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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황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일가의 복식유물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3. 28. 20:34

제목 조선황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일가의 복식유물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3-10 조회수 118

 

 

 

영친왕일가의 유물, 황태자의 지난한 삶을 보여주다
영친왕일가 복식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200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총333점이 지정되었는데 단일 지정문화재로서는 최대의 수량을 차지한다.

 

이 유물들은 1922년 4월 영친왕일가가 결혼 후 한국을 처음 방문하여 순종황제純宗皇帝를 알현할 때착용하였던 옷과 장신구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그리고 영친왕일가와 덕혜옹주가 함께 찍은 사진 속에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유물의 내용은 왕의 평상복인 곤룡포袞龍袍를 비롯하여 익선관翼善冠과 옥대玉帶, 목화木靴등과 왕비의 법복法服인 적의翟衣일괄과 각종 비녀 등의 장신구, 영친왕의 첫 아들인 이진李晉의 돌복과 각종 의류 등으로 대부분의 유물들이 왕 일가의 옷으로는 거의 유일품들이다.

 

이들 일괄유물은 전쟁 후 황족의 신분을 잃고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 영친왕일가의 곤궁한 생활상으로 인하여 보관 등이 어렵게 되자 1957년 동경박물관에서 보관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영친왕비인 방자여사房子女史의 이야기로는 보관상의 문제로 동경박물관에 잠시 보관한 것이라 하였으나, 방자여사의 친필로 30만 엔을 받고 넘긴 문서가 남아있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생활이 곤란하여 약간의 돈을 받고 넘긴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부분은 전쟁 후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왕실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상의 한 단면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1986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이었던 정재훈 국장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경박물관으로부터 영친왕일가의 유물을 빌려와 특별전을 개최할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이 한국으로 왔다가 전시가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한국으로 반환할 수 없음을 알고 어쨌든 특별전을 막고 한국으로 반환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어느 것도 만만치 않았다. 정재훈 국장은 “이 유물들은 위탁보관한 것이니 돌려달라”는 취지의 편지초안을 써서 낙선재의 방자여사를 만나 설득한 뒤 방자여사의 싸인을 받아 동경박물관에 보내게 되나, 일본으로부터는 국가재산으로 잡혀 있어서 곤란하다는 불분명한 답신이 돌아왔다.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1988년 노태우 전대통령의 일본순방계획에 따른 관련사항을 보고하라는 통보를 받고 영친왕일가의 유물반환을 외교적으로 풀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마침 당시의 청와대 수석들이 문화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영친왕 일가의 유물 반환을 한일정상회담의 의제로 다루도록 건의된 사항이 받아들여졌고, 1990년 7월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이 유물들을 반환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그 후 1991년 10월 15일 한국 측 인수팀의 호송 속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입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유물들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풀기 어렵기도 한 문제였으나 외교적으로 잘 풀어 환수에 성공한 사례이다.

 

 

유물 반환 과정을 통해 본 우리의 과제
현재 대한제국기 왕의 평상복인 곤룡포와 왕비의 법복인 적의등 황제의 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왕과 왕비, 왕자의 유물로는 유일한 이 유물들은 향후 왕실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각종 비녀와 향낭香囊등의 장식품, 그리고 그 장식품을 포장했던 궁보宮褓와 비단 상자 등은 조선 왕실소속 마지막 장인들의 작품으로 그 어느 명품보다 뛰어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수된 유물들에만 만족하고 있으나, 우리 유물과학과 직원들의 가슴은 답답했다. 이들 유물 중에 꼭 있어야 할 일괄유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중요한 행사에 착용하였던 면복冕服과 그 일괄유물이 전혀 없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 시에 왕은 면복을, 왕비는 법복인 적의를 입고 그에 따른 성장盛粧을 하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왕비의 법복은 적의 자체는 물론이고 적의 착용 시 적의 안에 입는 옷부터 적의 착용후 그 위에 걸치는 폐슬蔽膝(무릎가리개)과 상裳(치마), 옥대와 패옥佩玉(허리 양옆에 다는 옥으로 된 장식) 그리고 머리의 장식인 대수머리와 각종 비녀와 댕기들, 적의 착용 때 신는 버선과 신발인 청말靑襪과 청석靑까지도 다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왕비의 적의에 대응되는 왕의 법복인 면복은 물론, 면복 관련 유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남아있는 것은 왕의 패옥을 담았던 패옥함에 왕비의 패옥이 담겨져 있었을 뿐이다.

 

영친왕이 면복에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상과 폐슬을 두르고 양 옆구리에 패옥을 걸치고, 붉은 색 버선인 적말赤襪과 붉은 색 신발인 적석赤을 신는 등 성장을 하고 종묘에 고유하러 들어가는장면의 동영상이 남아있다.

 

이 동영상은 1922년 결혼 후 처음귀국하였을 때 종묘의 조상들께 자신의 결혼을 고하기 위한 행차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1922년 4월에 촬영된 동영상에 나오는 이 일괄유물이 부분적이아닌 일괄로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한다. 만약에 없어졌다면 부분적으로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한다. 이 유물들이 영친왕이 입었던 면복과 면류관 그리고 그에 따른 의장품들이 일괄로 아주 잘 보관되어 있으리라고… 물론 이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곳 역시 시설이 좋은 곳일거라는 묘한 기대감도 갖게 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들 유물이 세상에 공개되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대한다.

 

 

글 | 사진·정계옥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