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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한국유물과 마이어 기증품 (옮겨온 글)2011.7.12.

왕토끼 (秋岩) 2011. 7. 12. 20:39

제목 독일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한국유물과 마이어 기증품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6-14 조회수 219

 

마이어 컬렉션 한국유물의 성격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유물은 총 2,565개에 달하며, 그 종류 역시 매우 다양하다. 회화, 자기, 불상 등 여타 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물품들도 있지만, 이보다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과 무속신앙의 형태를 알려주는 직물, 의복, 무기, 농사용 기구, 장례용구, 흉배와 관모, 말린 약초와 종이를 꼬아 만든 새끼줄 등 다량 소장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부적, 신령들의 초상화, 무당의 의복 등 ‘굿’에 사용된 일체의 용구들이 전체 소장품의 삼분의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소장품이 조선의 무속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인류학 내지는 민족학 연구 경향과 연관이 있다. 당시 유럽의 민속학은 주로 사회의 하위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집단 내부에 보존되어 있는 유서 깊은 관습과 신앙 형태를 분석함으로써 인류의 정신사를 추적해 나가고자 하였다.

우리의 민속문화를 품다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한국유물은 다양한 신분층의 독일인들에 의해 수집되었다. 묄렌도르프의 청빙으로 조선의 지하자원을 조사하기 위해 1883년 입국한 독일의 광물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칼 크리스티안 곧쉐(Carl Christian Gottsche 1855~1909)는 수차례의 조사를 거치면서 다량의 조선지도를 구입하였다. 현재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대동여지도는 그가 조선에서 수집한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모두 2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각장은 높이가 30cm 정도이다. 낱장들에는 그 지역의 행정구역을 분류하는 표시와 봉화대, 창고 등이 표시되었으며, 이들을 전후좌우가 맞도록 배치하면 조선의 전체 지도가 만들어진다.


이외에 독일 함대의 제독이었던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Heinrich, Prinz von Preußen 1862~1929)는 1899년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40여 개의 선물을 하사 받기도 했다. 이후 그의 미망인에 의해 문관, 무관의 관복 일체가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안과의사로서 다량의 부적을 수집하였던 지그프리드 셀리그만(Siegfried Seligmann 1870~926), 1935년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한 점의 유화작품을 기증한 서양화가 배운성(裵雲成 1900~1978)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의 도움으로 소장품의 규모는 점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한국유물 소장에 가장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이는 마이어였다. 하인리히 콘스탄틴 에두아르 마이어(Heinrich Constantin Eduard Meyer 1841~1926)는 우리나라 외교관이 독일에 파견되기 이전, 조선 정부로부터 임명된 독일주재조선국총영사로서 맥이麥爾 혹은 매야梅耶 등으로 불렸다. 마이어는 1870년대부터 중국에서 무역업을 시작하여 천진에 마이어 무역회사(H. C. Eduard Meyer & Co.)를 세웠다.


마이어 무역회사는 이후 중국뿐 아니라 함부르크와 런던에도 지부를 두고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독일로부터 실리적 지원을 얻기 위해 정치인이 아닌 기업인을 독일주재 조선총영사로 임명하기로 결정하면서 하인리히 마이어가 그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조선국총영사로 임명되자 마이어는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1887년 내한하였다.


조선 지부의 이름은 세창양행世昌洋行으로 하였으며 제물포에서 실무를 담당할 지부장으로는 칼 안드레아스 볼터(Carl Andreas Wolter 1858~1916)를 임명하였다. 세창양행은 물감과 바늘 등 생필품 생산으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정부와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많은 일을 도모하였다. 1886년에는 조선정부에 은 10만량을 대부하였고, 독일로부터 조폐기기 수입을 알선하였다. 또한 전기 부설권과 강원도의 금성광산 채굴권을 따내기도 하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함부르크에 설치되었던 한국영사관은 1905년 12월 15일 폐쇄되었다. 1907년 마이어는 볼터에게 세창양행의 전권을 위임하기 위해 1907년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마이어가 조선국총영사로 함부르크에서 실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어도 미술방면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기획하였다. 1889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한국 물품을 전시하였으며, 1894년에는 함부르크의 공예박물관에서 한국 유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현재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는 세 차례에 걸쳐 기증된 949개 이상의 마이어 컬렉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1차 기증은 함부르크공예박물관에서 한국유물 전시회가 열렸던 직후인 1895년 4월에 이루어졌다. 동전 10개, 청자 3점, 백자 한 점이 기증되었다. 이후 정확한 수량은 파악할 수 없으나 1907년 마이어는 자신의 소장품 가운데 상당량을 박물관에 다시 한 번 기증하였다. 1908년과 1909년에는 남은 소장품 전부를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매매하였다. 마이어는 이후 고종 황제에게서 선물로 받은 담배상자가 기증품에 섞여 들어간 것을 발견하고 이를 되받아 가기도 하였다.


마이어 기증품 가운데 대표적 회화작품으로는 허련(許鍊 1809~1892)의 묵모란 8곡 병풍을 들 수 있다. 1909년 박물관에 기증된 이 작품은 1981년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이 초청한 김용복에 의해 새롭게 병풍으로 표구되었다. 제시와 더불어 먹의 풍부한 사의성이 드러난 묵모란도는 허련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도자기로는 19세기 경 작품으로 보이는 <흑유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흑유자기는 국내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예로 두터운 유약의 표면에 클로버 잎과 세 개의 단풍잎 문양이 자연스럽게 시문 되었다.


마이어 기증품 가운데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무속용구들이다.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무당이 사용하던, 삼신할매가 그려진 부채와 굿에 사용된 장구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탈춤에 사용되던 우리의 해학이 가득담긴 ‘옴중탈’ 역시 마이어 소장품 가운데 하나다.


이 같이 마이어 소장품이 수준 높은 조선의 미술품도 포함하고 있으나 생활용품과 무속 용품에 집중된 까닭은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초대관장이자 민속학자였던 틸레니우스 교수의 관점이 십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구체적 관심사는 함부르크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틸레니우스가 마이어 영사에게 보낸 편지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틸레니우스는 조선의 토착신앙에 큰 관심을 보이며 마이어에게 일체의 무속용품들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과 차이점을 보이는 물품들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면 조선을 ‘관모를 통해 신분이 구별되는 유일한 나라’라고 묘사하면서 마이어에게 흉배와 다양한 관모를 수집하도록 권고하였다. 회화에 있어서도 전통 수묵화 보다는, 달군 쇠를 사용하여 민화풍의 문양을 그려내는 ‘낙죽烙竹’ 작품을 구입할 것을 요청하면서 ‘낙죽이 회화적 표현에 있어서의 한국적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한 시대의 생활문화와 삶의 양태를 보여주다
이 같은 경향은 마이어 컬렉션만의 특징이 아닌 함부르크민속박물관 소장품의 특징이자, 독일 내 한국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라이프찌히, 드레스덴 등 여타 민속박물관들의 수집 경향이기도 하다. 민속학적관점이 아닌 Fine Arts의 개념으로 한국미술품을 수집한 독일의 베를린동아시아박물관과 쾰른동아시아박물관에는 문인화와 서예, 불화와 도자 등 한국의 예술적 수준을 대변해주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함부르크민속박물관의 마이어 컬렉션은 Fine Arts의 개념만으로는 온전히 파악 할 수 없는 한 시대의 생활문화와 삶의 양태를 유물을 통해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글ㆍ이주현 명지대학교 교수   사진ㆍ독일함부르크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