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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고유의 화풍이 시작된 길목, 인왕산 서울성곽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4. 4. 18:28

제목 민족 고유의 화풍이 시작된 길목, 인왕산 서울성곽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3-10 조회수 125

 

도시 뒤에 숨겨진 묘연한 산길
박재동 화백과 인왕산에 오르는 길, 독립문역 부근에서 골목만 잘찾아 들어가면 금방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던 등산로는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마침 지나던 주민 한 분이 박 화백의 팬이라며 친절히 안내해 준 덕분에 찾아낸 진입로는 산 중턱까지 차지하고 있는 아파트 건물 뒤편에 있었다. 반갑게 들어선 산길, 성곽은 그 초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은 태조 4년(1395) 한양천도에 앞서 궁궐과 종묘를 지은 후 수도방위를 위해 쌓은 성곽으로,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남산과 낙산, 인왕산 줄기로 이어진 당시 도성의 원형이다. 성곽은 석성과 토성으로 쌓았고 숙청문肅淸門·흥인문興仁門·돈의 문敦義門·숭례문崇禮文의 4대문과 홍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의 사소문을 두었다.애통하게도 평지 구간의 성곽은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리고, 근대화의 방편으로 전차가 놓이면서 삼청동, 장충동 일대 일부 구간만이 남았다.

 

여러 차례 고초를 치르며 허물리고 다시 복구된 흔적들은 인왕산 성곽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기까지는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색이 진해지는 이경계부터는 나중에 다시 만든 것 같아요. 중국은 벽돌을 만들어서 찹쌀풀로 단단히 붙여 성을 쌓았으니 탄탄하기도 하고 훨씬 쉬웠을 거예요. 이 무거운 돌을 밧줄에 엮어서 옮겼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성벽 가까이로 걸으며 성벽의 모양과 색, 돌과 흙의 느낌을 관찰하는 박재동 화백. 짧은 거리에도 붉은빛인 곳과 짙은 흑회색인곳이 선명하게 구분되고, 돌의 생김 그대로 쌓은 곳과 네모 각지게 연마된 곳의 차이도 한눈에 보인다.

 

그런 중에 이 성곽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고초를 짐작해 보기도 한다. 종묘의 터닦기를 시작으로 10개월여 만에 이루어진 신도읍 건설에는 인접한 지역의 민간 장정들과 승유억불정책으로 천대 받았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그 고된 부역을 감당하고도 도성에 발 들일 수조차 없었던 승려들의 억울함을 짐작해 보며 박 화백은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한동안 머물렀던 그 지점을 천천히 떠났다.

 

 

겸재 정선을 추억하는 이 시대의 그림쟁이

박재동 화백에게 인왕산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조선시대의 거장,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216호)’에 대한 애정과 동경 때문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인왕제색도’에는 한여름 소나기가 쏟아진 뒤 안개를 휘감고 있는 인왕산의 모습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거침없는 붓칠로 깎아내린 절벽과 흑과 백의 대비로 드러난 굽이진 습곡.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본 풍경을 과감한 생략과 과장으로 재구성했다.


‘인왕제색도’를 옮기는 박재동 화백의 음성은 매우 상기된 듯 감탄사와 뒤섞여 나왔다.‘인왕제색도’와 더불어 겸재의 3대 명작으로 꼽히는‘백연폭포’와 해금강의 통천 동남쪽 해변에 위치한 문암門巖을 그린‘통천문암도’에서도 그러한 왜곡의 묘미가살아있다. 실경의 몇 배 높이로 그려진 박연폭포는 그 세찬 물줄기를 보고 느낀 전율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말을 타고 가는선비를 곧 덮칠 듯이 솟아오른 파도는 내가 만약 저곳을 지난다면 어찌할까, 순간 움찔할 정도로 생생한 율동감을 만들어 낸다.“인왕제색도는 겸재 선생이 76세에 완성한 작품이에요. 절친했던사천 이병연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슬픈 마음을 커다란 집으로 나타낸 것이죠.”

 

정선의 과감한 과장과 재해석, 김홍도가 그려낸 생생한 민중의 삶의 모습, 신윤복의 작품 속에 담겨있는 비판과 풍자를 배우고 싶다는 박재동 화백. 서로 다른 화풍을 가졌던 세 명의 거장과 그 뒤를 이어 우리 민족만의 화풍을 발전시켜 나갔던 장승업, 김정희 등에 대한 회고는 성곽을 따라 걸으며 한참이나 계속 이어졌다.

 

박재동 화백은 화가로서 존경하는 겸재 정선을 느낄 수 있어 인왕산이 좋다고 한다. 겸재의 그림 속에는 한국의 자연이 있고,한국의 집이 있고, 한국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 위에 감흥이 살아있는 것이리라. 그는 겸재 선생이 걸었던 그 길을, 겸재 선생의 마음을 헤아리며 걸어 올라간다.

 

 

정상에서 다시 출발하는 성곽의 줄기, 다시 피어나는 창조의 열정
8년 동안 하루하루 마감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그는 이제 대학 강단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교수로, 애니메이션 작가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덕분에 늘 그를 따랐던 긴장과 스트레스는 이제 사라졌지만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다 뭔가 찾아냈을 때의 쾌감이 그리울 때도 많다.


몸과 마음이 게을러져 한참만에 산에 왔다는 박재동 화백. 느린 걸음으로 성곽 한 단, 한 단과 대화하며 느즈막히 도착한 정상에서 드디어 그는 세상에 시선을 준다. 멀리 도시의 일상이 보인다. 겸재 정선이 자연을 주로 그린 화가였다면, 그는 사람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다. 시사만화 연재를 그만둔 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시선이 조금 달라졌을 뿐 그는 여전히 사람 사는 모습을 그리고, 독자들과 같이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작은 프레임 속에 담는다.

 

“정선 이전 시대의 미술이 중국을 따랐다면, 요즘의 만화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만화가로 살면서 조금 뿌듯한 게 있다면 일본을 따르지 않고, 한국 만화만의 화풍을 만들어왔다는 거예요.”


어쩌면 겸재 시대의 미술은 지금의 회화보다는 만화라는 장르와 더 많이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민중의 삶을 재치와 해학으로 담아내는 면에 있어서 말이다. 박재동 화백은 한국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때로는 과장을 통해 더욱사실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러기 위해 만화에 있어 한국성이 담긴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는 데도 힘써 왔다.


박재동 화백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인왕산 정상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색이 곱던 성벽의 돌 하나, 그아래 얌전히 돋아있던 잔디, 그 곳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말이다. 3월이 되서 입산금지가 해제되면 오늘 못가본 구간도 돌아봐야겠다며 천천히 산을 빠져 나오는 박재동 화백.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기틀을 완성해 갔던 인왕산을 내려오는 그는 온전히 체중을 실어 내리막을 걷듯, 창조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지긋이 가슴에 새긴다.

 

 

글·성혜경 사진·최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