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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경계가 희미한 거리, 인천 개항누리길 (옮겨온 글)문화재청

왕토끼 (秋岩) 2011. 5. 2. 20:40

제목 세월의 경계가 희미한 거리, 인천 개항누리길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4-15 조회수 119

 

근대화의 물길이 밀려들었던 항구마을

매년 4월의 길목에는 외출하기가 성가신 아니다. 김수녕 씨가 인천에 가려고 나선 날도 중부지방에 꽃샘추위와 황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보였다. 집을 나서는 그녀는 트렌치코트 안에 셔츠를 겹이나 껴입고 스카프를 두른 차림이었다. 올림픽 통산 금메달 4개의 기록을 세우며 세계 양궁계를 평정했던 김수녕 씨는 오늘처럼 외출복 차림이 어울리는 일상인日常人으로 살고 있다. 다행히도 인천을 향해 바라본 하늘은 황사의 기미 따윈 찾아볼 없게 맑고 환했다. 

 

육중한 크레인과 알록달록한 컨테이너들에 시선을 주는 사이 어느새 차는 인천 중구청에 도착했다.

바로 이곳이 여행의 출발점이다. 중구청 건물은 1933 인천부 청사로 지어져 행정구역 명칭이 바뀜에 따라 1949년부터는 경기도 인천시 청사로, 198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청사로 사용되다가 1985년부터 현재까지 중구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세월 동안 인천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중구청 건물은 역사를 간직한 본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상아색의 외벽과 출입구 옆에 나란히 있는 원형의 창은 개항지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담고 있는 듯했다.

 

1년에 서너 , 일이 있어 들렀던 같은데 지나면서도 이곳이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인지는 몰랐죠. 공업도시라는 인식이 깊어서인지, 이런 풍경이 남아있다는 의외스럽게 느껴져요. ‘양궁선수 김수녕’에게는 문화재에 대한 조금은 특별한 감정이 있다. 경주나 부여 같은 유적지를 얘기할 떠올리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의 기억이 그녀에게는 낯선 장면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진지함이 조금 생긴 뒤에라서 일까, 나이가 들어 찾은 문화재에서는 현재의 형체만이 아니라 안의 세월을 보게 되고, 사연을 읽게 된다. 그녀는 세월 인천시민들이 밟고 지나며 다져진 탄탄한 돌계단을 내려오며 역사의 현장에 있음을 상기한다.

 

 

다시 태극기를 바라보는 메달리스트

개화기, 인천 중구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중구청을 중심으로 골목으로 이어진 일대는 열강들의 각축장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듯, 색깔이 명확한 근대식 건물들이 구역을 이루고 있다. 중구청 바로 앞에는 르네상스양식의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7) 프랑스풍의 인천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 일본 건축물들이 일렬로 모여 있다.

 

한국은행 본관을 빼닮은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은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쓰인 적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1909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하고 일본에서 들여온 재료로 지은 건물은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으로 사용되다가 1909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2년여 동안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됐었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전시실에는 1883 개항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근대문물들이 구색을 갖춰 전시되어 있었다. 인천항에 설치된 최초의 해관에 관한 기록물과 해안경비함의 모습, 최초로 발행된 우표,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와 서구상사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최초’라는 말이 붙을 때는 좋은 일이거나 자랑거리인 경우가 많잖아요. 글쎄요. 최초가 명예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열강의 손을 빌은 개화의 산물들은 1910 국권침탈의 비극과 이어져 있었기에 기록들과 마주선 김수녕 씨의 표정은 먹먹히 굳어있었다.

 

건물 안쪽에는 인천일본제일은행지점의 금고로 쓰였던 방이 남아 있었다. 제법 너른 공간이었다. 이곳에 일본인들이 빼앗아간 재산과 억울함이 가득 찼으리라. 김수녕 씨는 민중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금고 입구에 버티고 있는 육중한 철문을 매만졌다.

 

전시실을 나서려던 김수녕 씨는 광제호 태극기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광제호는 1904 군비강화를 위한 해군군함으로 건조됐지만, 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연안세관 감시선으로 사용됐고, 그것은 일제 제국주의 침략의 주요 수단인 선박의 항해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광제호에 승선했던 고故 신순성 씨가 1910 한일병합을 앞두고 배에서 거둬 자손 대대로 전해오던 태극기가 광복 65주년이었던 지난 국가에 기증됐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대표 선수들이 그럴 거예요. 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도 감동스럽지만, 경기장에 걸린 태극기를 바라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장박동이 온몸에 전해지는 느낌이에요. 4번이나 세계에 애국가를 울리게 했던 장본인, 국가대표 양궁선수 김수녕. 해설가로 후배들의 승리를 전하는 지금도 애국가의 선율과 함께 솟아오르는 태극기를 때의 마음은 덜함이 없다. 이제는 태극기를 지켜내기 위해 조상들이 겪었던 시련과 눈물겨운 애국애족의 마음이 기억돼, 가슴이 더욱 벅찰 것이다.

 

 

역사의 헤아림 속에 희미해지는 감정의 경계

다시 나선 거리는 정오의 태양이 분사하는 햇빛으로 눈부셨다. 김수녕 씨는 동화 속의 성처럼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건물에 다가섰다. 인천항의 물류수송을 담당했던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248)이다. 1888 신축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은 1904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 당시 일본 병참사령부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항만회사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건축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은 담쟁이덩굴이 드리워져 신비롭게 느껴졌다. 수탈의 현장을 보며 느끼는 신비로움은 아이러니컬한 감정이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의 지척에는 일본 조계와 청국 조계를 가름하는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청관 언덕길) 있었다. 개항된 이후 계단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동쪽에는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자리 잡았다. 세계 열강들이 각축을 벌였던 현장으로 개항기의 혼란을 상징하는 이곳은 지난 2002 인천시 기념물 51호로 지정됐다.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나라 최초의 차이나타운이 나온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개항기 역사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 궁금해진다. 김수녕 씨는 계단 꼭대기에 서서 일본인들이 살았던 주택들과 관동교회, 그리고 멀찌감치 제물포 앞바다를 바라봤다. 개항 역사의 한복판이었던 과거와,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현재의 인천이 동시에 조망되었다. 숱한 외세의 공격에 놓여 있었던 , 이질적인 문물들이 뒤섞여 갈등을 빚기도 하고, 일본의 수탈에 농민들이 몰락해갔던 . 너머로 대형선박 수십 척이 정박해 있는 서해안 최대의 상항, 세계 4 미항을 넘보는 인천항의 위용이 보인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민들에게 금메달의 감격을 안겨줬던 양궁선수 김수녕은 고된 훈련을 견디고 패배의 아픔도 겪어야 승리의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인천항과 일대에 어린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교차했다. 바다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조계지 경계 너머의 다른 추억을 찾아 언덕길을 내려갔다.

 

글ㆍ성혜경  사진ㆍ최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