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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궁·진시황릉 복원…1,400년 전 세계 최대 도시 시안이 깨어나다 (옮깅)

왕토끼 (秋岩) 2011. 2. 28. 20:52

대명궁·진시황릉 복원…1,400년 전 세계 최대 도시 시안이 깨어나다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2-14 조회수 99

 

진시황릉, 그 비밀의 문이 열리다
지난해 9월 30일 오후. 시안시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35㎞가량 떨어진 린퉁현에서 진시황릉 유적지공원 개원식이 열렸다. 지금까지 일반에 공개된 진시황릉은 1974년 지독한 가뭄을 이기고자 우물을 파 내려가던 농부가 우연히 찾아낸 병마용 갱 1·2·3호 갱뿐이다. 이번에 새로 조성된 공원은 병마용 갱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 중심부에 위치한다. 현재 진시황릉의 병마용 갱은 7호 갱까지 발굴 중이다. 2009년부터는 주춤했던 1호 갱의 추가 발굴이 본격 재개됐다. 진시황릉 유적지공원 건설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액수는 7억 7000만 위안(한화 1308억 원). 올해 공원 안에 예능인 토용전시관, 문관 토용 전시관, 전차 토용 전시관 등이 속속 문을 열 예정이다. 중국이 그동안 발굴과 공개를 꺼리던 진시
황 지하궁전의 전모를 차차 세상에 드러내려는 움직임이다.

 

 

황성으로 가는 주작대로, 폭 150m 48차선 규모

시안은 서주西周, 진秦, 전한前漢, 신新,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후진後秦, 하국夏國,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까지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는 비옥한 중원이었고 그 핵심은 지금의 시안시 일대였다.‘ 치세가 길고 편안함이 오래갈 것’이라는 장치구안長治久安의 염원을 담아 당 제국은 수도를 장안長安이라 했다. 장안은 서기 637년 당시 인구 4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장안성은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과 음양오행 이론이 응축된 성곽의 집합이었다. 성 안에는 사각형으로 이뤄진 108개의 방坊과 동시東市, 서시西市,직선으로 쭉쭉 뻗은 길들을 만들었다. 황제의 거처인 궁성宮城태극궁太極宮앞에는 황제의 집무실 격인 황성皇城을 세웠다. 궁성과 황성의 크기는 명明, 청淸대에 개축되어 현재 남아있는 높이 12m, 너비 12~14m, 길이 14㎞의 시안성곽과 비슷한 규모였다.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에서 시작되는 주작대로朱雀大路는 당 제국의 중축선中軸線이었다. 폭 150m, 길이 5,020m의 초대형 도로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공원을 만들기 전에 세종로가 16차선 50m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1390여 년 전에 서울의 중심 도로보다 3배나 넓은 48차선 폭의 도로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사신과 상인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2005년 시안에서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Monuments and Sites) 15차 이사회가 열렸다. 대형 유적지와 주변 환경을 동시에 보호하자는‘시안선언’이 채택됐다. 2008년 시안시는‘시안 컨센서스西安共識’라는 대규모 유적지 발굴 보호 모델을 제창했다. 시성詩聖두보杜甫가‘인생에서 일흔 살은 예로부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했던 호수 곡강지曲江池를 복원하면서 주변에 고급 주택단지를 조성해 분양에 성공했다. 자금성 4.5배 규모의 대명궁 유적지를 복원했다. 지난해 9월 30일 1단계 공사를 끝내고 시안의 센트럴 파크를 꿈꾸는 공원을 개장했다. 지금은 주변에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추진 중이다. 이렇듯 유적지 복원과 개발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델이 시안 컨센서스다. 중국에서는 현재 시안을 쫓아 전국적으로 역사유적지 복원 붐이 일고 있다. 웅장한 대명궁의 복원은“구중궁궐 대문이 열리고, 만국의 벼슬아치들이 황제께절을 올린다九天闔開宮殿, 萬國衣冠拜冕旒”며 시인 왕유王維가 노래했던
세계 제국의 수도 장안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시도다.


호희胡姬·양귀비·측천무후…시안의 여인들
당제국의 수도 장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당시 서역에서 온외국인들이 넘쳐나는 국제도시 코스모폴리스였다.‘ 부잣집 자제들이 시내의 동쪽으로, 은 안장 백마에 얹고 봄바람 건너간다. 낙화 두루 밟고 어디로 놀러가나 웃으며 들어가네. 호희(胡姬, 이국여인)의 술집 안으로五陵年少金市東, 銀鞍白馬度春風, 落花踏盡遊何處, 笑入胡姬醉肆中’시선詩仙이백李白이‘소년행少年行’에서 읊었듯이 당대 장안에는 외국 여인네들이 손님을 맞는 술집들이 적지 않았다. 당나라의 호희는 지금의 이란에서 온 서역 출신 여인들이었다. 당시는 이국 풍속이 크게 유행해 페르시아 풍의 옷, 장식,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마치 서양의 팝이나 한국의 가요가 현대 중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도 시안 이슬람 사원 청진대사淸眞大寺인근에서는 서역의 이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하늘에선(눈과 날개가 하나뿐이어서 짝 짓지 못하면 날지 못하는) 비익조 되기를 원하셨죠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뿌리는 달라도 가지가 서로 얽힌) 연리지 되기를 원하셨죠在地願爲連理枝.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 하나 다할 날이
있지만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사라지지 않으리此恨綿綿無絶期’, 백거이의 시 장한가의 끝 구절이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60여㎞ 떨어진 곳에는 장한가의 주인공 양귀비의 묘와 사당이 있다. 당 현종의 며느리로 들어와 그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양귀비는 수양아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이곳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고 한다.

 

양귀비 묘의 봉분은 현재 벽돌로 싸여 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인근에 얼굴이 못생겨 시집조차 못 간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양귀비 묘에 와 얼굴을 묻고 울다 집에 돌아가 얼굴에 묻은 봉분의 흙을 물로 닦자 아름다운 얼굴로 변했다. 이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양귀비 묘의 흙을 파다가 바르기 시작했다. 이에 봉분이 사라질 것을 염려한 관청이 나서 봉분을 벽돌로 둘렀다고 한다. 또,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났던 화청지華淸池에는 마오쩌둥이 쓴 장한가가 비석에 새겨져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시안에는 미인뿐 아니라 여자 호걸의 유적도 전해온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남편인 고종과 함께 안장된 건릉乾陵이 바로 그 곳. 두 명의 황제가 하나의 능에 합장된 것은 세계적으로 건릉이 유일하다. 평지에 능을 만들지 않고 해발 819m의 양산梁山을 파서 능으로 삼았다以山爲陵.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남기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을 받든 무자비無字碑가전해온다. 또, 청말의 권력자 서태후西太后가 의화단의 난을 이유
로 베이징에 난입한 8국 연합군을 피해 이곳 시안에 피난 와 머무는 동안 즐겨 먹었다는 만두 전문점 덕발장德發長도 여행객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다.

 

 


서부대개발의 중심, 다시 찾아온‘장안의 봄’

‘장안의 봄은 본래 임자가 없으니, 옛날부터 홍루(주점)의 여인들 차지라네長安春色本無主, 古來盡屬紅樓女’‘전당시全唐詩’에 실린 위장韋莊의‘장안의 봄’의 첫 시구이다. 당나라 때 장안에 모란이 피는 봄이 오면 마치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열풍처럼 모란 사재기가 유행했다. 과거 모란과 호희들로 북적이던 시안에 다시 봄이 온 듯하다. 시안시 정부는 올해부터 시작되는 12차 5개년 경제개발 기간 동안 국제화 대도시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안에서 서쪽깐수甘肅성 톈수이天水까지 이어지는 관중-톈수이 경제구를 서부 대개발의 중심 기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2020년까지 연평균 12%성장을 달성하겠다고도 한다. 전국적인 고속철도 건설 붐에 힘입어 아시아 최대의 철도역사 건설도 추진 중이다. 중원中原이란 이름에 걸맞게 신장新疆에서, 홍콩까지 전 중국을 시속 400㎞를 넘는 고속철도로 엮어 1일 생활권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수많은 박물관과 사각의 성벽이 미래의 중국과 오버랩되고 있다.

 

글·신경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사진·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