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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캄보디아의 진주 앙코르 (옮겨온 글) 문화재청2011.7.19

왕토끼 (秋岩) 2011. 7. 19. 07:13

제목 잠에서 깨어난 캄보디아의 진주 앙코르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7-13 조회수 69


캄보디아의 역사
캄보디아는 옛 이름이 크메르(Khmer)이며, 태양의 아들인 성스러운 은자 캄부(Kambu)와 천상의 무희 메라(Mera)와의 결혼으로 태어난 태양족의 후예로 전하고 있다.


6세기까지 부남(扶南 : 서기 1세기경 타이 만 연안의 메콩강 하류 지역에 출현하여 해양 상업국으로 발전)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6세기 후반에 그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7세기의 이사나바르만 1세(IsanavarmanⅠ: 616~637) 때 부남을 제패하여 현재의 캄보디아 중앙부부터 타이 남동부까지의 지역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자야바르만 1세(Jayavarman I : 657~681) 때에는 그 영토가 현재의 캄보디아 전 국토와 라오스 남부에 이르렀으나, 동 왕의 사후에 나라가 분열되었으며 8세기 후반에는 자바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9세기에 들어와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 : 790~835)가 시엠립(Siem Reap) 북쪽의 쿨렌산을 중심으로 마헨드라파르바타에 도읍하여 자바로부터의 독립 및 국토 통일을 이루었고, 왕을 신의 화신으로 숭배하는 신왕神王 숭배 신앙(Devaraja)을 도입한 후 강력한 정복 국가가 되었다. 이후 시암(타이의 옛 이름) 왕국의 공격으로 앙코르가 1431년 함락되기까지 6백 년 이상에 걸쳐 앙코르 시대(802~1431)가 이어졌다.


하지만 15세기 이래로 시암 왕국의 공격을 받아 앙코르를 버리고 프놈펜으로, 로베크로 또 우동으로 도읍을 옮겨갔는데, 그 과정에서 앙코르 등 여러 지역을 시암에 빼앗겼다. 또 그 타개책으로써 베트남 원조를 받기 위해 베트남의 왕녀와 결혼을 한 뒤로는 베트남으로부터도 침략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기에 이르렀지만, 이를 기화로 시암과 베트남의 침입을 피하면서 앙코르 등을 일시 되찾았으며, 마침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노력으로 1941년 5월에 앙코르 등 시암에 할양된 영토를 영구 회복하였고, 1953년 11월 9일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앙코르,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나다
쿨렌산과 남쪽의 톤레삽 호수에 걸쳐 펼쳐진 앙코르 평원을 포함하는 고대 도시 지역인 앙코르는 그 면적이 거의 5,000km2에 이르며, 1,000곳 이상의 고고학 유적이 발견되었다.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에 앙코르는 약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현재 이곳에서는 약 7만 명 가까운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곳 앙코르의 유적들은 밀림 속에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이에 1991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유네스코에 앙코르 지역을 보호 및 보존하는 국제적인 노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네스코는 1992년에 3년 시한 안에 다음 5개 항의 제시 조건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첫째, 감시 및 조정을 위한 국제 보호 기구를 만들 것, 둘째, 적절한 상근 인원이 배치된 국가 관리 기구를 만들 것, 셋째, 문화유산 보호와 관련하여 문화재, 자연, 사람 등 모두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도록 영구 경계를 설정할 것, 넷째, 적절한 보호 법률을 제정할 것, 다섯째, 주변에 공장 등 문화재에 손상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완충 구역을 만들 것 등이다. 이들 조건이 기한 내 모두 충족됨에 따라 앙코르는 세계문화유산 목록 및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그 이름이 올랐는데, 401km2의 지역에 90개의 사원이 포함되었으며, 1995년 당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1992년 지정된 것으로 소급 적용되었다.

 

 

 

캄보디아의 진주, 앙코르
앙코르에는 힌두교 사원 및 불교 사원 등의 종교 건축물, 왕궁과 그 부속 건축물, 거대한 저수조 등 고대 도시를 구성하였던 다양하고 많은 건축 유적들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시엠립 공항 북쪽의 앙코르와트로부터 프놈바켕, 박세이참크롱, 앙코르톰, 프레아칸, 네악포안, 타솜, 반테아이삼레, 프레룹, 스라스랑, 타프롬, 톰마논, 차오사이테보다 등 주요 유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한편으로 그 외곽 지역에도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앙코르를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는 앙코르와트이다. 수르야바르만 2세(Suryavarman Ⅱ : 1113~1150)가 건설하여 비슈누에게 봉헌한 힌두교 사원으로, 동서 1.5km, 남북 1.3km 규모의 담장으로 둘러싸였으며, 사면으로 190m 폭의 해자가 에워싸고 있다. 천상의 무희인 압사라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부조와 웅대한 크메르의 신화를 묘사한 벽체의 부조, 정교하고 웅대한 석조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곳은 일출과 일몰을 즐기기 위해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며, 한밤중 이곳 인근에 자리 잡고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더없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대표적 유적의 하나인 앙코르톰은 앙코르와트 북쪽에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Ⅶ : 1181~1220)가 새로 건설한 도읍으로 높이 8m의 라테라이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는 그 중심에 피라미드형의 바욘사원을 만들었고, 도읍을 둘러싼 성벽과 5개의 문 및 왕궁 앞의 테라스를 완성했다.


왕궁 앞에 있는 테라스의 경우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던 코끼리 테라스와 레퍼왕 테라스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실물 크기의 코끼리 부조와 조각으로 벽면을 채운 코끼리 테라스, 그리고 나가(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신)?가루다(성스러운 새)?신상 등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레퍼왕 테라스에서 과거 화려했던 앙코르 문화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프랑스 극동학원(Ecole Francaise d'extreme-orient)이 프랑스 외무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이곳의 보수를 하였다.


앙코르톰을 건설한 자야바르만 7세의 경우 그의 성장 과정과 업적을 전하는 돌 비문이 매우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외교 및 용병술에 뛰어났던 그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1190년에 마침내 숙적인 참파(베트남 남부에 참족이 세운 나라. 15세기 후반 베트남에 정복당함)를 항복시켰다. 대승불교를 신봉했던 그는 반테아이끄데이, 타프롬, 프레아칸, 타솜 등 많은 불교 사원과 승원을 만들었다.


수르야바르만 2세와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사원에서 알 수 있듯이 앙코르의 종교 건축물은 왕의 신앙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었다. 대부분 힌두교 사원 또는 불교 사원으로서, 힌두교 사원의 경우 대개 비슈누나 시바 혹은 브라흐마에 봉헌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왕神王 숭배 신앙(Devaraja)도 종교 건축의 특징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데, 야소바르만 1세가 건립한 힌두교 사원인 롤레이 사원의 경우 탑 중앙에 그 주요 상징인 링가(신과 왕이 합치한 시바신의 상징인 남근)를 설치하여 이에 성수를 부으면 사방으로 흐르도록 구성되었다.


이들 앙코르 지역 내 유적은 앙코르 유적 보호 및 조정을 위해 만든 국제적 보호 기구인 국제조정위원회(ICC : 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 for the Safeguarding and Development of the Historic Site of Angkor)의 적극적인 역할 아래, 이에 참여한 국가들에 의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바푸온 사원은 프랑스의 극동학원, 프레룹은 이탈리아의 I.GE.S(Ingegneria Geotecnica e Strutturale), 프레아코는 독일의 GACP(German Apsara Conservation Project : 쾰른에 근거를 둔 비영리 기구), 타프롬은 인도의 ASI(Archeological Survey of India : 고고학 연구 및 문화유산 보존 책임을 맡고 있는 인도 문화부 소속 정부 기관)가 맡고 있다.

 

각 나라의 문화재 정책과 경제 여건이 반영된 보수가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의 극동학원이 맡고 있는 바푸온 사원의 경우 유적 보수에 콘크리트가 적극 사용되고 있고, 인도의 ASI가 맡고 있는 타프롬의 경우 중앙부는 지속적으로 붕괴되는 가운데 맨 앞과 뒷부분만 보수가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 분야에서 국력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이런 중에도 앙코르의 경사 지형을 활용하여 우기 때 빗물을 흘려보내면서 저수지 및 사원 등에 빗물이 저장되도록 한 고대의 배수로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수하여 북쪽에 위치한 저수지인 노던바라이(Northern Baray)에 저장되는 물 용량이 크게 증가되고 네악포안(Neak Pean : 12세기말 건립된 불교 사원)에도 원래대로 물이 담기게 되는 등 상당한 가시적 성과도 볼 수 있다.

 

한국 정부에서도 앙코르 지역 내 급증하는 교통 차량으로 인한 진동 유발과 대기 오염 등으로부터 유적 훼손을 방지하고 지속 가능한 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1,42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유적 주변으로 36km에 이르는 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일본 정부(JSA)의 경우 1999년부터 2011년까지 유적 보수를 위해 지원한 예산은 420만 달러였다. 오늘날 이곳 앙코르를 가장 많이 찾는 외국인은 한국인이다. 장군총을 비롯한 많은 석조 피라미드를 남긴 고구려의 후예이기에 위대한 석조 유산을 간직한 앙코르에 문화적 동질성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글 | 사진· 김성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시설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