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아시아역사문화 연구원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전경화 그림전을 광주예총 특별전시실에서 전시를 갖고 많은 시민들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으나 홍보부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편이었다. 오늘 특별히 광주예총 자원봉사자 임시총회가 있어서 이곳에 들려 봤다.
제1화 폭풍전야! 폭압의 유신시대가 막을내리고 민주화의 봄과함께 찾아온 민중들의 평화의 꿈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을 무렵 당시의 광주는 간간이 학생과 노동자들의 민주화의 기대와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을 뿐 지극히 합법적인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상
제7화 피로물든 새벽은 밝아오고 계엄군의 진압으로 도청일원의 시민군은 초토화됐고 사망자와 부상자가뒤엉켜 나뒹굴었다. 산자는 받줄에 꿰어 어디론가 실려갔다. 남은자리에는 을씨년스러운 새벽공기가 엄습하며 총탄의 화약냄새가 대신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들을, 남편을, 아빠를 찾는 울부짖는 소리가 다가온다. 그러나 곧 절망과 눈물은 사라지고 오직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그 시작은 이땅의 미래를 밝혀줄 민주주의의 희망이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군사정권하에서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 날 이후 살아 남은 모든 우리들의 가슴에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남아 있다. 광주시민의 의로운 항거는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으로 다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상~~~~하
제6화 슬픈전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며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 나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했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상
제5화 대동세상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 가기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 들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우리는 더이상 비굴하고 억울하게 살수 없다. 이제 더이상 그 잔당들에게 우리 모숨과 우리땅을 맞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맞섰다. 그리고 이루어 냈다. 위정자들이 그 잔당당들이 없어도 우리는 훌륭한 스스로의 통치를 할 수 잇다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체제를 수호할 수 있다고! 그리고 보여주었다. 나누고 함께하는 범죄한건 없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동세상을 일구어 냈다.~~~~~상
제4화 민주성회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포위, 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었고 전국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하엿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 기간을 '해방광주' 라 부른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은 광주자유민주화항쟁 당시 광주를 시민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코민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5월 23일은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물리치고 질서가 회복되자 시민학생 5만여명이 모인가운데 제1차민주시민 궐기대회(민주성회)가 열렸다.~~~~~상
제3화 계엄령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햇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 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 되어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상
제2화 햇불로 조국의 미래를 밝히다.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도 전남대, 조선대를 비롯한 학생시민 수만명이 도청앞에서 모여 연일 집회를 열고 민주화 요구 시위와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고 있었다.5월 16일 비상계엄 확대와 민주인사 체포 등을 앞도고 비장함이 감도는 가운데 광주시내 일원에서는 수 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햇불시위가 열리고 도청앞에서는 박관현열사의 명 연설을 남긴 집회가 열린다.~~~~~~상
제1화 폭풍전야! 폭압의 유신시대가 막을내리고 민주화의 봄과함께 찾아온 민중들의 평화의 꿈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을 무렵 당시의 광주는 간간이 학생과 노동자들의 민주화의 기대와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을 뿐 지극히 합법적인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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