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물, 우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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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화재청 | ||
작성일 | 2011-06-14 | 조회수 | 210 |
근대 우편제도의 태동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본격화된 외국과의 통상교섭은 신지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 가운데 당시까지 일부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서신 전달의 수단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강화도조약(1876)이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첫 수단으로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선진 문물과 제도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국내에 알렸다. 특히 1880년 파견된 제2차 수신사 일행 중 개화당의 중진이었던 홍영식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며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는 새로운 우편제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후 홍영식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다.)의 일행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보빙부사의 자격으로 미국의 우편제도와 국제우편교류를 위한 만국우편연합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접한 홍영식은 근대 우편제도에 관한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귀국한 홍영식은 한성순보(1883년 창간)를 통해 외국의 우편제도와 필요성을 소개하는 한편, 조정에는 근대 우편제도의 필요성과 도입에 대해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의 재가를 얻어 이 땅에 최초로 근대 우편제도의 실시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1884년 3월 27일, 고종의 칙명으로 시작된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통신을 관장하는 기구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설치되었던 우정사郵程司를 우정총국郵政總局으로 승격시키고 병조참판이었던 홍영식을 초대 우정총판(장관)으로 임명하여 우정사무 전반을 감독하게 하였다. 전의감 건물이었던 곳에 자리 잡은 우정총국에서는 홍영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 우편제도에 관한 규칙을 담은 ‘대조선국우정규칙大朝鮮國郵征規則’ 제정을 통해 근대 우편제도의 법규를 마련하고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우편에 사용될 우표를 일본 대장성에 의뢰해 만들게 되었다.
비운의 최초우표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을 딛고 근대 우편제도가 다시 시작된 것은 1893년 이후이다. 전보총국을 조선 전우총국으로 개편하며 우정사업을 통합 운영할 조직의 정비를 시작으로 만국우편연합 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미국인 고문을 두어 우편재개를 위해 힘쓰게 하였다. 우편에 사용될 태극 보통우표 4종을 미국에 의뢰하였고, 1895년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하며 산하에 통신국通信局을 설치해 새로운 근대적 우편기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정비하고 같은해 6월 1일(음력)에는 한성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개설하여 우편업무를 재개하였다.
우편제도의 암흑기
1900년 11월에는 우무 및 전무학도규칙의 반포를 통해 우편, 전신업무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국립 양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명실공히 오랜 숙원이었던 근대 우편제도의 정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과 성장은 다시 한 번 기나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통신권 강점은 1910년의 국권상실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한국을 병합할 방침을 굳힌 일본은 1905년 초부터 대한제국의 통신기관을 무력으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4월 1일 ‘한일통신기관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모든 통신권을 강점한 일본은 5월 18일 한성우체총사를 시작으로 불과 40여 일만인 7월 2일에 강계우체사를 끝으로 모든 우체사의 인수를 마쳤다.
이에 앞서 7월 1일 ‘대한제국의 우표 및 엽서의 발매 금지’를 공포한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 설치한 통감부의 통신 관리국을 통해 1909년 ‘대한제국 우표와 엽서의 사용 금지’를 공포함으로써 우리의 자주적 우편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10년 주권을 빼앗긴 이후 35년간 일본의 우표를 사용하고 그들의 우편제도를 따르며 해방이 찾아올 때까지 기나긴 암흑 속에 머물러야 했다.
글 / 사진ㆍ이석연 한국우편사업지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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