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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공간의 한국형 퍼포먼스를 이어가다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2. 21. 22:12

열린공간의 한국형 퍼포먼스를 이어가다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2-14 조회수 39

 

 

흥에 빠지면손을 놓을 수 없는 얄궂은‘농악’

“한번 빠져들면 흥에 겨워서 희한하게도 손을 못 놓는 게 농악이라구. 집집마다 댕기면서 지신밟기 해 주고, 난장亂場이 서면 한바탕 신명나게 놀고 나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그 맛 때문에 여태꺼정 풍물 치고 살아 왔는지도 몰래요.” 평택시민문화회관에서 공연을 30여 분 앞두고 만난 김용래 보유자. 풍물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짧은 이야기에, 평택농악보존회원들이 농을 치며 한마디씩 거든다.

 

“풍물을 한번 시작하면 선생님은 밤이 새도록 끝낼 줄을 모르세요.”옷매무새를 서로 고쳐 주고, 장단을 맞춰 보는 등 부산스러운 대기실. 공연을 앞두고 긴장이 감돌만도 한데, 농악을 이끄는 김용래 보유자의 격려와 우스갯소리 덕에 늘 여유롭다.“우리가 신명나게 풍물을 치면서 한바탕 놀아야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날 것 아니겠어?”그는 보존회원들의 컨디션을 한껏 끌어 올린다.

 

두레굿과 전문 연희패의 기예가 조화를 이루다

‘웃다리농악’으로도 불리는 평택농악의 가락은 막힘이 없어 경쾌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가락 수는 많지 않지만 한가락 한가락의 변주가 매우 다양하고, 같은 가락이라도 연주 속도가 빠른 편이다.

 

 

빠르고 힘 있는 가락에 맞추어 펼쳐지는 다양한 진풀이도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경기도나 충청도에는 남사당 놀이패처럼 전문 연희패가 발달했었어요. 마을에서 활동하던 두레패보다 기량이 월등히 좋았죠. 말하자면 두레패에서 하던 농악에 전문 연희패가 하던 방식이 잘 섞여서 지금의 웃다리농악이 된 거죠.”오늘날 평택농악에 다양한 무동놀이와 버나돌리기와 같은 묘기가 특화된 것도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농사와 관련된 마을 두레농악의 대동적 신명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경기·충청지역을 넘나들던 전문 연희패의 연희 전통이 조화를 이룬 웃다리농악. 이 지역 농악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덕에 평택농악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1985. 12. 1)되었다.


웃다리 지역이 낳은 평택농악의 걸출한 명인名人들

‘농악’이라는 용어가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평택에서도 정초에는 지신밟기, 농사철에 두레굿, 기금 마련을 위해 쳤던 걸립굿, 사월 초파일의 등대굿 등 시기와 기능에 따라 다른 이름들로 불려졌다.“농악이란 말은 원래 사용하지 않았어요. 다른 지역을 보더라도 매구, 풍물, 걸궁이라고 했지.”일제 강점기 말에 이르러 농악은 유기공출鍮器供出등으로 인해 덩달아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광복 이후에는 전문 연희패들에 의해 활성화되는가 싶더니 이내 근대화·산업화로 다시 시들해져 갔다.
이런 역사 속에서도 웃다리 지역이 낳은 걸출한 명인들 덕에 평택농악은 명맥을 되살릴 수 있었다.“작고하신 최은창, 이돌천 선생님은 두레농악도 하시고, 경기도·충청 지역을 다니면서 전문적인 연희패로도 이름을 날렸지요. 평택농악의 바탕을 닦으신 분들입니다.”


오늘날 평택농악을 이끌고 있는 김용래 보유자의 이야기를 청하자“나야 만날 놀기만 했지요 뭐.”라며 멋쩍은 웃음을 보인다. 하지만 13세 때 이미 천안 용곡동 마을 두레패에서 무동을 탔고, 이후로도 송순갑, 안성의 남운형 행중에서 무동으로 활동하였던 그다. 오늘날 평택농악의 백미인 다양한 무동놀이가 온전하게 전승될 수 있었던 것도 탄탄한 경험을 바탕으로 펼치는 전수교육 덕분이다. 다양한 세대와 한솥밥을 먹으며 화합으로 보존회를 다져온 저력도 60여 년간 풍물과 함께 해 온 보유자의 이끼 낀 세월 속에서 솟아나고 있다.

 

어린이와 젊은 층의 참여는 평택농악의 희망

평택시 평궁리에 자리한 평택농악전수교육관에서는 전통을 잇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농악에 비해 유독 어린이의 참여가 많아,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활동이 활발하다. 아직 부모님 품에 안겨 있을 나이니 만큼, 많이 서툴지만 신통하게도 아이들은 농악의 감을 몸으로 익히고 그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아이들이 엄청시리 잘해요. 무동을 배우는 아이들도 기본적으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니까, 연주도 배우고 또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을 배우죠.”아이들의 서툰 가락과 몸짓이 보유자에게는 오히려 격려와 응원이 된다. 아이들이 우리 것을 알면서 자라야 한다는 생각에, 농악에 관심을 가지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어린 시절부터 국내·외를 넘나들며 경험을 쌓아가는 평택농악의 어린 회원들. 이들은 금속과 가죽이 만들어 낸 꾸밈없는 화합의 소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수없이 봐 왔다. 농악의 열린공간에서는 누구나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현장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이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자연스레 움트게 된다. 김용래 보유자를 비롯한 평택농악보존회원들이 어린 전승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앞 세대와 뒤를 이을 차세대가 함께, 재미와 힘든 연습으로 기량과 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이것이 김용래 보유자가 평택농악에 대해 가지는 자랑이고 꿈이다.“농악은 이제 놀이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굉장히 빠르게 배우고 공연예술로 이끌어 갈 줄 알기 때문에 든든하죠.”
날로 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간의 고생은‘보람’ 이라는 단어로 금세 대체된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김용래 보유자. 그의 미소에서 탄탄한 전승력을 지닌 평택농악의 미래가 뚜렷하게 그려진다.

 

글·황경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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