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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의 체취가 느껴지는곳~~강진

왕토끼 (秋岩) 2010. 3. 4. 17:55

다산 정약용 선생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한 전남 강진.
다산 선생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정조를 받들어 수원성을 설계, 축성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다산은 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 때 서학과의 관련 혐의로 경상도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지역만 정해졌지, 집이 따로 없었던 유배자 다산에게 첫 거처가 된 곳은 강진 읍내 주막이었다. 술로 상심을 다스리던 그는 주막에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란 이름을 입힌 후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서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주막에서 4년여의 시간을 보낸 그는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의 도움으로 강진 뒷산에 위치한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제자 이학래의 집을 거쳐 그의 학문적 깊이에 탄복한 제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귤동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다산초당은 그가 유배생활이 끝날 때까지 머문 곳으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강진은 다산 선생의 삶에 있어 유배라는 아픔을 담고 있지만, 실상 그가 후대에 남긴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이 이루어진 곳이다. 다산 선생이 힘든 시기에도 불구하고 저술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던 데는 강진의 아름다운 길이 한 몫 했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 '다산유배길'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한 길이 그것이다.


다산유배길은 이름 그대로 그 옛날 다산이 다니던 길을 말한다.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을 거쳐 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을 좇는 길에 다름 아니다.

다산유배길의 출발지는 다산수련원이다. 다산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자 지난 2005년 개관한 다산수련원은 다산유물관이 있어 산책에 앞서 다산의 의미를 고취시키기에 좋다. 다산수련원을 지나면 곧바로 10여 년 전 조성된 두충나무 숲길이 나온다. 두충나무 숲은 일부러 조성한 게 아니라 중국산이 밀려들면서 가격경쟁력에서 밀려나 방치하다보니 어느덧 숲을 이루게 되었고, 지금은 다산유배길의 초입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두충나무 숲은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만덕산 등산로와 연결되는데, 이 길은 나무뿌리들이 땅 위로 드러나 있어 일찍이 정호승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땅 위로 혈관처럼 두드러진 뿌리의 길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신비롭다.

다산유배길에는 '뿌리의 길' 외에도 다산의 정취가 묻어나는 2개의 길이 더 있다. 다산초당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향하는 '백련사 가는 길'과 제자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이 그것이다.

오솔길의 운치도 감동적이지만, 백련사 가는 길은 다산유배길의 3가지 길 중 다산의 체취가 가장 자옥한 길이다. 이 길은 유배생활 동안 다산의 스승이자 제자였던 혜장스님과 다산을 이어준 통로였다. 야생 녹차밭과 동백림이 운치를 더해주는 백련사 가는 길은 다산유배길을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만들어준 일등공신.

특히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은 수령 300~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들의 숲으로 '꽃이 핀 채로 100일, 꽃이 떨어진 채로 100일'을 머물러 '동백'이라 했다는 동백나무의 근원을 떠올리게 한다. 백련사 동백림의 개화 및 낙화는 늦겨울부터 이른 봄에 절정을 이루어, 봄날 이 길을 걷다보면 동백꽃을 즈려 밟으며 걷는 감흥까지 누릴 수 있다.

이 3개의 길 중심에 놓인 다산초당은 다산이 10년 동안 머물며 학문의 깊이에 몰입한 집이다. '다산(茶山)’이란 호도 이곳에서도 붙여졌는데, 만덕산 기슭에 자생하는 녹차밭에서 따온 이곳의 고유 지명이기도 하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지나 만나게 되는 길은 강진읍으로 향하는 강둑길이다. 강진 읍내는 다산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 8년 동안 머물던 곳. 다산이 살던 시절엔 다산초당이 자리한 만덕산에서 보은산 보은산방, 강진읍 주막과 제자 이학래의 집까지 길로 이어졌겠으나 일제 때 탐진강 갯벌을 매립한 이후 강둑길이 생겨났고, 신작로를 만들기 위해 산도 잘려나갔다. 따라서 다산초당에서 보은산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강둑길을 지나야 한다. 다행히 강둑길은 철새들의 낙원으로 변해있어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재두루미들의 날갯짓을 구경하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강둑길을 지나 읍내로 접어들면 아직 복원을 하지 못한 이학래의 집 대신 재단장한 다산의 첫 거주지, 주막이 나온다. 주막 뒤채엔 다산이 지은 '사의재' 간판이 보이는데, 그 옛날 다산이 마음을 다잡는 풍경이 아련하게나마 그려지는 듯하다. 사의재를 끼고 도는 골목길을 따라가면 사의재 만큼이나 애틋한 김영랑생가가 나온다. 올망졸망한 낮은 집들 끝에 나타나는 영랑생가는 입구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로 단박에 찾아낼 수 있다. 정갈하고 애틋한 영랑의 시구와 이미지가 흡사한 영랑생가엔 봄이 되면 모란이 등처럼 피어난다.

다산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다산유배길의 마지막 코스는 백련사 주지였던 혜장스님이 다산에게 내준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이다. 보은산방으로 향하는 길은 등산로로 이어진다.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정상인 우두령 가는 길과 고성사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다산유배길은 당연히 고성사 가는 길로 안내한다.


고성사가 지어진 건 강진의 풍수와 무관치 않다. 강진은 풍수적으로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臥牛)’형국이라 한다. 보은산 정상인 우두령은 소의 머리에 해당되는데, 보통 소의 목에는 방울이 걸려 울리는데, 이를 고민하다 보은산 중턱에 고성사를 지었다 한다. 고성사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는 소의 목에 걸린 워낭소리에 해당되는 셈. 고성사 대웅전과 칠성각 건너에 자리한 보은산방은 현재 스님들의 요사로 활용되지만, 다산의 향기를 오롯하게 머금고 있어 다산유배길의 마지막 종착지로서 손색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