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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팥죽 할아버지_최현숙

왕토끼 (秋岩) 2011. 1. 3. 16:05

팥죽 할아버지

 

최현숙

 

 강릉 중앙시장 먹자골목은 정겹다. 좁은 통로 길을 마주하고 감자전, 메밀전, 녹두전, 찐방, 김밥, 각종 반찬 등을 파는 사람과 또 그 먹거리를 사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그늘막이 드리워진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각 점포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군침을 돌게 했다. 팥죽은 가끔씩 몸에 기력이 없어 소화력이 떨어졌을 때 동짓날 팥죽을 못해 먹을 때 사먹기도 하는 음식이다. 뜨거운 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팥죽을 보니 점심때도 되었고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팥죽 파는 점포 앞 의자에 앉아 팥죽을 주문했다.

  "팥죽 한 그 릇 주세요. 얼마예요?"

  "이만 냥이요."

  "어머나, 그렇게 싸게 받아서 남는 게 있어요>"

  "새댁 같은 사람한테는 한 삼만 냥 받아야하는데.... 그래도 손님들이 찾아와 주시니 고맙지요."

 팥죽 한 그릇에 이천 원을 받으면서도 만족해하시는 아주머니의 소박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팥죽 한 그릇과 푹 익은 무채김치를 상에 놓고 먹으려는데 또 나이 드신 아주머니 두 분이 내 오른쪽 옆에 앉았다.

  "팥죽 두 그릇 주우야. 옹심이 좀 많이 넣어줘요!"

   "물가가 올라서 달라는 대로 다 못 드래요."

  "그래도 난 옹심이를 좋아하니 마이 줘야돼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뜨거운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팥죽가게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분이 있어 쳐다보았다.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 이쪽으로 앉으세요."

 작은 키에 선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햇볕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좀 있다 먹을게요."

 하시며 할아버지는 골목 안으로 잠시 사라지셨다. 팥죽가게 아주머니는 묻지도 않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저 할아버지 참 불쌍해요. 서울에 딸이 있는데 사위하고 찾아 왔드래. 아버지 혼자 계시니 외롭고 밥해 드시기도 함들 텐데 서울로 갑시다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집을 팔아 가지고 서울로 간거야. 근데 딸하고 얼마 못살고 내려오셨대. 생각했던 것 멘치로 딸하고 사는 게 편치 않으셨던 거지. 지금은 딸하고 연락도 안 되고 찾아오지도 않고 어디 사는지도 모른대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도 옆에서 팥죽을 드시던 아주머니들도 안타까운 마음에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사실까? 궁금해졌다.

  "할아버지는 월세 15만원짜리 여인숙에서 혼자 생활 하신대. 매일 12시만 되면 우리 집으로 와. 아침 겸 점심 겸 팥죽 한 그릇을 드시지. 그리고 저녁 때 또 와서 한 그릇 드시지. 하루 두 끼밖에 못 드신대. 낮에는 폐지 같은 거 주워다 팔면서 사신대."

 할아버지의 형편을 들으니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이 내 일처럼 마음이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돌아 오셨다.

  "팥죽 드려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보다 천냥은 더 받아야 되는데...."

 하시며 팥죽 파는 아주머니는 뜨거운 팥죽 그릇에 설탕 한 국자를 추가로 더 넣어주셨다. 할아버지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숟가락을 휘휘저어 설탕을 녹여서 팥죽을 드셨다. 

 "아이쿠 할아버지, 단팥죽을 만들어 드시네. 안 달아요?"

 하며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할아버지는 '네'하고 간단히 대답하실 뿐 아무 말없이 팥죽 그릇에 바닥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알뜰히 팥죽을 드셨다. 묵묵히 팥죽을 드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잠시 동안 할아버지의 삶이 가시고기 같다고 혼자 상상해 보았다.

 새끼 가시고기는 아비의 살을 파먹고 성장한다. 죽어서까지 자신의 몸을 새끼의 먹이로 주는 것이 가시고기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식에게서 받은 학대와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먹고 살기 힘들어하는 자식들 발목 잡지 않으려고.... 노년의 쓸쓸함과 적막감을 혼자 끌어안고 사시는 모습 말이다.

 할아버지의 팥죽에 담긴 설탕 한 국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 설탕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담긴 아주머니의 마음과 고단한 삶을 달콤한 설탕으로 녹이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노년의 삶은 가까운 자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왜나하면 자신이 늙어 가는 모습을 거울을 보며 확인해야하는 서글픔과 자식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느끼는 쓸쓸함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팥죽을 사 드시던 할아버지는 자식과 소통하지 못하고 외로움 때문에 얼마나 쓸쓸하실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프다.

 오늘도 할아버지는 팥죽을 사 드시러 오셨을까? 울퉁불퉁 힘줄이 다 드러나 보이는 주름진 손으로 팥죽을 드시던 할아버지의 거친 손이 잊혀 지지 않는다. 자식에게 버림 받았다는 절망감과 가난 때문에 할아버지의 삶이 더 이상 황폐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릉문학> 18집> 중에서

 

  

 

출처 : 박종국 수필가의 일상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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