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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詩人과 본명 김영환(길상화) 이야기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1. 3. 20:35

'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다 간 시인이 있었지요.

스페인이나 필리핀 사람처럼 외모가 이국적이어서,

동료는 작업하는 그의 옆 모습을 보고 조각을 떠올렸다고 했지요.

토속의 시어를 가락처럼 뽑아내며, 때로는 돌아가는 은유로,

때로는 직유와 역설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향의 풍경을, 사랑의 감상을 노래한 시인이었습니다.

이 모던하고 감각적인 시인은 연애도 참 영화처럼 했네요.

스무 살 초반에 직장 동료 결혼식장에서,

난(蘭)이라는 여자를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그러나 그의 애끓는 연모를 저버리고,

그 여인은, 이미 파혼 상태인 시인의 동료와 결혼을 해버립니다.

시인은 사랑을 잃고, 친구를 잃고, 그렇게 좌절했겠지요.

백 기행이라는 본명을 가진,

그러나 우리에게는 백석(白石)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백석(1912-1995 사망 추정)

 

 

시인은 란을 사랑했지만, 그런 시인을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지요.

 그녀는 춤과 웃음을 파는 기녀였어요.

그녀 나이 스물 세 살, 시인의 나이 스물여섯에 둘은 만났습니다.

그녀의 눈에 당시 교사였던 시인은, 외국인처럼 키가 크고 허여멀쓱하게 잘 생겼지만,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처럼 허허하고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첫 만남에서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라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그것이 한 남자의 약속이 아닌,

 사랑에 버림받은 남자의 주정 섞인 절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여자는 자신을 자야(子夜)라고 부르는 이 시인과 3년간 동거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고, 강제로 자식을 다른 여자와 결혼 시켜버립니다.

시인은 여인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애원했지만, 여인은 시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미래를 막고 싶지 않은 그녀의 속 깊은 배려였을까요?

결국, 시인 혼자 떠난 만주행은, 6.25 전쟁과 함께 두 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맙니다.

그 후 여자는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최고급 요정을 열어

 제 3공화국 시절까지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로 사세를 확장합니다.

김영한이라는 본명을 가진, 그리고 이후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김영한(1916-1999)

 

 

지금 당대를 풍미했던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절이 되었습니다.

 김영한씨가 시가 1천억이 넘는 7천 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을 시주했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당시 ‘아깝지 않느냐’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지요.

“ 1천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  

시인의 생일이었던 7월 1일, 그 다음날은 스콜같은 비가 하루종일 내렸습니다.

비가 오면 떠나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를 생각하다가, 길상사를 생각해냈습니다.

 대학로에서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 곳, 그리고 소설같은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

원고지의 칸과 같이 일정할 수밖에 없는 하루 중,

반나절의 충동여행으로, 그것도 비의 감상지로 참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 역>에서 내려 한량한량 걸음으로도 다다를 수 있는 곳에 길상사가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유럽의 어느 마을을 닮은 성북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자들이 사는 곳이지요.

부자 중에서도 스스로 성골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높은 담을 치고 사는 그런 곳입니다.

그 성북동 골짜기 어느 길목에서 길상사는 그야말로 뜬금없이 나타납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한 눈에 가람의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길상사는

 마치 갓 시집온 새색시의 고운 자태처럼 단아했고,

 새색시의 하얀 버선처럼 정결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 절이라기보다는,

도량인 이곳은 성불로 가는 길목이며 기도의 장입니다.

 

 

모든 미완의 것들은 불완전함 속에서 미완의 미학을 완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정원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공간 연출 속에서

길상사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길상사 관세음보살님은 외모도 특이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씨가

 불모(佛母)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종교의 화합이 연상되는 예쁜 모습이지요?

 

길상사에서는 속(俗)과 선(仙), 욕(慾)과 극(克)의 경계를

성북동 부촌의 도로를 향하는 일주문 하나로 단순하게 가릅니다.

 미처 이루지 못했던 시인과 여인의 사랑도,

그래서 미완성이었던 사랑도 길상사 경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둥둥 떠다니며,

길상사를 채우는 서정이 됩니다.

 


대원각 당시 룸으로 쓰였던 곳이

 지금은 스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고 했던가요.

 


화장 후 모셔진 길상화 공덕비

 

극락전 주변으로는 백 년 이상의 나이를 가진 느티나무가 부처님을 수호하듯 서있지요.

마음 급한 이라면 30분을 휘둘러 볼 수 있는 사찰입니다.

그러나, 한 뼘의 공간에서도 자기의 우주를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얇은 시집하나 들고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국화꽃의 한 종류인 벌개미취가 경내에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비가 오는 날 길상사는 감상의 유배지로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길상사 경내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도랑이 있습니다.

이 도랑의 물은 성북천을 향해 아래로 흘러갑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제법 폭포의 위용도 갖추고 그 소리도 장엄합니다.

비가 오면 방문객도 적을 테니 조용해서 더 좋겠지요? 고요하다보니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빗소리, 물소리, 꽃잎 피고 지는 소리, 나뭇잎 사각대는 소리, 벌레의 바스락소리,

 햇살이 지는 소리, 지렁이 하품하는 소리, 그리고 이 시간 어느 곳에서

 내 사랑이 나를 그리워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나누는 기쁨’이라는 작은 찻집의 마당에 앉아 대추차 한 잔을 마시며

 극락전 앞 마당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지요.

앉아있기만 해도 묵상이 가능한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즐겁겠지요.

시장하다면 도서관 아래층 식당에서 공양을 할 수도 있겠지요.

 

 

 


도서관

 

이제 본격적으로 비가 많이 온다네요. 그런 날, 길상사 한번 다녀오십시오.

이왕이면, 백석의 시집 하나 들고 말이죠. 그곳에서,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어보는 것,

 매우 특별하지 않을까요? 시인이 사랑하는 여인과 살고 싶어한 산골의 마가리를,

 성북동 길상사로 생각하면서 말이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시인백석과 사랑을 이루진못한 김영한은 대원각이란 요정을 만들어 돈을 번후 마지막에  거대한 재산을  

법정스님에게 절을 만들어달라며 인계를했고  사람들은 1천억이 넘는 재산이 아깝지않느냐고 하자

사랑하는 백석의 시한줄만도 못하다는 말을하였다고합니다

 처음 인계받아 새로운 절로 만들어놓고 법정 스님은 훌훌 길상사를 떠났다는 이야기로

 더 유명해진 절이라고 합니다. 이런 좋은곳을 절로 만들어달라고 시주한분이나

절이 되자 떠난 법정스님이나 참으로 귀한 분들입니다. 

 

 

 

 


 

시인 백석의 러브 스토리/낭산 이기순

 

 


白石과 子夜, 그리고 吉祥寺
청와대 뒷길.... 왜 있잖아 ~ 삼청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길에서 삼청터널을 막 넘어가면 북악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와?규모에 놀라지....
이곳은?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다. 군사문화의 서슬이 시퍼렇던 6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이 최고급 요정이었다.

 

요정(料亭)
술과 음기(淫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을 섬기는 자리로 변한 것이 좀 의아하지만, 그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한다.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지 않던가 말이다.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김영한(佛名 吉詳花)이 죽기 전 법정 스님에게 기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寺刹)인 吉祥寺! 이 사찰의 이름은 그녀의 法名인 길상화(吉祥華)를 본 따서 길상사(吉祥寺)로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筆名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전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 있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넣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 원의 현금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기자가 물었대! 시주로 천억을 내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바!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랫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꺼야! 라고, - 이생진 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시인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 에서 -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우리에 삶은 그저 스처 가는 바람이라는 것 ~~~~~
그 김 여사 子夜는 吉祥寺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83세에 훌훌 서방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감옥으로 찾아 갔으나?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 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있기 간절히 바랐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고 한다.

 

 

白石(본명 백기행 1912∼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저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子夜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 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비평에서 출고 한 子夜의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 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詩쓰는 일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했다고 전한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 더 알려졌다.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자야.   김진향.  본명은 김영한 

 

 

가난한 탓에 몸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의 김영한.

우물가에서 빠래하는 사이에 남편은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수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미모와 시와 글, 글씨,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였다.

23살에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었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지만 만나지 못한다. 스승을 못 만났지만 대신 백석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인 백석은 첫 눈에 김영한에 반해 버린다.

 

`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것` 그러나 그런 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백석의 부모가 자신의 아들이 기생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버린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의 강제 결혼... 고민 끝에 결혼식날밤. 신혼방을 빠져 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함께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이런 신파조의 이야기처럼 그후 둘은 이승에서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해방이되자 백석은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고 할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다시 잇지 못하게 된것이다. 분단이 만들어낸 입렬은 50년이나 이어졌다.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 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김영한은 하루 동안은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한다. 1997년 2억원의 기금을 마련해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