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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0)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下 (옮겨옴)

왕토끼 (秋岩) 2011. 1. 6. 21:40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0)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下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경향신문
 
ㆍ“쌀 한톨 물 한모금도 왜놈 것은 먹을 수 없다”

대마도에서 숨을 거두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절대로 조약의 체결은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조약을 체결하려면 우선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던 놀라운 기개. 그런 무서운 의인도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1902년 70세의 노인에게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고위 직책을 내렸으나 면암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하였고, 의정부 찬정도 거절했다. 권력이 면암을 회유하려고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했으나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는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구동정사. <사진작가 황헌만>


마침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조인되고 경향에서 여러 계층의 애국자들이 자결을 택했다. 면암은 그냥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나라를 건지기 위해 싸우다가 죽자는 뜻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때를 기다렸다. ‘구동정사’에 모여든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몇 차례 다짐하고, 제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투쟁정신이 강하고 의병의 전통이 뚜렷한 호남으로 거사 장소를 정하고 남으로 내려왔다. 1906년 2월, 마침내 집안의 사당에 절하며 선조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논산의 노성면 ‘권리사’(공자 사당)에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 대집회를 열고 4개 조항의 격문을 짓고 8도의 국민에게 거의를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일로 남행, 모든 선비들과 함께 정읍시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최익현의 선조 고운 최치원의 사당)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왜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가의 이유를 밝히는 창의소(倡義疏)를 올리고 일본 정부가 의리를 배반한 16개 조항의 편지를 보내 일본의 잘못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조선민족으로서의 높은 기개를 보이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성토하는 빈틈없는 논리가 그 편지에 상세하다. 의병들을 모으며 순창으로 이동했지만 황제의 선유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74세의 고령인 면암은 끝내 체포되는 신세가 되어 일본 헌병의 이송으로 저 일본 땅, 대마도의 감옥에 갇히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74세의 고령 의병장

젊어서야 혈기로라도 의를 위해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는 어떤 장사도 기력이 쇠하여 혈기의 용기를 부리기 어렵다. 그러나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의 ‘기남(奇男)’이라는 면암은 예의 사람과는 달랐다. 노쇠한 몸에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74세의 노구로 총을 든 무서운 왜병 앞에 맨주먹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성충사’라는 영당에 부릅뜬 눈으로 천하를 노려보는 면암의 영정을 보면서 섬뜩한 무서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화서 이항로에게 배운 ‘경(敬)’과 ‘직(直)’이 힘을 발휘해 주었고 ‘춘추대의’라는 전통적 유학정신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는 힘을 솟아나게 하였으리라.

대마도의 엄원 위수령 경비대에 수감된 면암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어서 일본 헌병들도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노인 의병장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인들 왜놈의 것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했다. 정신은 살았어도 허약한 육체가 견딜 수 없어 끝내 11월17일 해가 뜰 무렵에 눈을 감아 나라를 위해 순국하는 거룩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채산사(채山祠)와 모덕사(慕德祠)

충남 예산군 관음리의 면암 최익현 묘소. 몸은 묻혔으나 혼은 살아 지금도 일본을 꾸짖고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황헌만>

경기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嘉채里)는 면암의 태생지이자 한평생을 근거지로 살아갔던 고향 마을이다. 채계(채溪), 채산(채山)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으니 면암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마을이다. 화서 이항로의 문하를 출입하던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린석, 용서 유기일 등 당대의 학자들이 출입하던 마을이요, 한말 위정척사파의 큰 의혼이 배태되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68세에 그곳을 떠나 충청도 청양의 장구동으로 이사했기에, 우리가 찾은 가채리에는 초라하게 ‘채산사’라는 면암의 영정을 모신 영당 하나가 서 있었다. 그곳은 필자의 증조부 민재 박임상(敏齋 朴淋相:1864~1944)공이 33세의 한창 나이에 64세의 노학자 면암을 찾아뵈었던 곳이다. 1896년 갑오경장, 갑오동학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전라도 무안에서 명성 높은 스승의 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괴나리 봇짐을 지고 찾아갔던 곳이다. 110년이 넘은 지난해, 우리 일행이 찾은 채산사는 너무나 외로웠다. 면암이 1897년 음력 8월이라는 날짜가 명기된 친필로 필자의 증조부에게 내린 증서(贈書) 한 통은 그때의 세태와 면암의 높은 뜻을 지금도 읽게 해준다.

그러나 68세에서 74세, 6년의 세월을 살다가 집안 사당을 고별할 때까지 살았던 청양군 장구동의 ‘모덕사’는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거처했던 유택과 사랑채인 ‘구동정사’, 영정을 모신 ‘성충사’, 위패를 모신 ‘모덕사’, 장서각인 ‘춘추각’, 유물을 온전하게 보관한 ‘대의관’이라는 유물관이 덩실하게 서있는 데다 청양군청에서 공무원이 파견되어 관리하는 관리사까지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은 그런 대로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경내에서 가까운 뜨락 앞에 커다란 저수지까지 축조되어 경관도 더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그만한 의인, 그만한 학자, 그만한 충신의 사당과 유택이 이 정도로는 관리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필자는 구동정사, 즉 면암이 거처하며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사랑채 마루에 앉아 온갖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가 된 민재공이 1900년 68세의 면암선생을 모시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이 강론할 때에 함께 참석했던 기록이 있어서다. 그 뒤 논산 노성의 궐리사의 대집회에도 민재공은 동참했으니, 108년 전의 증조할아버지가 앉아계셨던 곳에 증손자인 필자가 앉아 있는 감회는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면암이 세상을 뜬 뒤,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제문을 바치러 민재공은 먼 길을 찾아와 유림장(儒林葬)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제문도 문집에 온전하게 실려 있다.

모덕사의 제향 때에는 필자의 조부나 선인께서도 참석했지만, 지금 살아계신 사백(舍伯)께서도 가끔 참석했으니 우리 집안과 모덕사의 관계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4대 째의 끈끈한 인연이다. 그러나 각설하자.


최충신(崔忠臣)은 순국 후에 더 빛나다


어려서 책을 끼고 화서(華西)의 문을 두드렸고

총명한 열다섯에 벽계(蘗溪를 물러날 제

스승이 면암(勉菴) 두 자를 크게 써서 주니라



잃었던 그 나라를 도로 찾은 오늘이외다

이제는 웃으옵소서 님의 뜻을 이뤘소이다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 곕소서


18수로 된 이은상의 면암 찬양 시조의 둘째 연과 마지막 연이다. 이제는 정말로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계신 분이 면암이다.

더구나 요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의 망언과 망발에 더더욱 항일의 투사 면암의 마음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살아나고 있다.

고종 10년, 대원군을 탄핵하다 감옥에 갇혀 목숨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여기다가 그가 살아서 서울 거리를 걸어서 제주도로 귀양가자, 서울의 모든 백성들이 ‘최충신’이 살아났다고 탄성을 올리던 그 장면에서 면암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왕조 최후의 역사책으로는 가장 정확하고 비판적 역사관에 의하여 서술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은 면암이 일본 정부에 보낸 16조 죄상의 글을 그대로 실었고,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고종황제에게 유소(遺疏)로 올린 상소문을 온전하게 실었는데 그의 충성심은 말할 것 없지만 유려한 문장의 솜씨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해준다. ‘조선유학사’의 저자 현상윤도 그의 책 ‘척사위정파’의 서술에서 면암의 유소를 대부분 인용하여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글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면암의 유해가 대마도에서 부산항에 도착하자 부산시민은 완전히 철시하고 임시의 빈소를 찾아 남녀노소가 통곡하였고, 자택인 청양으로 상여꾼에 의해 운구될 때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죽을 수 없는 위대한 혼을 세상에 남겼다. 마침내 군중의 소요를 염려한 일본당국은 강제로 기차로 운구케 하였고 본가에 도착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때에는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거대한 유림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제 100년이 넘도록 면암의 혼은 묘소에 묻혀 있다. 유적지를 살펴보고 귀로에 찾아간 묘소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의 1에 있었다. 초라한 선비의 묘소 그대로다. 몸은 땅에 묻혔으나 혼은 살아서, 지금도 면암은 일본을 꾸짖고 계시리라.

당대의 역사가이자 대시인이던 황현, 면암의 죽음에 어찌 그의 평가가 없을 것인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6수로 된 황현의 ‘곡면암선생(哭勉菴先生)’이라는 만사(輓詞)를 외우며 그의 일생을 정리해보았다.

물고기나 용도 오열하고 귀신도 슬퍼하는데

펄럭이는 붉은 명정 바다위에 두둥실

골목마다 통곡소리 삼백 고을에 이어졌으니

나라의 정화(精華)가 배 한척에 가득찼네

끓는 충의의 정신 지하에서라도 왜 사라지랴

충신의 넋은 땅 속에도 변할 리 없네

제(祭)지내느라 술 떨어지니 겨울 해가 저무는데

통곡하는 이 몸도 백발 성성하답니다

(魚龍鳴咽鬼神愁 獵獵紅旌海上浮 巷哭相連三百郡 國華滿載一孤舟 握捲豈待還丹力 藏血번驚化碧秋 酒盡西臺寒日暮 謝參軍亦雪盈頭:六首의 마지막 시)

면암의 순국에 인간은 물론 모든 짐승까지 슬피 울고, 조선 300군의 골목마다에 통곡소리가 이어졌다고 읊었다. 중국의 절개 높은 충신들인 변호(卞壺)·장홍(장弘)·문천상(文天祥)·사고(謝고)를 인용하여 몸과 정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으리라고 칭송한 만사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