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념재단 소식

민주주의 역사문화답사 제주4.3항쟁의 현장을 가다.(2011년9월1일 ~ 3일)5편

왕토끼 (秋岩) 2011. 9. 5. 18:37

제주 4.3사건 현장답사 시리즈 제 5편입니다. 조천면 선흘리에대해서 좀더 알아보고자한다. 선흘리(선흘곶) 선흘주민피신처(목시물 굴) 한곳에 피신했다 무차별 학살된 선흘 주민들 당시 조천면 선흘리는 1948년 11월21일 선흥초등학교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되었다. 집들이 소각되자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밀림속으로 피난하여 생활하게 된다. 주민들은 비상 식량을 짊어지고 선흘곶의 목시물 굴과 대섭이굴 반못 옆의 토틀굴 등지를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선흘리 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소개령이 내린지 나흘째 되는 1948년 11월 25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위험을 먼저 감지한 젊은 청년들은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틀굴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한 노인을 찾아 총으로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내면서 주민학살이 시작되었다. 도틀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또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밤새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이긴 한 두사람이 주민들이 가장 많이 피신해 있던  목시물 굴의 위치를 실토하고 말았다.

 

피신처 발각, 학살의 광란   이튼날인 1948년 11월 26일 새벽녁, 군인 토벌대는 길안내를 할 두사람을 대리고 다시 선흘지역  토벌에 나서게 된다. 두대의 트럭에 분승한 군인들은 선흘곶으로 출동 하여 먼저 박격포를 쏘아댔다. 그 박격포 소리에 놀란 빗개 소년은 혼비백산을 하여 달아났다. 목시물 굴은 입구가 두개였으며 길이가 50m가량 되는 넓은 굴이었다. 굴의 입구로 들어가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져 큰 공간을 만드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용암동굴이다. 백명가량의 선흘리 주민들은  이 굴을 피신처로 삼아 두려움에 떨며  임시 살아가고 있었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것을 종용했다. 나가면 죽음이 뻔한것을 안 주민들은 몇시간을 버티다가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에따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받고  목시물 굴을 안내한 한아무개도 현장에서 총살했다. 김형조씨는"목시물 굴에 들어가지않은 4명의 주민과 함께 덕천리 지경의 높은오름에 앉아 정황을 살피노라니까, 낮시간이 되니 막 연기가 나고 총쏘는 소리, 사람죽어가는 소리가 엄청 들렸다고 증언했다 다음애기는 제6편에서 이어집니다.

 

        제주는 참깨농사를 많이해서 가는곳마다 참깨가 도로변에 널려있다.~~~~상

       이곳이 선흘곶 목시물 굴이다. ~~~~상

 

       4.3연구소 김은희 실장님의 설명이 실감있게 하는 바람에 모두가 귀담아 듣고있다. ~~~~상 ~~~하

 

 

       산속인데 이곳에서 양봉을 하는 분이 계셔서 벌통을 찰영했다.~~~~상

        마을로 접어드니 설익은 단감이 추석을 기다리나보다.~~~상

        감귤나무에 아직 익지않은 감귤이 주렁주렁 메달려 있다.~~~~~상

         마을갈로 가는 중이다.~~~

                                          이 나무가 마을 당산나무로 제주에서는 불카분 낭(불타버린 나무)라는 뜻이다라고한다.~~~~상~~~하

 

                          마을소개령때 마을이타면서 이 나무도 함께 타버렸는데 한 쪽만 살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상

 

                           이 나무의 수종은 후박나무라고 한다.~~~~~상~~~하

 

 

 

 

      너분숭이의 뜻은 넓게 펼쳐진 돌을 너븐숭이라고 한다. 마을 주민 희생자의  위패가 모셔진 기념관이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