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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堯)임금(옮겨온 글)2011.04.25.

왕토끼 (秋岩) 2011. 4. 25. 22:57

고조선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堯)임금

단군왕검은 황제헌원의 외손자이며, 곧 야훼하느님의 외 증손자이고,

堯(요)임금은 고신왕의 막내 아들이며, 곧 야훼 하느님의 5대손자가 된다.

 

야훼 하느님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의 맏아들 소호(현효:BC2598-2514)의 아들이,帝嚳(제곡=帝峻(제준)이며, 高辛王(고신왕:BC 2435-2365))이다.고신왕은 常羲(상희)와 羲和(희화)의 두 아내가 있었다. 첫 부인.羲和(희화)는 열 개 태양(日:年)을 낳고 둘째 부인 常羲(상희)는 열두 달(月)을 낳고 셋째 부인 娥皇(아황)은 三身國(삼신국) 자손들을 낳았다.또 다른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高辛王(고신왕)의 첫째 부인은 有邰氏(유태씨)의 딸로서 이름은 姜源(강원)이다. 강원은 后稷(후직)을 낳고 후직이 곧 周(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둘째 부인은 有娥(유아)씨의 딸로서 簡狄(간적)이며 卨(薛:설)을 낳았으며 卨(설)은 殷(은)나라 시조가 되었다. 고신왕의 넷째 부인은 娵訾(추자)씨의 딸로서 아들 常儀(상의 摯(지)가 왕위에 올라 9년을 재임하고 백성들로부터 쫓겨났다.

 

셋째 부인은 陳鋒(진봉)씨의 딸이며 이름은 慶都(경도)이다. 경도 부인이 낳은 아들이 堯(요)임금이며, 防勳(방훈), 혹은 伊祁氏(이기씨)라 한다. 堯(요)는 陶唐氏(도당씨) 부락의 추장으로 추대하여, 이로 인해 唐堯(당요)라고 불렀다. 九夷族(구이족)의 자손이며, 黎國(여국)의 변란시에 고신왕의 뒤를이어 제위에 올랐다.

 

고신왕의 막내아들 堯(요)임금은 검소하고 소박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중국 역사상 聖君(성군)으로 받들고 있다. 요임금의 집은 기둥과 대들보는 모두 산에서 베어온 거친 나무 그대로 집을 짓고 풀잎을 엮어 지붕으로 삼고, 음식은 야채국과 거친 밥을 먹었고 몸에 걸친 옷은 마옷을 입고 날씨가 추우면 사슴 가죽을 걸쳐 추위를 막았다. 그릇은 흙으로 빚은 공기와 사발뿐이었다.

 

요 임금은 형제 중 후직을 農師(농사) 직책을 맡기고 工師(공사)의 직책을 맡은 倕(수)와 법관의 직책을 맡은 皐陶(고도), 樂官(악관)의 직책에 오른 蘷(기), 司徒(사도)의 직책을 맡아 종교 교육을 관장한 舜(순)과, 司馬(사마)의 직책에 올라 軍政(군정)을 관장한 契(설)이 있었다. 이 신하들은 모두 다 초인간적 신령들이다.

 

특히 법관의 직책을 담당한 蘷(기)는 그의 얼굴빛은 푸르고 초록빛이 감돌아 마치 오이 껍질과 같았다. 또 입은 돼지 주둥이와 같이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법관으로서 심리를 할 때는 추호도 인정에 구애됨이 없이 공명정대하게 사건을 처리하였다. 제 아무리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일지라도 일단 그의 손에 들어가면 즉시 한 점의 의혹이나 이의도 없이 총명하게 처리하였다.

 

그는 해태라는 외 뿔난 신령스러운 양을 한 마리 기르고 있었다. 외 뿔이 달린 그 양은 고요가 법관으로서 심리를 할 때 해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고요의 일을 도와주었다. 이 양의 모습은 몸에 기다란 푸른 털로 뒤덮여있고 몸집은 큰 곰과 흡사하였다. 여름에는 늪가에서 살고 겨울은 소나무와 측백나무 숲에서 살며 성품이 충직하고 정직하였다.

 

만약에 사람들이 언쟁을 하며 다투면 이치에 맞지 않고 그릇된 쪽을 자신의 외 뿔로 떠밀었다. 말 모양의 입을 가진 고요가 사건을 심리 할 때 분쟁 당사자 쌍방을 법정에 불려 들어오면 이미 이 양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알고 가려내 주니 간단히 심리를 마칠 수가 있었다. 즉 분쟁 당사자 쌍방을 불러놓고 고요가 해태에게 명령만 내리면 즉시 그릇된 쪽을 뿔로 떠받았기 때문이다. 고요는 자기의 일을 도와주는 양을 각별히 보호하였다.

 

요임금의 樂官(악관) 직책을 맡은 蘷(기)는 산천 계곡의 소리를 모방하여 大章(대장)이라는 악곡을 지었는데 악곡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하게 되어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싸우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돌맹이 세 개를 가지고 다니며 박자를 쳐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주었다. 또한 돌맹이 몇 개로 박자를 맞추고 연주 할 때는 각양 각색의 새들과 짐승들이 그 아름다운 음율에 맞추어 신명나게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요임금이 제위에 오른 후 재위 만년에 祗支國(지지국)에서 重明鳥(중명조)라는 새를 바쳤다. 중명조는 일명 雙睛鳥(쌍정조)라 불렀는데 눈 하나에 눈동자는 두 개가 있고 새의 형상은 닭과 비슷하고 울음소리는 봉황새와 비슷하고 때때로 깃털이 모두 빠졌는데 그때는 알몸뚱이로 하늘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이 새는 사악한 요괴들과 승냥이나 호랑이 같은 사나운 맹수들도 쫓아 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먹이는 먹지 않고 오직 玉膏(옥고)만 먹었다. 지지국에서 바친 중명조는 다시 자기의 고국으로 날아간 후 1년에 겨우 서너 차례 날아왔다가 어떤 때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날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중명조가 날아오기를 손곱아 기다리며 늘 문 앞을 깨끗이 쓸고 중명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애타게 기다렸다. 사람들은 새가 돌아오지 않자 나무나 금속으로 새의 모양을 새겨서 문위에 달아놓으면 요괴와 악마는 중명조로 알고 무서워 멀리 달아났다고 한다.

 

그 당시 槐山(괴산)에는 약초를 캐는 偓佺(악전)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노인은 늘 仙藥(선약)을 먹기 때문에 온 몸이 흰털로 뒤덮여있고 두 눈은 모두 사각형처럼 네모나게 생겼다. 비록 나이는 많았으나 몸이 날렵하고 건강하여 달리는 말과 같았다. 그 당시 요 임금은 하루 종일 국사에 매달려 근심 걱정으로 수심이 가득하여 늘 찡그린 모습이 눈썹사이의 八(팔)자 모양을 이루어 펴질 날이 없었을 뿐 아니라 몸도 쇠약하였다.

 

요임금의 쇠약한 모습을 보다 못한 약전 노인은 몹시 가엾게 여기고 즉시 산에서 딴 잣을 가지고 요임금에게 바치고 복용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요임금은 약초를 캐는 노인의 호의를 거절 할 수 없어 받아 들었으나 매일 바쁜 국사에 바쁜 나머지 그 잣을 먹을 여유도 없었다. 그 후 그 잣을 다른 사람이 먹게 되었는데 그 잣을 먹은 사람은 2,3백세까지 살았으나 요임금은 겨우 백살 밖에 살지 못했다.

 

요임금은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국사를 돌보아 그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80세 된 어느 노인은 한 길에서 나무토막을 던지는 擊壤(격양)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격양이라는 놀이는 위는 뽀쪽 하고 아래는 넓게 깎은 신발 모양의 나무토막 2개를 가지고 하나는 땅위에 놓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3,40보 떨어진 곳에서 던져 땅위에 놓인 나무토막을 맞추는 놀이였다.

 

천진난만한 그 노인은 날마다 이 놀이를 하며 신명나게 놀고 있을 때 마침 구경꾼 중에서 한 사람이 격양을 즐기고 있는 노인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아...! 정말로 우리 요 임금의 성덕은 위대하도다.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힐끔 그 사람을 돌아보고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구먼 매일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쉬며 내 손으로 직접 샘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는데 요임금이 무슨 은덕을 나에게 베풀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하자 그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堯(요)임금은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丹朱(단주)는 不肖(불초)하고 성품이 괴팍하고 행동이 거칠어 요임금은 단주의 성품을 바로 잡아 보고자 <바둑>을 가르쳤으나 못된 성품은 고쳐지지 않아 요임금은 왕위를 [단군왕검의 신하 유호씨의 아들] 舜(순)에게 물려주기로 작정하고 요임금은 자신의 두 딸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을 舜(순)에게 시집보내고 아울러 자신의 아들 아홉 명을 순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여 진정으로 순의 덕행이 뛰어 나고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인가를 알아보도록 시험하였다.

 

. 堯(요)임금은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요임금의 맏아들 丹朱(단주)는 사람됨이 거만하고 포악할 뿐 아니라 자신의 수종을 데리고 놀기를 좋아하고 즐겁게 놀다가 자신의 비위에 상하면 죄 없는 신하를 학대하였다. 그 당시 천하를 휩쓰는 큰 홍수로 백성들이 고통을 격고 있었으나 단주는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고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날마다 물위에 배를 띄워 물놀이로 날마다 즐기고 있었다.

 

온 천지에 홍수를 만나 물바다를 이루었던 대지를 大禹(대우)가 홍수를 다스리게 되자 물이 얕은 곳은 배를 띄워 물놀이를 할 수 없었다. 단주는 물이 없는 육지에서 신하들로 하여금 힘으로 배를 밀고 다니며 놀이를 하였다. 이를 陸地行舟(육지행주)라 한다. 단주는 배 위에서 놀지 않는 날은 사방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고 즐겼다.

 

요임금은 맏아들 단주의 행동이 괴팍하고 거칠어 글공부는 소용이 없음을 알고 요임금은 단주의 성품을 바로잡아 보고자 “ 바둑 ”을 처음 만들어 단주에게 가르쳤다. 단주는 처음 바둑에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바둑에만 몰두하였다. 단주는 얼마 후 곧 싫증이나 기상천외한 바둑판을 만들어 내었다.

단주는 넓은 평원에 바둑판 모양의 뽕나무를 심고 그 뽕나무를 바둑판으로 삼아 무소와 코끼리를 바둑돌로 삼아 친구들과 번갈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바둑을 두니 아버지가 가르쳐준 바둑보다 재미가 났다. 요임금은 놀이에 몰두하는 단주의 장래를 염려하며 천자의 보좌를 舜(순)에게 선양하기로 작정하였다. 맏아들 단주가 이에 불복하고 난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단주를 남방의 丹水(단수)로 파견하여 제후에 임명하였다. 그 당시 중원에는 三苗族(3묘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부족들은 단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삼묘족은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선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요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삼묘족의 두령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토벌하였다. 살아남은 잔당들은 단주가 제후로 있는 丹水(단수)로 도망쳐 살았다. 얼마 후 단주를 우두머리로 삼고 중원을 공격해 堯(요)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다스릴 음모를 꾸몄다. 요는 미리 예견하고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출정하여 단주와 삼묘족의 군사들과 불행한 일전이 벌어졌다.

 

단주는 수군을 통솔하고 전투하였으나 결국 단주는 아버지의 군대에 패하여 남해 바다로 달아났다.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 전쟁에서 패하자 단주는 인간 세상에서 부끄러워 살수가 없게 되자 바다 속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단주가 죽은 후 그의 영혼이 鴸(주)라는 새로 변했다. 이 새의 모습은 부엉이와 흡사하고 발톱이 사람의 손처럼 생겼다. 이 새가 나타나는 곳은 반드시 선비들이 쫓겨났다. 단주의 후손들은 남해 부근에 讙頭國(환두국) 혹은 讙朱國(환주국)이라 한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하고 늘 해변가에서 부리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 또한 등에는 날개가 달려있었으나 날수는 없었다. 다만 길을 걷는 지팡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환두국 부근에 三苗國(삼묘국)이 있었는데 이들도 겨드랑이에 작은 날개가 있었으나 날지는 못했다 한다.  

 

(1). 중국의 시조는 요임금이다

고신왕의 막내아들 堯(요)임금은 갑진(2357년)에 왕위에 올라 BC 2258년까지 100년 동안 재임했다.唐堯(당요)는 대 조선국 유호씨(고수)의 아들 우순(虞舜)임금이 병신년(BC 2285)부터 28년 동안 요임금의 나라를 섭정하고, 병술년(BC 2255)부터 계유년(BC 2208)까지 50년 동안 재위하고 110살에 죽었다.

 

중국의 시조  堯(요)임금
▲중국의 시조 堯(요)임금

 

(2). 순임금은 대 조선국 유호씨의 아들이다

우순(虞舜)임금
▲우순(虞舜)임금

우순(虞舜)임금은 高叟(고수:유호씨(有戶氏))의 아들이다. 고수는 高矢禮(고시례)의 친형이다. 고시례는 진단국(배달국:조선국) 환웅천왕의 신하로서 主穀(주곡)을 담당하는 農士(농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유호씨(고수,瞽者(고자)의 아들 순이 檀朝(단조:진단국: 단군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이웃나라 唐堯朝(당요조)에서 벼슬을 하므로 父子(부자)간에 서로 의견이 달라 화목하지 못하자 작은 아들 象(상)을 사랑하고 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즉 순은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고 唐堯(당요)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자 요임금은 舜(순)을 신임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요임금은 순에게 국사를 맡기고, 두 딸로 유혹하게 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은 일찍 조선의 천부도의 법을 집행하는 환부(신부)로 있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부터,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순임금이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당해 죽었다.

 

(3). 고조선 3한의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임금 고찰(考察)

[부도지와 환단고기, 서경(書經)]의 기록은 서로 상통하고 있으며 그 당시의 상황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측의 사서(史書)를 살펴보면 요임금과 우임금의 역사를 중국 측의 관점에서 기술돼 있습니다.

[부도지 18장] 배달국 제 18세 거불단 환웅씨의 아들 임검(壬儉)씨가 천부도(天符都)를 건설할 땅을 선택하고자 동북 쪽 자방(磁方)에 왔을 때에 도요(陶堯:요임금)가 천산(天山) 남쪽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려서 당도(唐都)를 세우고 5중앙의 제왕이라 자칭하며, 조선의 부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때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피고 지는 명협(蓂莢)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며 명협으로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지하고 부도(符都)의 역을 버렸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두 번째의 큰 이변이었다.

 

조선국의 임검씨가 매우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아들 유호씨(有戶氏:고수) 부자(父子)로 하여금 유순 환부(鰥夫:신부)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요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하고, 공순히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순의 아버지 유호씨는 키가 열 자이고,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 보다 나이를 100여 살이나 더 먹었으며, 임검씨를 도와, 도리를 행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유순은 일찍이 조선국의 천부도 법을 집행하는 환부(신부)로서 혼인할 수 없었으나, 요의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며, 당(唐)을 섭정하였던 것이다.

 

당시 순의 아버지 유호(有戶)씨가 순의 사도 우에게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天符都(천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모욕하고, 위협하며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순의 아버지)를 수차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유순은 왕위에 오른지 61년째 蒼梧(창오)의 들판에 도망치다가 모산(茅山:강소성 구곡산) 진지(陣地)에서 우 임금의 신하에게 시해를 당해 죽었다. 순의 시체는 창오의 들판 구이산(九疑山) 남쪽에 묻었다. 순의 아내 아황과 여영도 원한이 사무쳐 상수(湘水) 강물에 빠져 죽고 작은 아들 商均(상균)은 고국에 돌아와 司徒(사도)의 관직을 맡았다.

 

중국측 서경(書經)은 우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순(虞舜)은 남들과 달리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두개이므로 그의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중화(우순)의 부친은 고수(유호)이고, 순의 부친 고수(유호씨)는 맹인이었다. 순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 상(象)을 낳았는데, 상은 매우 오만 불손하였다.

 

고수(유호씨)는 후처가 낳은 아들을 편애하여 항상 순을 죽이고자 하였으므로 순은 이를 피해서 도망 다녔고, 순이 잘못한 일을 저지르게 되면 곧 벌을 받았다. 그러나 순은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와 계모에게 순종하며 잘 모셨고, 동생에게도 잘 대했으며, [항상 야훼하느님을 숭배하는]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순임금은 우를 천거 받고, 우는 전국 산천을 개간하여, 아홉 개의 호수를 통하게 하였으며, 아홉 개의 강 물길을 통하고, 전국을 9주로 확정하였다. 순은 스물 살 때 효자로 명성이 자자하였고, 서른 살에는 요임금에게 등용되고 쉰 살에 국사를 대행하였다. 유순은 나이 쉰여덟 살 때 요임금이 붕어하자, 예순한 살에 요임금의 뒤를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제위를 받은 지 39년 만에 남쪽을 순수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하였다. 그를 강남의 구의산에 장사 지냈다. 이곳이 바로 영릉이라 한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 죽고, 순은 창오(蒼梧:광서성 창오현)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는 순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죽이려는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 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하겠다고 말하고, 상(商)나라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순의 아버지)에게 항거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칭하였다.

 

[중국측 서경(書經) 요전(堯典)]

고신왕의 막내아들 요 임금은 대홍수가 일어나 山岳(산악)의 4면을 강물이 에워싸고 하늘에 닿을 듯하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신하 중에서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의 근심을 덮어줄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를 맡기겠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治水(치수)에 능한 사람은 오직 崇伯(숭백) 鯤(곤)이 있을 뿐입니다. 곤이 9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길은 잡히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요임금에게 이르기를 부인도 없이 홀아비로 민간에 살고 있는데 이름이 虞舜(우순:유순)이라 합니다.

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요, 신하들이 말하기를 “장님의 자식으로 아비는 완고하고 어미는 간악하며, 그의 아우 象(상)은 교만함에도 부모에게 효도하여 가정은 화목하게 잘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중략)

또한 四岳(4악) 및 여러신하들이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의 한 홀아비가 시골에 살고 있는데 우순(虞舜)이라고 합니다.그 사람의 덕이 있어 제위에 있음직한 사람입니다.고 아뢰었다. 요임금은 즉시 허락하고, 나도 일찍이 들은 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려주오,

 

4악(四岳)이 대답하기를 우순은 瞽者(고자:유호씨)의 아들로서 그 아비는 어리석어 심덕이 바르지 못하고, 그의 계모는 사납고 완악하였다. 계모 소생은 이름이 상(象)이라 하는데 오만하고 불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순은 자신을 여러 차례 죽이고자 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인륜에 어긋나지 않고 그의 부모에 효도하고, 그의 아우 세 사람도 우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었으니 성덕을 겸비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요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를 내치(內治)로 시험해 보고 그에게 내 두 딸을 아내로 삼아 시험해 본 후에 결정 하겠소 하고 즉시 혼구(婚具)를 갖추어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의 두 딸을 嬀汭(규예:산서성 영제현)로 내려 보내 虞氏(우씨)에게 시집가게 하고 공경히 잘 섬기라고 일러 주었다. (중략)

 

[서경(書經) 순전(舜典)]

요임금을 상고하건데 이름은 방훈(放勳)이며, 생각이 깊고 총명하며, 공손, 겸허하고 검소하고, 사양(辭讓)하는 마음을 갖고 상하 격의 없이 남에게 베푸는 성품이었다. 요임금은 처음부터 순에게 여러 가지 벼슬로 시험해 보았다.

처음 사도(司徒)의 관직을 맡기자 父子有親(부자유친), 君臣有義(군신유의),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잔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을 가르쳐 도리를 어기는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곧 三綱五倫은 조선국의 예절이었다]

다음 순이 총재(冢宰)의 직위를 맡자 예락(禮樂)과 형정(刑政)의 법도를 바로 잡았다. 또 순에게 사악의 관직을 겸하자 4방에서 찾아오는 제후들을 내빈의 예의로 맞이하니, 모든 제후들이 다 기뻐하고 화순하며 어긋남이 없었다. 또 당시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므로 요임금은 순으로 하여금 큰 산과 깊은 숲 속에 들어가 마침 사나운 맹수와 비바람을 만났으나 순은 당황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의 도량이 남보다 크게 뛰어난 인물이었다. 우의 공적이 3년이 되었을때 요는 마땅히 나를 대신해서 임금의 자리에 올라야 하오 라고 말하자 순은 아직 덕이 부족하니 나보다 덕이 높은 사람에게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월 상일에 문조(文祖:요임금)는 순에게 섭정(攝政)의 명을 내린 뒤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났다. 순임금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고 칠정(七政)으로 나라를 다스렸다.(중략) 공공(共工)을 幽州(유주)로 귀양 보내고, 驩兜(환두)를 崇山(숭산)으로 내치고 三苗(3묘)를 삼위(三危)에 내몰아 가두고, 곤(鯤)은 羽山(우산)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하니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

 

재위 28년째 요임금이 세상을 뜨자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삼년 동안 슬퍼하였고, 온 세상에 음악소리를 그쳐 고요히 지냈다. 정월 초하룻날 순임금은 요임금의 시조사당에 고하였다. 순임금은 백우(伯禹)를 사공(司空)에 기용하자 우가 稷(직), 契(설), 皐陶(고요)사양하자 契(설)이 司徒(사도)를 맡고, 皐陶(고요)는 법관, 기(棄)는 농사를 맡았다. 뒤에 치수를 다스린 백우(伯禹)가 사도를 맡고 伯益(백익)을 신하로 삼았다. 순임금은 30세에 요임금에 등용되고, 3년 동안 시험을 거치고, 28년 섭정하고, 50년을 제위하고 죽었다.

 

 단군왕검은 황제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했다.

단군왕검은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24년 섭정하고 9이의 추대로 BC 2333년 제위에 올랐다. BC 2357년 요임금이 당(唐)나라를 세웠으나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맏아들 염제신농의 자손들(9이족)과 둘째 아들 황제헌원이 다스리는 유웅국을 섭정했기 때문에 곧 조선은 천제가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요임금 역시 조선국(진단국)의 여러 제후(諸侯) 중에 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중국 측은 우리나라의 조상을 자국의 조상으로 둔갑시키고, 중국의 모든 사서를 변조, 날조하므로서 요나라가 마치 대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조선 3한시대의 사건들] 링크 참조바랍니다.

http://www.daehansinbo.com/news/article.html?no=1599

 

 

고조선 국조 단군왕검 동상을 건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