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옛 길손, 그날의 문장을 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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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화재청 | ||
작성일 | 2011-03-10 | 조회수 | 116 |
사람의 발길 닿는 곳에 열린 오롯한 길
"달밤에 고향 길의 하늘을 보니 뜬구름은 시원스레 흘러가누나. 소식적어 그편에 부칠 수도 있으련만 빠른 바람결은 아랑곳도 않는구나. 내 나라 하늘은 먼 북쪽 끝 이곳은 남은 땅 서쪽 모퉁이 무더운 남방엔 기러기도 없으니. 뉘라서 숲(신라의 계림)을 향해 날아가 줄까?"
열린 세계관을 위한 호흡
고려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을 비롯한 외국을 다녀와 여러 가지 글을 남겼지만 본격적으로는 조선시대 때 많이 이루어졌다. 숙종 시대의 신유환은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해유록>을 지었다. 일본인 학자가 신유한에게“세상에서의 벼슬을 하는데,어떤 공부를 하였습니까?”라고 묻자“불교에서 마음을 닦는 것은 한 개의 무無자인데,세간에 마음을 둔 사람이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겸손한 대답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정, 중국을 오가는 연행길이 있다. 조선의 이름난 사대부들은 대부분 사행使行차 중국을 다녀왔다. 허균, 홍대용, 김정희 등 수많은 사람들이중국 땅을 밟아 세계를 익히고 돌아왔다. 많은 인물들 중에서 연행문학의 백미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연암의 삼종형이자 영조의 부마였던 박명원을 따라 중국의 열하까지 간 연행길에서 쓰인 글)>를 지은 연암 박지원은 온 나라를 떠돌며 견문을 넓혔다.
학문의 업적은 남달리 뛰어났으나, 왕실과의 인척 관계로 벼슬에 오를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지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보면, 연암은 나라안의 명산을 두루 다녔는데, 서쪽으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젠가는‘나는 과거를 일찍 그만두어 마음이 한가하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산수 유람을 많이 했다.’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가벼운 마음은 연암의 발걸음 사이에서 얼마나 고운 노래를 불렀을까. 그는 그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다른 길을 발견했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이 수역 홍명복과 나누는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 연암이 찾은‘길’을 엿볼 수 있다.“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다네. 이 강은 바로 저 언덕과 우리와의 경계이므로 응당 언덕이 아니면 물일것이네.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게아니라곧물과 언덕가에 있는 것이란말일세.”연암은 길이란 어디에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길은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자유로움의 기록으로 짙게 새겨졌다.
유배, 그 고난 속에서 뜨거운 마음을 품다
“띠로 이은 가게 집 새벽 등잔불이 파르르 꺼지려 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샛별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기만 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할 말을 잃어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오열만 터지는구나…”
다산의 뒤를 이어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도로 유배의 길을 떠난 때는 헌종 6년인 1840년이었다. 육지에서 제주해협을 건너 제주도로 건너가던 과정이 사촌 동생 명희命喜에게 보낸 편지에 그때의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떠난 그날은 행장을 챙겨서 배에 오르니 해는 이미 떠올랐었네. (중략) 풍세가 꽤나 사납고 날카로워져서 파도가 일렁거리고 배가 따라서 오르내리니 배를 처음 타본 여러 사람들은 금오랑金吾郞으로부터 우리 일행에 이르기까지 그 배에 탄 초행인初行人들이 모두가 현기증이 일어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네. 저녁놀이 질 무렵에 곧장 제주성의 화북진 아래에 도착하니 이곳이 곧 배를 내리는 곳이었네.”
제주의 화북진에 도착한 김정희는 <영주 화북진 도중>이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마을 안 아이들이 무얼 보려 모였는지 귀양살이 면목이 하도나 가증可憎한데 끝끝내 백천 번을 꺾이고 갈릴 때도 임의 은혜 멀리 미쳐 바다 물결 아니쳤네.”
이외에도 과거를 보기 위해, 장사를 위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길손을 자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난관을 겪었지만, 그 길 끝에서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깨달음을 이기지 못했다. 고려의 시인 김극기, 조선의 천재 매월당 김시습,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김삿갓이라고 불린 방랑시인 김병연. 이 땅을 수없이 걸어 다닌 대표 길손들이다. 그렇다. 사람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기고, 그리고 그 길을 또 른 사람들이 부단히 오고 간다. <아큐정전>을 쓴 중국의 학가 루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게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게 곧 길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상路上에 있다. 그 길은 사라지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하며 사람들은 시종여일하게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여행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수많은 갈림길을 나야 한다”라고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구처럼.
글 | 사진·신정일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대표 사진·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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