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시 전경
일제 36년동안 목포항은 남북을 합한 전국에서 가장 농작물이 많이
생산되는 전라남도의 농작물 즉 쌀과 면화를 비롯한 밭 작물을 수탈(收奪) 해가던
곳이여서 농민들의 수난(受難)과 저항(抵抗)이 컷던 곳이라고 합니다.
자료가 많아서 한꺼번에 보시기가 버거우시면 몇차례 나누어서라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일제에 의한 수난이 얼마나 가혹했으면 300년전에
전사하신 이순신 장군을 사모(思慕)하는 정이 깊은 이 노래가 나왔겠습니까?.....
↓목포항 전경
↓문헌으로 본 개항 직전의 목포 풍경
옛 유달산 자락의 조선인 마을[출처:목포문화원(사진으로 보는 개항 100년)]
광주에서 목포로 오는 버스안에서 어느 대학생들의 수다를 듣는다.
얘기를 듣다보니 목포가 초행길이다. 난생 처음 낯선 고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설렐 수 밖에 없다. 얘기 중에 "목포는 항구
" 라며 "목포에 왠지 정감이 가서 좋다"고 말했다. 그랬다. 목포는 항구다.
문득 목포 항구가 열리기 전후의 모습이 궁금했다.
이대흠 시인은《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에서 "목포는,
조선말기 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였을 뿐이다. 그러나
1897년 개항된 이래 일제의 식민지 거점도시로 이용되면서
목포는 도시의 틀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보성사람 한창기가 만든 뿌리깊은나무사에서 낸《전라남도》<목포시>에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목포도 무안현 안에 들어 있는 유달산 기슭의
갈대 숲에 우거진 조그만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목포가 항구
도시로 형성된 것은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인천항,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97년 목포항이 개항" 했다고 기록했다.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가 있습니다'는 《전라도 닷컴》(2005.1)<신의주로
가는 이천리 길 출발점>에서는 "1897년 목포항이 일제에 의해
개항될 때만 해도, 목포는 전남 무안군 일로촌면 목포리의
목포진과 쌍교리 부근까지의 90여 호에 불과했다"고 했다.
목포문화원에서 2003년에 낸《목포의 땅이름》<목포시가지의 형성(1)>에
"1897년 개항당시의 목포는 전라남도 무안군 이로촌면
목보리의 목포진(남평리, 서평리)과 쌍교리(雙橋里)부근까지의 90여호에
불과하였다 한다. 그러나 1897년 10월 16일 조선외무대신과
일본, 미국, 불란서, 독일, 영국, 로서아의 각 대표사이에 서울에서 조인된
<목포각국공동조계장정>에 의하여 각국거류지가 동으로 송동(松都; 동명동
어판장 부근), 남으로 목포진(만호동), 북으로 노적종, 서로는
서산동 어항에 이르는 임해지역으로 정해져 전 계획구역이 726,024㎡이었으나
나중에 방조제의 구축 등으로 998,082㎡로 늘어났다."고 한다.
목포대학교 고석규 교수가 2004년에 낸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
에서는, 현재의 목포는 1439년 만호진이 설치되면서부터 사람 사는 곳으로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고 밝히면서 16세기 초 목포진의 성이 완성되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목포는 차츰 단순한 변방에서 사람 사는 마을로
바뀌어 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항 이전 목포를, 일본인 마에다 교사쿠(前間恭作)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중 <出張員 前間恭作의 復命書, 1896.11.11)>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현재 목포 상황을 진술하건대 목포진성 내외에 민가가 24, 5호가 있다.
어느 것이나 추하고 좁은 오막살이에서 옛진아(鎭衙)만 약간 가욱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무안가도(務安街道)에 목포에서 20정(町)
거리에 석교리(石橋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도 호수 24, 5호로 농가가 많다.
주민의 생활은 목포보다 낫지만 그렇게 차이가 없다. 이밖에는 근방에
촌리(村里)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저저는 이 글이 당시의 모습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라 사실에 가깝다고 밝혔다. 다른 글도 보이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고석규 교수는 "개항 이전의 목포는 대체로 150여 호 전후의 사람들이 진의
관할 하에 농업 또는 어업 등에 종사하면서 나름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자취를 확인하기 어려운 옛 三鶴島
↓많은 조각과 詩碑와 노래비가 있는 儒達山
↓유달산 이순신 장군 동상
↓노적봉
↓유달산 노적봉의 거북바위
목포역에서 5분 거리인 유달산 등구 표지석에서 다시 5분여를 걸어 오르면
유달산의 정문격인 등구의 좌편에 큰바위 봉우리인 노적봉이 보인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해발 60미터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 설화가 깃든 호국사적지이며
한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더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소수의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로 가장하여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이 봉우리를 가리켜 노적봉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양식이 많은 듯이 보이게
한 것과 진도의 강강술래, 울돌목 의 쇠줄 등도
모두 이런 전술의 일환으로 이 곳은 이러한 장군의
뛰어난 전술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의 지형을 이용한 고도의 심리전이 돋보인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덮어 놓은 노적처럼 꾸며서,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했으며 영산강에 백토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를 위장하여 왜장이 군사를 돌려 후퇴하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주차장에서 바라본 노적봉의 거북바위(?)
1934년 조선일보주최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이 열렸다.
전국에서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무명의
시인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
오케 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당선 지방 신민요곡’을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이 부르게 했다.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1935년 8월 작 ‘목포의 눈물’이다. 특유의
콧소리에다 흐느끼는 듯 애간장을 끊어내는 느낌의 이난영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에서나 느낄 한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났다.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이 된 이난영은 한 곡의
유행가로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
지금껏 애창되는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곡이다.
이 노래는 일제에 대한 한과 저항의 혼이 표현된 민족의 노래로 추앙받으며
이미자, 조용필, 남진, 나훈아, 문주란, 주현미, 김수희, 심수봉을 비롯해 루시드
폴 같은 최근 가수에 의해서도 리메이크된 불멸의 명곡이다.
현재 ‘목포의 눈물’ 오리지널 SP(유성기)음반은 부르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명반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확인하긴 힘들지만 발매이후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는데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지 실물구경조차 불가능한 초
희귀음반이 되어있다. 물론 LP. CD시대에 재발매된 이난영의 음반들은 무수히 많다.
1968년 가수 개인을 추모하는 가요제가 대중
가요사상 최초로 개최되었다. 난영가요제다.
1969년에는 최초의 노래비가 목포 유달산에 건립되었고 이난영, 남인수의
사랑과 인생, 노래를 소재로 영화 ‘이 강산 낙화유수’까지 제작되면서
그녀는 전설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2006년 3월 25일. 이난영의 유해는 41년 만에
경기도 파주에서 목포 삼학도에 조성된 ‘가수 이난영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사공의 뱃노오래 가무울 거어리이며~~~
'목포의 눈물'은 1935년 발표되었습니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의 노래입니다.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했을 시기죠.
2절의 가사가 혹시 기억나시나요?
이난영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라고 부릅니다.
KBS가요무대에서 오은주도 그렇게
불렀고 자막도 그렇게 표기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일찍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봉우리를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씌워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식량과 군사가 많은걸로 오인시켜 일본군을
패퇴케 했던 일화를 상기시킨 대목이랍니다.
임진왜란부터가 300년 원한이며
그 원한 서린 노적봉
밑에 님=(이순신장군)의 자취가
또렷하게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발표당시 공연에서 왜경이 이 구절을 당연히
문제삼았답니다. 왜경은 제작자측에 출고를
등을 줄줄이 불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를
해명하라고 족쳤습니다.
그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이
레코드 판매와 함께 내보낸
가사지를 내밀었습니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 깁히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리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서름
2.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로적봉 밋헤
님자최 완연하다 애닯은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깁흔밤 쪼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지타 녯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의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문제의 구절은 '세 그루의 동백이 있는 연못의
평안한 바람이 부는 노적봉 밑에...'라는 뜻으로
풀이했었답니다. 왜놈들은 이상한데 이상한데
하며 어쩔수없이 그냥 넘어갔다더군요.
우리가 그저 옛날노래 뽕짝이라고 또는 왜색가요라고
폄하하던 노래에 이런 사연이 있었더랍니다.
제가 요새 우리가요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책저책 이음반저음반을 뒤적거리는데
참 재미난게 많네요... 위에 <목포의 눈물 사건>은 김지평
지음 아름출판사 발행의 '한국 가요 정신사'에서 발췌했습니다.
한 이십여장만 더 모으면 엘피도 천장을 돌파하는데, 있으신
분들 좀 도와주셔요. 술집차리면 브이아이피 대접해드릴께요.
근데 '목포의 눈물'을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던날 일산집근처에서 수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불러제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대중이성이 대통령이 되앗다아!"고 누군가는 소리치면서...
고 이난영의 딸들
김시스터즈는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 부부의 두 딸(숙자, 애자)과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이민자)로 구성된 3인조 여성보컬트리오.
1953년 데뷔해 미8군에서 활동하던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진출한다.
국내 최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입성한 이들은 노래뿐만 아니라
춤과 각종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등 재능이 탁월했던 까닭에
미국에서도 탁월한 음악성을 지닌 여성보컬그룹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다.
미국의 유명잡지 버라이어티와 라이프에 소개되었고
프랭크 시내트라, 마릴린 먼로 등 할리우드의 톱스타들과 함께
라스베이거스 '데저트인호텔' 무대에서 활동했다 하며,
66년 코미디 스타 밥 호프와 베트남전 참전용사 위문공연을 가졌고,
그룹 코스터스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찰리 브라운>은
62년 빌보드 싱글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고...
1). 나무명 : 여인나무(팽나무)
2). 연대 : 1930
3). 설화발원: 목포시 죽교동 박인호의 꿈
4). 위치 : 유달산 노적봉 옆
5). 나무수량: 어미목 과 새끼목(여인나무 1 그루)
이 나무는 목포 유달산 노적봉 옆 언덕에 위치한 나무로
이 나무의 설화를 추적해보면 분명치는 않지만 1930년대 유달산 밑
목포시 죽교동의 한 박 노인의 꿈의 이야기를 통해
이 나무의 사연이 구전되여 옴을 추적해 보았다.
원래 이 나무는 여한목(女根木 : 한스러운 여인나무)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2000년대 부터 여인나무라 불리어지고 있다.
화재의 이 나무 이름과 유래의 설화는 당시 새우젖 60%를 전국에 공급해 오던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 전장포의 한 어부의 아내로 남편이 돈이 많이되는
홍어잡이를 위해 흑산도로 갔다가 홍어를 만선하여
돌아오는 도중에 거센 풍랑에 그만 침몰하여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허지만 그래도 살아서 돌아 올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두 모녀는 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