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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와 창가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의 애국가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1. 31. 20:09

 

 

 

새로운 전통의 시작

 

우리 역사의 가장 큰 전환기를 꼽으라면 19세기 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새로운 역사와 함께 새로운 음악인 서양음악이 유입이 되었고, ‘양악洋樂’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전통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음악 문화는 크게 ‘국악’과 ‘양악’으로 이원화되기 시작하였다. 

 

‘국악’은 오랜 세월을 거처 전승되어 온 우리의 전통음악 및 그 어법을 계승•발전시킨 음악을 가리키며, ‘양악’은 이문화異文化의 하나인 서양의 음악문화가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우리의 문화과정에 통합•정착된 음악을 의미한다. 즉, 한국의 근대음악사는 근대화와 서구화라는 원심력과, 정체성 찾기라는 구심력 그리고 서양음악과의 접촉과 영향 등으로 말미암아 국악과 양악이라는 이분화 된 대립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형성 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대립과 갈등의 구조는 자극적인 요소로서 기능을 하여, 때에 따라서는 문화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생산성을 향상시켜 주기도 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융화가 되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장르의 음악문화를 창출시켜 주었다.

 

아무튼 근대라는 새로운 역사는 ‘양악’이라는 근대식 음악 문화를 낳게 하였고, 더불어 새로운 장르의 노래와 함께 ‘다같이 신식 노래를 부른다’는 집단 가창의 문화를 낳게 하였다. 그럼 언제 어떤 장르의 노래들이 만들어졌고 시대마다 어떤 노래를 즐겨 불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찬송가와 창가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의  애국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라가 제물포 항구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 와 기독교의 전파의 함께 찬송가를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복음과 함께 찬송가를 전파하였다. 찬송가는 기독교 선교 수단으로 전해진 것이지만 새로운 음악에 대한 선율감과 리듬감을 체득케 하였고, 결과적으로 한국에 서양음악이 뿌리를 내리는데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최초의 서양음악은 선교사들이 전달한 찬송가였던 것이다.  찬송가에 이어서는 ‘창가唱歌’라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등장하였다. 창가란 ‘서양의 노래 또는 서양식의 악곡에다 계몽사상•애국사상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사를 붙인 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초기의 창가는 대부분 찬송가의 선율을 차용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면에서는 찬송가와 같지만, 가사는 세속적인 내용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찬송가로서가 아니라, ‘애국의 노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즉, 교회의 찬송가로부터 사회참여의 형식으로 등장하여, 세속적인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 이른바 한국에 있어서 ‘창가’라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며, 초기의 창가를 ‘애국가’ 또는 ‘애국계몽창가’라고도 불렀다. 그런 한편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서양음악이 필요하여 그것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근대국가로 탈바꿈을 한 대한제국은 1900년 서양식 신식 군악대인 ‘양악대’를 설치하였다. 양악대는 군사 •외교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주로 군 관계 행사와 궁중의 행사, 외교행사 등 국가에서 필요한 행사를 담당하였지만, 차츰 국민을 위한 공개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국민들 사이에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대한제국의 황실과 정부는, 근대국가의 표상이 되는 노래 즉, 황제 및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자주독립•부국강병•문명의 정신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키고, 또 노래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래인 국가國歌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애국가>이다. <대한제국애국가>는 1902년 대한제국의 정식 국가로 제정이 되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다가 910년에 금지가 되어 이 땅에서 더 이상 불러서는 안 될 노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불러서는 안 될 노래, 불러야만 했던 노래

 

우리나라의 근대음악 문화는 민족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하고도 암울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느 정도 그 틀이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일제는 음악을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반면 노래를 통하여 일제 식민 통치에 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 일제日帝라는 관官 주도적 성격을 띤, 이른바 불러서는 안 될 노래와 불러야만 했던 노래가 양산되었다. 

 

일제는, 애국가, 독립군가, 광복군가, 항일군가, 혁명가요와 같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노래는 철저히 금지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민족적 전통과 정신을 담은 노래,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 독립의 희망을 묘사하는 긍정적이고 밝은 분위기의 노래도 금지 시켰다. 이런 노래들은 몰래 부르거나 아니면 외국에서 부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금지곡은 아니지만 일본을 비판한다든지 식민 통치의 부당성을 알린다든지 하는 이른바 ‘불순한 집회’나 ‘불순한 의도’에서 부른 노래도 탄압을 받았다. 이들 노래 중 상당수는 금지가 된 채 잊혀진 노래가 되어 버렸지만, 그중 일부는 몰래 입과 입을 통하여 전달이 되다가 광복 후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반면 일본의 국가國歌인 <기미가요君が代>를 비롯하여, 일본의 국가적 기념일이나 황실의 경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노래인 의식창가儀式唱歌 그리고 전쟁을 예찬하는 군국가요軍國歌謠는 강제로 불러야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음악적 정서는 차츰 일본 근대 음악풍으로 물이 들었는데, 광복 후 일본의 음악은 대부분 청산되다시피 하였지만 그에 젖어 있던 일반인들의 음악적 정서가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잔재는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창작 동요와 창작가곡 그리고 대중가요의 탄

 

1920년대부터는 또 다른 새로운 장르의 노래가 탄생하였다.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이 되고 있는 창작 동요, 창작 가곡, 창작 대중가요가 탄생을 한 것이다. 창작 동요는, 일본 노래가 범람한 상황에서 “조선 어린이의 심성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정서를 함양시켜 주는 동시에 노래를 통해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혼을 심어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개척이 되었다. 그리고 창작 가곡은 시詩와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래라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며, 창작 대중가요는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는 노래라는 성격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탄생 및 개척이 되었고 또 애창이 되었는데, 우리의 근대 노래 안에는 일제라는 어두운 현실에서 조국 광복의 희망을 노래한 것도 있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노래한 것도 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노래한 것도 있고, 삼천리금수강산의 아름다움과 달과 별과 꽃을 노래한 것도 있고, 애국•애족•애민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노래도 있고, 부모님의 은혜를 노래한 것도 있고,고통을 함께하고 위로하는 노래도 있고,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것도 있고,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도 있다.  그리고 ‘비애감悲哀感’과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민족의 노래라는 차원에서 우리 민족의 시대적인 고통과 애환을 같이 해 왔다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글 / 사진 ㆍ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사진 / 연합콘텐츠, 엔사이버 포토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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