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선황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일가의 복식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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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화재청 | ||
작성일 | 2011-03-10 | 조회수 | 118 |
영친왕일가의 유물, 황태자의 지난한 삶을 보여주다
이 유물들은 1922년 4월 영친왕일가가 결혼 후 한국을 처음 방문하여 순종황제純宗皇帝를 알현할 때착용하였던 옷과 장신구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그리고 영친왕일가와 덕혜옹주가 함께 찍은 사진 속에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유물의 내용은 왕의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를 비롯하여 익선관翼善冠과 옥대玉帶, 목화木靴등과 왕비의 법복法服인 적의翟衣일괄과 각종 비녀 등의 장신구, 영친왕의 첫 아들인 이진李晉의 돌복과 각종 의류 등으로 대부분의 유물들이 왕 일가의 옷으로는 거의 유일품들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전쟁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영친왕일가의 곤궁한 생활상으로 인하여 보관 등이 어렵게 되자 1957년 동경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영친왕비인 방자여사房子女史의 이야기로는 보관상의 문제로 동경박물관에 잠시 보관한 것이라 하였으나, 방자여사의 친필로 30만 엔을 받고 넘긴 문서가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생활이 곤란하여 약간의 돈을 받고 넘긴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은 전쟁 후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왕실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상의 한 단면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유물들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풀기 어렵기도 한 문제였으나 외교적으로 잘 풀어 환수에 성공한 사례이다.
유물 반환 과정을 통해 본 우리의 과제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수된 유물들에만 만족하고 있으나, 우리 유물과학과 직원들의 가슴은 답답했다. 이들 유물 중에 꼭 있어야 할 일괄유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중요한 행사에 착용하였던 면복冕服과 그 일괄유물이 전혀 없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 시에 왕은 면복을, 왕비는 법복인 적의를 입고 그에 따른 성장盛粧을 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왕비의 법복은 적의 자체는 물론이고 적의 착용 시 적의 안에 입는 옷부터 적의 착용후 그 위에 걸치는 폐슬蔽膝(무릎가리개)과 상裳(치마), 옥대와 패옥佩玉(허리 양옆에 다는 옥으로 된 장식) 그리고 머리의 장식인 대수머리와 각종 비녀와 댕기들, 적의 착용 때 신는 버선과 신발인 청말靑襪과 청석靑까지도 다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왕비의 적의에 대응되는 왕의 법복인 면복은 물론, 면복 관련 유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남아있는 것은 왕의 패옥을 담았던 패옥함에 왕비의 패옥이 담겨져 있었을 뿐이다.
영친왕이 면복에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상과 폐슬을 두르고 양 옆구리에 패옥을 걸치고, 붉은 색 버선인 적말赤襪과 붉은 색 신발인 적석赤을 신는 등 성장을 하고 종묘에 고유하러 들어가는장면의 동영상이 남아있다.
이 동영상은 1922년 결혼 후 처음귀국하였을 때 종묘의 조상들께 자신의 결혼을 고하기 위한 행차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1922년 4월에 촬영된 동영상에 나오는 이 일괄유물이 부분적이아닌 일괄로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한다. 만약에 없어졌다면 부분적으로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한다. 이 유물들이 영친왕이 입었던 면복과 면류관 그리고 그에 따른 의장품들이 일괄로 아주 잘 보관되어 있으리라고… 물론 이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곳 역시 시설이 좋은 곳일거라는 묘한 기대감도 갖게 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들 유물이 세상에 공개되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대한다.
글 | 사진·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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