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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9)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上 (옮겨옴)

왕토끼 (秋岩) 2011. 1. 6. 21:30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9)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上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경향신문 
 
ㆍ서슬퍼런 권력에 들이댄 비판의 날

도학자(道學者)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은 조선이 망해가던 무렵, 가장 투철하게 충의(忠義)의 유학정신을 발현하여 뛰어난 애국심으로 나라에 목숨을 바친 대표적 충신 중 한 사람이었다. 최익현이 순국한 4년 뒤에 나라는 끝내 망했지만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열혈의 애국심은 우리의 조국이 이어지는 한, 영원한 민족의 사표로 길이 추앙받기에 넉넉한 투혼이었다.

면암 유택의 안채(위)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친필인 ‘면암’(오른쪽 아래). 뒤에 최익현의 호가 되었다. | 사진작가 황헌만


최익현은 본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순조 33년인 1833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은 별처럼 빛났으며,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에 제비꼬리 같은 턱을 지녀서 어린이 때의 이름이 기남(奇男)이었다고 한다. 여섯 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면암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의 벽계리에 은거하며 당대의 도학자로 큰 명성을 날리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유교경전에 대한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소년이었지만 비범함을 알아차린 화서는 면암(勉菴)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기증했고, 그 ‘면암’은 평생 동안의 호가 되었다.

23세인 1855년은 철종 6년인데, 그해에 면암은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니 14세에서 23세에 이르는 10여 년간은 화서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 열중했던 수학기였다. 영특한 면암은 이때 이미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렀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여가에는 언제나 독서와 궁리(窮理)에 게으르지 않아 연령이 높아질수록 학문도 넓고 깊어졌다. 특히 도학자 화서의 학문과 인격에 깊은 존경심을 지녔던 면암은 ‘힘쓰는 사람’이라는 호를 잊지 않았고, 15세에 화서가 직접 글씨를 써서 내려준 ‘낙경민직(洛敬민直)’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토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송나라 때, ‘경(敬)’을 크게 강조한 정자(程子)의 사상과 ‘직(直)’을 주장한 주자의 사상을 지키며 살았다는 뜻이다.

‘탐적전말(耽謫顚末)’이라는 면암의 글을 읽어보면, 스승 화서의 영향이 면암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면암이 41세이던 1873년에 대원군의 정치관여를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리고 탄핵 받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때에 지은 것으로, 왜 자신이 그런 무서운 상소를 올릴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한 내용이다. ‘탐라도에 귀양 오게 된 전말’을 기록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면암은 23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스승 화서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자, 화서가 두 가지 교훈을 주셨다는 것이다. “첫째, 이제 포의에서 나라의 벼슬아치가 되었으니 운명이 바뀌었다. 순조롭게 벼슬하면 당연히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될 텐데, 책읽기에 부지런하여 뒷날 큰 벼슬살이의 밑거름이 되게 하라. 남의 유혹에 끌려 가볍게 논박하는 일은 절대로 삼가라. 둘째, 임금의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를 해야 할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냥 국록이나 타먹는 일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라는 교훈이었다고 한다. 면암은 일생 동안 화서의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몸소 행하고 실천했던 착실한 제자였음이 분명하다.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12세의 어린 임금 고종이 등극하자 천하의 권력은 모두 한때 파락호이던 대원군에게 넘어갔다. 대원군 10년의 권력 앞에 누가 감히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30세에 신창(충남 아산시)현감의 외직으로 나갔으나 충청감사의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벼슬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면암은 또 화서 선생을 찾아뵙고 “주자서를 읽은 사람의 기개를 지켰다”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34세에 언관(言官)의 지위인 지평(持平)이 되자 바로 6개 조항의 상소를 올리고, 36세에는 사헌부 장령이라는 중책을 맡자 바로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른바 ‘무진소(戊辰疏)’인데, 토목공사중지·수탈정책중지·당백전철폐·사문세(四門稅) 폐지를 주장하여 천하에 최익현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조야에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상소가 그것이니, 당상관인 돈령부도정이라는 정3품의 벼슬에 오른다. 이 상소 5년 뒤 1873년은 면암 41세이자 고종 10년, 대원군 집권 10년 차로, 조야에 원성이 자자하여 누군가가 한 차례 소리를 내야 할 때였다. 바로 면암은 불속으로 섶을 들고 들어가듯, 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로 대접이나 크게 받아야 할 처지인데 국정에 관여하여 나라가 어지럽기 그지없다면서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렸다.

마침내 화약고를 터트린 것이다. 22세에 이른 고종, 친정을 담당하기를 원하던 때와 맞물리고, 그것을 극히 바라던 민비가 학수고대하던 때여서 면암의 입장은 한편으로 위대했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6월에 상소가 올라가고 8월에 면암은 우부승지와 동부승지로 제수되었고, 바로 이어 재신의 지위인 호조참판에 올랐다. 물론 면암은 모두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에 임하지 않았으나, 끝내 대원군은 양주 땅으로 하야해 권력을 잃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해 11월8일 면암은 반대파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천륜(天倫)을 이간시켰다는 죄목으로 머나먼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정조 시절 영의정이던 채제공 이후, 남인은 몰락하여 대관(大官)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대원군의 집권으로 몇 사람의 남인 정승이 나오고 비교적 세력이 확대되던 때였는데, 면암의 상소와 이에 따른 대원군의 하야로 남인세력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아야 했다. 대원군 탄핵상소 직후 호조참판의 높은 지위까지 제수받자, 남인들은 면암은 ‘민노(閔奴)’, 즉 민비 측의 종이라는 악명으로 숱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이 문제는 면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22년 후배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준다.

‘매천야록’에 면암의 입장 해명

무섭게 역사적 필봉을 휘둘렀던 황현은 그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이 없었지만, 유독 면암에 대해서는 극히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05년은 면암이 73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망했다고 고관대작들은 물론 애국지사들이 경향에서 울분을 토하며 자결을 감행했다. 충정공 민영환, 정승 조병세, 판서 홍만식 등 저명한 고관들이 자결하자 황현은 그들을 애도하는 5애시(五哀詩)를 지었다. 두보의 8애시를 모방한 시로 자결한 세 분 이외에 살아 있는 최익현과, 이미 세상을 떠난 영재 이건창을 합한 다섯 분을 애도했다. 5명을 맞춰야 하는데, 세 분 이외에 죽은 이건창은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고, 면암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나라를 위해 죽을 사람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포함한다는 기막힌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면암에 대한 황현의 기대와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호조참판에 오른 3년 뒤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다섯 가지 내용을 상소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목을 베어달라는 무서운 기개의 상소였다.

매천 황현은 이 대목에서 고종과 민비 일파들이 주도한 병자조약에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린 사실로, ‘계유상소’가 민씨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말았다.

도끼 들고 상소(持斧上疏)

고려시대의 우탁(禹卓), 조선시대의 중봉 조헌(趙憲)이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서 죽여달라며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면암은 바로 이 두 분의 옛일을 본받아 자신도 죽음을 각오한 조약반대 상소를 올린다면서 광화문 앞에 꿇어앉았다. 대단한 기개다. 죽음을 각오한 면암은 관원들의 힘에 못 이겨 떼밀려 저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외딴 섬에서 4년, 그는 독서를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긴긴 세월을 보낸다. 자신을 하야시킨 면암, 대원군으로서는 무척 미운 사람이었지만,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는 곧은 기개에 탄복한 대원군은 면암의 유배가 풀리자 바로 자헌대부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로 면암을 위로했다. 물론 면암이 그런 벼슬에 응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국권은 점점 상실되고 뜻 있는 선비로서 차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세상의 변화가 계속되자, 면암은 연일 상소를 올리면서 옛 제도의 복원을 위한 보수적 논리를 거듭 폈다. 지금의 잣대로야 참으로 답답하고 보수적으로 평가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던 면암의 애국심이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단발령에 반대하여 “내 목은 잘라도 되지만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면서 의복이나 두발의 옛 제도 복원을 끝없이 주장했다. 의정부 찬정(贊政)이라는 고관이 내려도 전혀 응하지 않던 면암. 마침 새로운 도모를 위해 정든 고향땅 포천의 가채리를 떠나 온 가족을 이끌고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속칭 장구동)라는 마을로 이사한다. 68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호서와 호남의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붙들 어떤 계책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곳에 안채와 사랑채인 ‘구동정사(龜洞精舍)’를 짓고 팔도의 선비들이 모여앉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며 나라 지킬 큰 계획을 세우면서 날을 보냈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