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현장답사 시리즈 제 6 편입니다. 제5편에서 이야기는 연결됩니다. 너분숭이 4.공원 (4.3기간 최대의 희생, 제노사이드의 전형)
마을 앞 바다에 평화롭게 떠있는 다려도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러나 북촌리는 4.3의 과정을 격는 동안 330여호, 1.500여명의 마을 인구 중 500여명이 토벌대의 보복학살로 희생됨으로써 리 단위로는 최대의 피해 마을로 기록되고 있다.
북촌리는 4.3당시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해변 마을이다. 본동 서쪽에 있는 '해동'과 선흘리와 경계지점에 위치한 '억수동'이란 자연 마을을 품고있다. 이마을은 일제시대 당시 항일운동을 한 선각자들이 많았고 해방 후에는 건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마을 포구에서 발생한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 부터 늘 군경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행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을 불러왔다. 제2연대의 강경작전
1948년 12월 29일 기존의 제9연대를 대체한 제2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연대교체의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북청년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보다 더욱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편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된 대통령령 31호의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은 해제되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이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죽음의 섬' 으로 가엾게 존재할 뿐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 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시에 희생된것이다. 동시에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고 한다.
상당히 큰 규모의 라마다 관광호텔의 야경이다.~~~~상
여기도 학살희생자의 유해가 묻혛던 돌무덤들이다.~~~상~~~~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비석에는 당시의 상황을 시문으로 남겼다.~~~~상~~~하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있다.~~~~상
숙소로 이동하는 차내에서 인솔자 박채웅선생님의 내일 일정에 대해서 애기하고있다.~~~~상
숙소 카운터에서 방 배정을 받고 열쇠를 챙기고 있다.~~~`상
'5.18 기념재단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 제주4.3항쟁의 현장을 가다.(2011년9월1일 ~ 3일)8편 (0) | 2011.09.06 |
---|---|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 제주4.3항쟁의 현장을 가다.(2011년9월1일 ~ 3일)7편 (0) | 2011.09.06 |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 제주4.3항쟁의 현장을 가다.(2011년9월1일 ~ 3일)5편 (0) | 2011.09.05 |
제주에서 유명한 맛집을 소개합니다.~~ (0) | 2011.09.05 |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 제주4.3항쟁의 현장을 가다.(2011년9월1일 ~ 3일)4편 (0) | 2011.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