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태고太古의 그릇, 질그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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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문화재청 | ||
작성일 | 2011-01-19 | 조회수 | 116 |
자연의 노래, 질그릇
인류의 역사는 그릇의 문화사이자 그 변천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재질과 어떤 형태의 그릇을 사용하였는가 하는 점은 특정 시대를 가늠하는 주요한 기준이 된다. 그릇 중에서 가장 흔하고 또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질그릇이다. 고고학에서 질그릇의 역사는 대략 8,000여년으로 잡는다. 우리의 경우 가장 오래된 질그릇은 빗살무늬토기이다. 이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그렇지만 그 질그릇이 신석기 시대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현재에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주요한 용도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면 질그릇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질그릇이라고 하면 질로 만든 그릇을 뜻하며, 이때의 질은 흙을 가리킨다. 따라서 흙을 이용해 만든 그릇은 모두 질그릇이 될 수 있다. 한자말 토기土器의 순우리말이 질그릇인 셈이다. 흙으로 만들었으니 흙그릇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질그릇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의 도자기도 원래 재료는 흙이기에 넓은 범주에서 질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나 사기 등을 질그릇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 오늘날 된장을 담그고 김치를 담그는 겉면이 반들거리는 옹기甕器는 어떨까. 옹기甕器의 옹甕은 원래 큰 독을 일컫는 것으로 독처럼 큰 그릇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잿물을 이용해 시유施釉를 한 질그릇 모두를 일컫는 말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질그릇의 의미도 변화하였는데 옹기와 구별하여 시유를 하지 않은 순 흙으로만 구워서 만든 그릇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질그릇이라는 말에서 질의 의미는 흙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쩌면 바탕이 된다는 의미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결국 질그릇이라는 용어는 현대로 올수록 점점 더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찰흙이라고 하는 점토를 이용해 빚은 그릇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겠다. 시유를 한 옹기들도 그 바탕은 동일한 흙이기 때문이다.
질그릇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시대에 따라, 토질에 따라, 그리고 불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 등에 따라 천차만별의 그릇들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흙과 물과 불을 이용해 만든 그릇이지만 그 양상은 매우 다르다. 빗살무늬토기의 경우 토기를 굽는 소성온도는 낮게는 600℃ 전후, 높게는 대략 700℃인 것으로 분석한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 된장과 김치를 담그는 옹기류들은 화도가 대단히 높다. 대략 1,200℃ 전후가 된다. 1,200℃ 즈음이면 흙이 녹는 온도이다. 흙이 녹을 정도의 온도에서 질그릇이 소성되기 때문에 그릇의 질 또한 많이 다르다. 1,000℃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소성된 질그릇은 연질軟質이고, 그 이상에서 소성된 것은 경질硬質이 된다. 연질의 토기는 눈으로 보기에도 푸석하고 거칠며 깨어지기도 쉽다. 하지만 경질의 토기는 단단하고 두드려보면 쇠소리가 날 정도로 그 소리가 맑다. 경질의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원삼국시대 즈음이 된다. 이후 연질과 경질의 질그릇이 각각의 용도에 맞게 혹은 경제적 수준에 따라 실생활에 다용도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소성온도가 1,000℃ 이하인 연질의 질그릇은 오랜 옛날의 역사적 유물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경질의 좋은 토기들이 만들어지면서 연질의 다소 질이 떨어지는 질그릇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결과이다. 그렇지만 실제 삶의 현장들을 살펴보면 최근까지 연질의 질그릇이 우리의 실생활에 많이 이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상북도 북부 산간지역의 경우 흔히들 ‘꺼매기’라고 부르는 다양한 연질의 질그릇들이 많이 남아있다. 실제로 ‘꺼매기’를 사용하였던 소비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제작 판매하였던 장인들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꺼매기’란 검은 빛깔을 띤 옹기라는 의미의 지역 토속어이다. 이 ‘꺼매기’는 소성온도가 800℃ 전후인 것으로 검은 빛깔은 소성의 마지막 단계에서 소나무로 연기를 내어 흡착시킨 결과이다. 이러한 ‘꺼매기’의 용도는 매우 다양한데, 특히 떡을 찌는 시루의 경우, 옹기로 만든 것보다는 ‘꺼매기’ 시루를 훨씬 질이 높은 것으로 친다. 잿물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꺼매기’는 흡습성이 강해 떡이 식는 과정에서 물기가 생기지 않아 떡이 쉽게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물을 긷는 물동이, 오줌이나 인분을 퍼다가 들에 옮기는 장군, 술이나 감주 등 마실꺼리를 담아 이동하기에 편리한 두루미, 곡식을 보관하는 쌀단지 등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간혹 딸을 시집보내는 집에서는 농을 대신하는 혼수품으로 옷단지를 특별히 주문하는 예도 있었는데, 그 때는 용띠를 두르기도 했다. ‘꺼매기’는 특히 ‘숨을 잘 쉬어서(흡습성이 좋음)’ 옷을 보관하는 등의 건단지로 이용하기에 좋고, 쌀을 보관하면 쌀의 진기가 오래 유지되어 밥맛이 좋았다. 그리고 물동이나 장군 등을 만들었을 때는 가벼워서 이동에 편리하였다. 다만 견고성이 다소 떨어져 쉽게 깨어지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물동이에 물을 가득 길어서 오다가 밑이 빠지는 바람에 물벼락을 맞은 여인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꺼매기’를 굽던 가마(굴)는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생존하는 장인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학문적으로도 ‘꺼매기’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는데, 국내 연구자들보다는 오히려 외국인의 눈에 관심을 끌었던지 경기도 부천지역에서 화분을 굽던 가마 사진 하나가 로버트 세이어즈(Robert Sayers)의 『한국의 옹기 장인(The Korean onggi Potter)』(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Washington, D.C., 1987)에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 가마를 ‘윤기가 없는 화분을 굽는 벌집형 가마(beehive-shaped kiln for firing unglazed flowerpots)’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제 장인들의 제보를 들어보면, 작은 왕릉과 비슷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로버트 세이어즈가 소개한 내용과 흡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의 삶 속에서 생동하는 그릇
경질의 토기가 질그릇의 중심을 이루면서 그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소성온도 즉, 화도를 높여 질이 좋은 토기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잿물 유약을 사용하여 거친 표면을 매끈하게 함과 동시에 물이 샐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개 옹기로 지칭되는데, 나무를 때는 전통가마에서는 소성온도를 가마 전체 모두 동일하게 높이기가 쉽지 않다. 1,000℃가 넘으면 가마 안의 옹기는 녹기 시작하는데, 화도를 1,200℃ 이상으로 높이면 쟁여놓은 옹기가 불에 견디지 못하고 녹아 무너져 내린다. 따라서 1,200℃를 전후한 소성온도를 최고로 하는 불조정이 관건이 된다. 그래서 장인들은 일정온도까지는 전체적으로 가마에 불을 때고 그 다음부터는 특정 부위에만 불을 때어 그 위험성을 줄여나갔다. 그 방법이 바로 ‘창불 때기’이다. 가마 벽 양쪽으로 창구멍을 내어 막아두었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이곳으로 불을 때어 순간 화도를 높여 옹기를 소성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창불 때기’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온도에서도 쉽게 녹지 않은 흙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하고, 불 때기가 용이하면서 옹기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가마의 형태를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좋은 흙을 찾아서 아예 삶터를 옮겨 다니기도 하고, 긴 하나의 통으로 이루었던 형태인 속칭 ‘대포가마’는 방을 여러 개로 나눈 ‘칸가마’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좋은 토기만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질의 흙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생옹기를 빚고 말리는 과정은 물론이고, 옹기가 만들어지는 마지막 단계인 소성단계에서 불 조정을 어떻게 하였는가에 따라 최종 완성도는 차이가 많이 났다.
이렇게 만든 질그릇은 삶의 여러 국면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그것은 빈부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었다. 물 긷기, 김치 담그기, 장 담그기, 쌀 담기, 술 빚기 등등 식생활은 물론이고, 옷을 보관하던 옷단지, 불을 담던 화로, 변소의 변기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질그릇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플라스틱을 비롯한 대체용기들에 밀려 그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동네에 큰일이 있으면 이웃 간에 감주나 술을 빚어 부조하였던 ‘부조단지’는 돈 부조로 바뀌면서 사라졌고, 신부가 신행 때 가마에서 내려 가장 먼저 마셨던 ‘감주 두루미’ 역시 전통혼례가 사라지면서 이제 그 기억마저 아득해졌다. 하지만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이다. 참살이가 되살아나면서 질그릇의 가치가 새로이 부각되고 있다. 이 렇듯 질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삶과 문화의 원초적 바탕을 이루는 그릇이기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글 / 사진 김재호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사진 / 연합콘텐츠, 엔사이버 포토박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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