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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길에서 배우는 소통의 가치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3. 21. 18:59

제목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배우는 소통의 가치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3-10 조회수 83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 조선통신사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공식적인 해외 체험은 사신행차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곧 명明과 청淸에 각각 파견된‘조천사朝天使’·‘연행사燕行使’로 대표되는 중국과,‘통신사通信使’로 대표되는 일본으로의 사행이 그것이다.

 

특히 조선통신사는 1428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의 왕이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통치자인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보낸 외교사절을 말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파견되었지만,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12차례의 사신행차를 일컫는다. 그것은 후기의 조선통신사가 전란의 상처를 딛고 행해진 외교사행인 데다, 이를 통해 양국의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공식 통로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외교사절단인 조선통신사를 문화사절단으로 보기도 하는 것은 그 구성원의 면면에서 잘 드러난다. 곧 조선 조정은 일본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외교에 밝고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난세 사신을 비롯하여 제술관製述官, 서기書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악대樂隊, 마상재馬上才등 한결같이 문학적 재능과 기예로 당대를 대표하는 이들을 선발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이와 같은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인과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문학적 교류를 비롯하여 서화書畵와 음악을 포함한 예능은 물론 의복과 음식 등 생활문화와 의술과 조선造船등 기술문화의 교류에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결과 조선통신사는 진솔한 마음의교류를 통해 상대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고 상호소통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는 국제외교사에서 찾기 힘든 문화사행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국내 노정 속의 공식행사
조선통신사의 전체 노정은 왕복 약 4700㎞이며, 그 중 약 1/5이 국내 노정이다. 왕명을 받고 숭례문을 나선 사행은,‘갈 때는 경상 좌도左道를 거쳐 가고, 올 때는경상 우도右道를 거쳐 온다.’는 규정에 따라 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숭선·충주·안보·문경·유곡·용궁·예천·풍산·안동·일직·의성·청로·의흥·신녕·영천·모량·경주·구어·울산·용당·동래를 거쳐 도일 전 마지막 집결지인 부산에 이르렀다.
1763년 사행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남옥의『일관기日觀記』에 기록된 국내의 전체 노정은 20일 동안 약 30개 지역으로 무려 440㎞에 달한다. 이틀을 머문 세 지역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26㎞를 이동한 셈이다. 왕명을 수행하는 사행인 만큼 국내 노정에는 전별연餞別宴·마상재馬上才·해신제海神祭등 공식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별연은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를 위로하는 잔치로 영천에서는 경상도 관찰사가, 부산에서는 경상 좌수사가 베풀었다. 특히 부산의 전별연은 경주·동래·밀양의 기생들이 저마다의 기예를 뽐내는 경연장이 되어,예능인들의 기예 향상과 상호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신유한이『해유록海游錄』에서‘왼쪽으로 뛰다 오른쪽으로 뛰고, 두 말의 등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며, 가로 누웠다 벌떡 일어나는’것으로 묘사한 마상재는, 말 위에서 재주를부리는 기예, 또는 기예를 부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안동과 영천에서 열렸다.

 

특히 영천의 경우 조양각에서는 악공의 연주와기생의 가무가 어우러진 전별연이, 그 앞 남천변에서는 마상재가 함께 베풀어져 관람객과 장사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역축제의 장이 마련되기도 했다.

 

또, 해신제는 도일을 앞둔 조선통신사가 부산의 영가대永嘉臺앞에 해신을 모신 제단을 설치하고,사행의 안전과 무사항해를 기원하던 행사였다.5일 전에 제삿날이 잡히면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이틀 동안 술·고기·파·마늘을 먹지 않았다. 문상과 문병을 하지 않으며 하루 동안 목욕재계를 할 정도로 온 정성을 쏟았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여행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의 애환과 국토산하의 재발견
비록 왕명의 수행이라는 뚜렷한 지향점과 목적의식을 가진 사행이라 하여도 여행의 특성상 개인적인 감흥이나 풍류가 없을 수 없다. 근대적 교통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서의 여행은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이고, 그체험은 소중한 것이었다.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마다 소록소록 역사의 애환이 묻어났다.
충주의 탄금대를 지날 때는 배수진을 치며 왜적과 맞서다 결국 순국한 신립장군과 8천 군사의 한을 떠올렸고, 안동의 삼구정三龜亭에서는 청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고 낙향한 김상헌의 강직함을 떠올렸다.

 

특히 국내 노정의 마지막 노정인 동래에 이르면어김없이 충렬사에 들러 참배를 하였는데, 한결 같이 왕명을 수행하는 긍지와 더불어 그 이면에는 불구대천의 원수인일본에 사행을 떠나야 하는 원통함을 피력했다. 이는 김인겸이 <일동장유가>에서‘충렬을 감격하야 재배하고 / 우리길 생각하니 괴루愧淚를 금할소냐’라고 읊어 동래부사 송상현으로 대표되는‘충렬’과 자신들의 ‘부끄러운 눈물’을 대비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에는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국토 산하의 아름다움도 오롯이 피어났다. 괴산의 수옥정에서는 10여 길의 폭포수가 물방울이 되어 흩어지는 아래서 의관을 풀어헤치고 한 잔술을 나누었고, 힘겹게 넘어온 문경새재의 교귀정交龜亭에서는 가을빛으로 물든 산봉우리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이랴. 안동의 영호루와 망호루, 영천의 조양각, 의성의 문소루와 관수루, 밀양의 영남루, 부산의 태종대·해운대·몰운대·금정산성 등 노정 상의 명소를 마주할 때마다 누에가 실을 토해내듯 어김없이 그 감흥을 시문으로 옮겨냈다. 그야말로 사행노정을 따라 국토산하의 재발견이 이루어진 셈이다.

 

 

인적 교류와 몇 가지 일화
조선통신사의 발걸음이 머문 곳에는 사람 간의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곧 중앙의 문사들과 지방 문사들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통신사 사행원과 영천 선비들과의 만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객관을 찾은 수십 명의 영천 선비들은 조호익의 제자들이었다.
조호익은 유배된 죄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후진 양성에 힘써 선조임금으로부터‘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탄을 받은 인물이다. 일본 내에서 보이던 조선통신사와 지역문사 간의 집단적 교류가 이미 국내 노정에서부터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긴 여행길에는 다양한 일화가 생기기 마련인데, 특히 1763년 사행은 여성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한다. 출발 전에 일찌감치‘재색財色’을 경계하는 각오를 단단히 한 정사 조엄은 평소 가까이 하던 기생이안동에 있었지만 만나지 않았고, 귀로의 대구에서는 직접 그녀를 만났지만 서숙부가 돌아가셨다는 핑계로 물리친 후 비로소 그 경계를 지켰다고 기뻐한다. 또 서기 김인겸은 여자를 밝히는 나이 어린 비장이최고로 예쁜 기생을 침소에 배정해 달라고 조르자 가장 박색인 기생을 돌려 앉히고 등불을 켜지 못하게 한 뒤 비장을 들여보내 골탕을 먹인다. 그리고 숙맥인 역관 이언진은 아비의 제삿날이란 기생의 거짓말에 속아 그녀를 집으로 보낸 후 홀로 밤을 하얗게 새고 만다.

 

조선통신사 노정의 현대적 의의
이처럼 조선통신사의 국내 노정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상호교류에 의한 소통’의 가치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전별연에서 드러난 예능인의 교류와, 중앙과 지방문사들 간의 교류, 그리고 국토산하의 재발견 등은 조선통신사가 내디딘 발걸음을 통해 얻어진 값진 결과물이다. 길이란 주인이 따로 없고 오로지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다. 이처럼 수백 년 전의 역사적 사실인 조선통신사가‘길’에서 발견한 가치를,이제는‘고립’·‘단절’·‘소외’라는 단어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들이 발견할 차례다.

 

 

글 | 사진·한태문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한국컨텐츠진흥원(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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