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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표하는 기록물, 우표 (옮겨온 글)2011.7.12.

왕토끼 (秋岩) 2011. 7. 12. 20:41

제목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물, 우표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6-14 조회수 210

 

근대 우편제도의 태동
격동의 조선말,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었다. 우리에 앞서 이미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중국은 물론, 프랑스, 미국 등 다양한 방면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사회에 대한 소식들과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이 맞물려 젊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본격화된 외국과의 통상교섭은 신지식을 가진 젊은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이 가운데 당시까지 일부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서신 전달의 수단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강화도조약(1876)이후,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첫 수단으로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선진 문물과 제도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국내에 알렸다. 특히 1880년 파견된 제2차 수신사 일행 중 개화당의 중진이었던 홍영식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며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는 새로운 우편제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후 홍영식은 1882년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에 따른 보빙사(報聘使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이다.)의 일행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보빙부사의 자격으로 미국의 우편제도와 국제우편교류를 위한 만국우편연합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접한 홍영식은 근대 우편제도에 관한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귀국한 홍영식은 한성순보(1883년 창간)를 통해 외국의 우편제도와 필요성을 소개하는 한편, 조정에는 근대 우편제도의 필요성과 도입에 대해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등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의 재가를 얻어 이 땅에 최초로 근대 우편제도의 실시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1884년 3월 27일, 고종의 칙명으로 시작된 근대 우편제도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통신을 관장하는 기구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설치되었던 우정사郵程司를 우정총국郵政總局으로 승격시키고 병조참판이었던 홍영식을 초대 우정총판(장관)으로 임명하여 우정사무 전반을 감독하게 하였다. 전의감 건물이었던 곳에 자리 잡은 우정총국에서는 홍영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우편제도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 우편제도에 관한 규칙을 담은 ‘대조선국우정규칙大朝鮮國郵征規則’ 제정을 통해 근대 우편제도의 법규를 마련하고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우편에 사용될 우표를 일본 대장성에 의뢰해 만들게 되었다. 

 

비운의 최초우표
당시 우리나라에는 우표를 인쇄할 시설이 없어 일본에 의뢰했다.태극문양이 들어간 최초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의 다섯 종류로 우편업무가 개시되는 우정총국 개국일에 맞춰 발주되었다. 현재 이 우표들은 문위우표라 불리는데, 이는 우표의 액면 금액이 당시에 통용되던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표시되어 있어 훗날 수집가들에 의해 불리는 명칭이다. 당시 화폐는 상평통보가 사용되었고 문文은 보조화폐의 단위로 푼分이라고도 불렸다. 1문(1푼, 엽전 한 닢)은 오늘날의 화폐로 환산을 하면 약 700원 수준이다.


우편업무의 개시를 위한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국내·외에 우편업무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경성의 총국과 인천의 분국을 오가는 첫 우편선로를 통해 1884년 11월 18일 근대 우편제도의 첫 사무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첫 발자국은 불과 20여일 만에 끝이 났다. 우편업무 개시 17일 만인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시점으로 일어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정변의 주역이었던 개화당의 몰락과 함께 우정총국 또한 문을 닫고 만 것이다. 이때까지 도착한 우표 5문, 10문 단 두 종 역시 20여 일만 사용되는 단명에 그치고 말았고, 그때까지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우표는 미발행우표로 남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근대 우편제도의 재도약
갑신정변 이후 갑오개혁으로 다시 근대적 우편기구가 수립될 때까지 우편사무는 종래와 같이 역참제驛站制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간 이 땅에는 일본과 청국에 의해 개설된 외국의 우편제도가 판을 치게 되었고, 그 대상이 조선에 머물고 있는 자국민의 소식 전달을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우리 정부와 일고의 상의도 없이 실시한 주권 침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혼란과 어려움을 딛고 근대 우편제도가 다시 시작된 것은 1893년 이후이다. 전보총국을 조선 전우총국으로 개편하며 우정사업을 통합 운영할 조직의 정비를 시작으로 만국우편연합 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미국인 고문을 두어 우편재개를 위해 힘쓰게 하였다. 우편에 사용될 태극 보통우표 4종을 미국에 의뢰하였고, 1895년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통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하며 산하에 통신국通信局을 설치해 새로운 근대적 우편기구로서 그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정비하고 같은해 6월 1일(음력)에는 한성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개설하여 우편업무를 재개하였다.

 

우편제도의 암흑기
갑오개혁 이후 근대 우편사업의 재개와 함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경기도를 시작으로 확충된 우편망은 일본에 통신권이 피탈될 때 까지 13개도, 총 343개 임시우체사에 이르는 전국적인 규모로 구축되었다. 1900년 대한제국은 만국우편연합에 가입됨과 동시에 국내 뿐 아니라 외국과의 우편물 교류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우표의 인쇄를 당시까지 외국에 의존하다가 독일에서 석판인쇄기를 들여와 최초로 국산우표인 이화보통우표를 발행하였고, 190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편엽서도 발행하였다.

 

1900년 11월에는 우무 및 전무학도규칙의 반포를 통해 우편, 전신업무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국립 양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명실공히 오랜 숙원이었던 근대 우편제도의 정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과 성장은 다시 한 번 기나긴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통신권 강점은 1910년의 국권상실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한국을 병합할 방침을 굳힌 일본은 1905년 초부터 대한제국의 통신기관을 무력으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4월 1일 ‘한일통신기관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모든 통신권을 강점한 일본은 5월 18일 한성우체총사를 시작으로 불과 40여 일만인 7월 2일에 강계우체사를 끝으로 모든 우체사의 인수를 마쳤다.

 

 이에 앞서 7월 1일 ‘대한제국의 우표 및 엽서의 발매 금지’를 공포한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 설치한 통감부의 통신 관리국을 통해 1909년 ‘대한제국 우표와 엽서의 사용 금지’를 공포함으로써 우리의 자주적 우편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10년 주권을 빼앗긴 이후 35년간 일본의 우표를 사용하고 그들의 우편제도를 따르며 해방이 찾아올 때까지 기나긴 암흑 속에 머물러야 했다.

 


시대의 얼굴
우표는 한 국가의 표상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물이다. 격동의 세월을 함께 한 우리의 우표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환희와 슬픔이 함께 묻어있다. 비록 짧은 글로는 못 다한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날 최고의 인쇄기술로 표현되는 작은 네모 속에 담긴 메시지는 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이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을 달려가고 있다. 

 

글 / 사진ㆍ이석연 한국우편사업지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