축물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정신적인 목적이 결합된 형태이다.

 

 

 

자연에서 색깔을 빌려오다

오방색의 5가지 색깔은 전통적으로 자연의 산물인 식물이나 동물, 광물로 만들어 썼다.

동쪽에 해당하는 청색은 석청石靑이나 군청群靑과 같은 광물질이나 쪽풀藍에서 얻는다. 서쪽에 해당하는 백색은 고령토나 백악과 같은 흙성분의 광물질이나 조개껍질로 만든다.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백색은 대부분 합분蛤粉인데 이것은 무명조개나 수컷 껍질을 약한 불에 구운 미세하게 갈아서 만든 것이다.

 

 중앙에 해당하는 황색의 광물성 안료로 대표적인 것이 석황石黃이다. 식물성으로는 해등나무 껍질에 구멍을 내어 흘러내린 즙을 굳힌 등황藤黃과 방충성이 있어 책표지에도 사용한 황벽黃蘗이 있다. 선명한 색을 내는 치자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남쪽에 해당하는 적색은 광물질인 주사朱砂가 대표적인데 그림은 물론 칠기나 부적, 도장을 찍는 인주, 약재 등에도 사용했다. 홍화나 풀의 일종인 꼭두서니로 만들기도 했다. 북쪽에 해당하는 흑색은 주로 소나무 그을음에 아교를 섞어 만든 먹이 대표 격이다. 광물질로 흑석지가 있고 약용식물인 통초通草를 태워 만든 통초회도 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의 색채의식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라마다 색채관이 변하기 마련이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음양오행과 오방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명하게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건축과 의복 생활색채의 활용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황실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던 황색 대신 적색을 선택했다. 적색은 황색 다음으로 고귀한 색이다.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색채관은 자연스럽게 강렬한 적색에 집중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적색은 즐거움이고 명절의 색이다. 그리고 행운과 돈을 부르는 색으로 사랑받는다. 한편, 백색은 애도의 색이며 흑색은 상처의 색이자 악의 상징색이다. 중국은 오방색의 종주국이지만 격동의 근세와 사회주의 정치체제에서 전통의식이 상당부분 사라져 버렸다.

 

일본에서 오방색의 의미는 더욱 희박하다. 섬나라가 갖는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문화를 흡수하되 변형시키는 본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모 씨름판 귀퉁이에 늘어뜨리는 색실타래 청방靑方·백방白方·적방赤方·흑방黑方은 오방색의 전통이 남아있는 사례이다. 일본의 색채는 화려하다. 그러나 장식품이나 상품에서와는 달리 거리나 사찰에서 보는 색은 우리보다 훨씬 단조롭고 무채색에 가깝다.

 

이는 스스로를 낮추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국민성에 기인한다. 논리적이고 배려심이 강한 일본인들의 가치관이 색채에 반영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색채의 조화보다 오방색과 같이 색이 가진 고유의 상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태극문양에서 보듯 음양의 대비와 남녀,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유교 전통이 오방색의 상징적 의미와 결합하였다. 유교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러한 전통색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한국의 색을 세계화시키는 일이 우리들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글ㅣ사진ㆍ성기혁 경복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사진ㆍ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