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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法古創新의 고도古都 교토 (옮겨온 글)2011.04.25.문화재청

왕토끼 (秋岩) 2011. 4. 25. 22:21

제목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고도古都 교토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4-15 조회수 118

 

역사가 만든 교토

교토에는 고색창연한 궁궐이나 사사寺社(사찰과 신사) 즐비하다. 그렇지만 현재 교토에 남아 있는 6백여 개의 사원과 4백여 개의 신사 헤이안 시대(8~12세기) 지어진 건물은 거의 없다. 교토는 15세기 중엽 오닌의 난仁の과 분메이의 난文明の을 비롯한 수차례의 내란, 18~19세기 3번의 대화재 등으로 인해 도시의 태반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헤이안 시대는 커녕 가마쿠라 시대(1214세기) 무로마치 시대(14세기∼16세기) 건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러 점을 밝히는 것은 교토의 위상을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라, 교토가 굽이치는 역사의 물줄기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속살과 거죽을 바꿔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교토에서는 헤이안 시대의 침전부지 위에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시대의 무가저택武家邸宅이, 나아가서 에도시대와 현대의 상가 또는 빌딩이 세워졌다. 교토는 역사와 더불어 유적 위에 유적이 겹쳐가며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으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수십만의 인구가 오랜 세월 동안 한곳에서 삶을 영위하다 보면 위에 역사의 흔적이 쌓이고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늘날의 교토는 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를 보고 헤인안쿄를 자꾸 연상하는 것은 바둑판 모양의 거리가 헤이안쿄의 구획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가로야말로 교토에 남은 헤이안쿄의 흔적이라고 있다. 헤이안쿄는 당의 장안과 북위의 낙양, 신라의 경주, 발해의 동경성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물론 고대 일본의 역대 수도인 후지와라쿄, 헤이죠쿄, 나가오카쿄 등도 참고했다. 따라서 헤이안쿄는 일본 고대 궁도宮都의 완성된 모습이라고 있다.

 

 

 

헤이안쿄의 구조

헤이안쿄는 사신에 조응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현무는 후나오카야마, 청룡은 가모가와, 백호는 가츠라가와, 주작은 오구라이케이다. 후나오카야마()에서 오구라이케() 관통하는 주작대로는 수도의 중심이었다. 길의 폭은 85미터나 되었다. 헤이안쿄는 동서 4.5킬로미터, 남북 5.2킬로미터로써 15 명이 거주할 있었다. 주작대로의 북부 중앙에는 천황이 거주하는 헤이안궁이 자리 잡았는데, 이곳이 정치의 중심지였다. 주변에는 귀족, 관원, 병사가 근무하는 관청 거리가 조성되었다. 헤이안궁의 바로 남측에는 51미터 넓이의 이조대로가 동서를 가로질렀다. 헤이안쿄는 ‘대로’라 불리는 30~36미터의 도로와 ‘소로’라 불리는 12미터의 도로가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내를 구획하고 있었다.

 

헤이안쿄가 정치도시의 특성을 보여주는 시설로는 나성문, 동사, 서사, 동홍려관, 서홍려관, 동시, 서시, 제사주정 등을 있다. 나성문은 주작대로의 남단에 위치하여 헤이안쿄의 입구 역할을 했다. 위에는 도바츠비사몬텐이 안치되어 헤이안쿄를 지키는 심벌이 되었다. 나성문은 수도의 내외를 나누는 현관인데, 중국식 누각으로 정면 9간의 이층 건물로서 출입구가 3 있었다. 문의 좌우에 나성을 쌓았다. 고대 중국의 성곽도시는 도시 전체를 나성으로 둘러쌌지만 헤이안쿄는 정문의 좌우에만 나성을 쌓았다. 나성문은 980년에 폭풍우로 붕괴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헤이안쿄는 한때 ‘수양버들과 벚꽃이 뒤섞여 수도가 꽃비단과 같구나!’라고 읊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10세기 중반부터 헤이안쿄는 우경이 도시로서의 모습을 상실했다. 본래 축축하고 윤기 있는 땅이었던 우경은 전원지대로 되돌아가 인구가 감소한 반면 좌경에 인구가 밀집했다. 그리고 좌경에 면한 가모가와의 동쪽과 북쪽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헤인안쿄에서 교토로의 변모

헤이안쿄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교토’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덴노의 조정이 약화되고 무사가 정권을 잡자 교토는 통치하는 수도에서 통치당하는 수도로 바뀌었다. 무사정권의 거점이 가모가와 동부에 시가지가 출현함에 따라 히가시야마 일대에 새로운 도시경관이 형성되었다. 히가시야마, 기타야마, 니시야마의 산록에 많은 사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교토는 불교진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동사와 서사밖에 없던 교토에 도시민이 시주하고 참배하는 민간 사원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교토는 종교와 문화의 중심으로서 새로운 경관을 갖게 되었다.

 

중세 교토 도시민의 생활은 활발했다. 고대에 국영산업에 종사하였던 다수의 상공인들은 헤이안쿄의 운영체제가 붕괴하자 스스로 독립하여 공동조합을 결성하고 영업권익을 지켰다. 경제의 활성화는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도시민의 축제인 기온마츠리祇園祭り를 탄생시켰다. 중세에 교토는 일본 최대의 상공업도시로서 성장했다.

 

그러나 교토는 15세기 중반 10 년에 걸친 오닌과 분메이의 내란을 겪으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교토를 복구하는데 25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지는 못했다. 교토는 둘로 갈라져서 상경과 하경 사이에 2킬로미터에 걸친 전원지대가 생겨났다. 마치 쌍둥이 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 같은 도시경관은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교토사람들은 활력을 되찾기 위해 기온마츠리를 활성화하는 안간힘을 쏟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교토를 완전히 개조했다. 그는 상경과 하경의 공백을 없애고 하나로 통합하는 대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도시 주변을 토담으로 둘러쌌다. 그는 도시를 동서남북으로 구획하고, 시내와 교외를 낙중과 낙외로 구분했다. 중심부에 어소를 재건하고, 어소 옆에 자신의 거처로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쥬라쿠다이聚樂第(존립, 1587~1595) 신축했다. 그는 강권을 휘둘러 흩어져 있던 사원을 지역에 모아 유사시에는 방어선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트린 도쿠가와 정권은 정치의 중심지를 에도에 두었다. 권력의 중심을 간사이에서 간토로 옮긴 것이다. 그는 대각선으로 어소를 바라보는 곳에 웅장한 이조성二城(1603) 축조하여 자신의 거처 일본 국왕의 감시초소로 삼았다. 도쿠가와는 사원의 부흥을 원호했다. 그리하여 교토는 종교와 문화도시로서의 면목을 회복했다. 오늘날 교토의 모습은 상당 부분 에도 시대(1600~1867)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권력의 중추부는 에도에 있었지만 문화, 종교, 경제의 중심지는 교토였다. 교토는 메이지유신의 와중인 1860년대 말을 전후하여 정치의 중심지로 잠깐 부상했다. 그렇지만 1869 교토 시민의 항의시위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왕이 수도 도쿄로 옮겨가고 귀족과 세력가들도 교토를 등짐으로써 정치무대에서 빛을 잃었다.

 

 

첨단을 창조하는 교토의 저력  

교토 시민들은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히가시야마를 뚫어 운하를 만들고 비와코琵琶湖의 물을 끌어들여 발전소를 건설했다. 덕택으로 수운이 발전하고 전차가 달려 도시는 급속히 근대문명을 갖췄다. 니시진 등의 전통산업에서도 기술혁신이 일어나 경제에도 활기가 넘쳤다. 미국은 2 세계대전 말기에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폭격을 자제하여 교토는 ‘숨 쉬는 박물관’으로서 살아남았다.

 

오늘날 교토에는 2천여 개의 사원과 신사, 3곳의 궁궐과 궁원, 수십 개의 정원과 박물관이 있다. 다도, 화도, 광언, 경무 역사와 전통이 만들어낸 예능과 예술이 살아 있다. 기온마츠리와 지다이마츠리 수많은 제사와 축제는 문화관광이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교토는 1,200 년에 걸쳐 다양한 기능과 기술을 발전시켜 인간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물품을 만들어왔다. 세대를 넘어 세대로 진화하는 교토의 공예품에는 일본인의 우수성과 자부심이 녹아들어 있다.

 

교토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사람이나 배출했다.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젊은 과학자는 교토에 있는 시마즈 제작소의 사원이었다. 세계 게임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닌텐도는 교토에서 전자오락실을 운영한 작은 구멍가게였다. 그리고 세라믹이라는 신소재 물질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교세라京セラ라는 기업도 교토에 자리 잡고 있다. 인구 150 명에 불과한 교토가 어떻게 이렇게 세계 최첨단의 학문과 산업을 보유할 있을까? 답은 옛것을 우려내 새것을 창조하는 노하우,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시대변화에 맞게 변형시키고 발전시켜가는 이노베이션에 있다. ‘법고창신’이야말로 교토의 역사 자체이고 상징인 것이다.

 

글ㅣ사진 ㆍ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사진 ㆍ두피디아 포토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