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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표상, 탕건을 엮다 (옮겨온 글) 문화재청

왕토끼 (秋岩) 2011. 7. 19. 07:07

제목 선비정신의 표상, 탕건을 엮다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7-13 조회수 46

 

제주도의 평범한 장인들
열 살 무렵이면 어른들을 통해 말총공예를 자연스럽게 익혔던 제주 여성들. 성장해서는 또래끼리 모여 저마다 촘촘한 탕건을 만들고자 능숙한 손길을 다져갔다. “여덟 살에 어머니가 탕건 짜는 걸 보고 배웠어요. 좀 더 커서는 탕건청宕巾廳이라고 부르는 일청에서 여럿이 일을 했고요. 열다섯 살 됐을 때에는 탕건 하나를 거뜬하게 짜냈죠.” 해녀가 되어 물질을 하거나 말총공예로 소일거리를 삼았던 여느 제주 여성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말총을 엮어 온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


그녀의 기억을 빌리자면 조천읍과 화북동, 삼양동 등지에 밀집되어 있던 탕건청은 오늘날의 공예촌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부지런한 근성과 다부진 솜씨로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말총을 엮어갔을 제주 여성들. 보유자의 표현처럼 그녀들은 소박한 기술을 지닌 평범한 장인이었다.

 

 

탕건, 말총에서 뽑아낸 손끝공예
말총을 재료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탕건.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중간에 턱이진 탕건은 결을 내는 방법에 따라 ‘홑탕건’과 ‘겹탕건’으로 나뉜다. 여기에 솜씨를 한껏 부리면 바둑문양이 아름다운 ‘바둑탕건’이 탄생하는데,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이 제작기법은 오늘날 김혜정 보유자의 손을 통해서만 전승되고 있다.

탄탄한 형태미를 지닌 탕건은 말총을 다듬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옛날에는 삼사월이면 말총을 한 번씩 벴어요. 그 중에 좋은 총만 골라 탕건 만드는데 썼지요.” 말에서 얻어낸 말총을 깨끗이 씻어서 그늘에 펼쳐 말린다. 탕건골 위에 탕건의 형태를 결정짓는 태를 만들어 말총을 한 도리씩 조심스럽게 짜 올라간다. 잠자리 날개와 같은 투명한 탕건의 아름다움은 수십 번의 공정과 정성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부드러운 것만을 골라서 손질한 말총이 머리카락 같지요? 이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워도 엄청 질겨요.” 이러한 말총의 성질은 형태가 뒤틀어지지 않아 관모 제작에 무척 적합한 소재라는 보유자의 설명이다. 게다가 말총은 가볍고 땀을 잘 흡수할 뿐만 아니라 더러움이 잘 타지 않아 위생적이기까지 하다. 말이 제공해 주는 질 좋은 말총을 허투로 보지 않았던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우리의 특별한 관모冠帽문화
오늘날에는 사극이 아니면 탕건을 착용한 사람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관모는 의관정제衣冠整齊를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외국인이 쓴 여행기에도 관모冠帽가 자주 소개된 것을 보면, 당시의 풍광이 이채롭게 보일만큼 조선은 모자의 나라였다. 외출할 때는 갓을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탕건을 즐겨 썼던 우리 조상들. 신분에 따라서 그리고 때와 장소에 알맞은 관모로 실용과 예를 추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탕건은 집안에서조차 선비의 품위와 단정함을 유지시킬 수 있는 독립된 형태의 모자였다.   

 
서민층에서는 양반층의 점유물이던 탕건의 착용이 꽤나 부러웠던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양반을 모방하기 위해 탕건을 착용하는 서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당시의 풍속화를 통해서도 탕건을 쓴 모습이나 제작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제주도를 비롯하여 관모공예가 성했던 구례(전라남도), 평양과 안주(평안남도), 통영(경상남도) 지역의 관모시장은 일제강점기 이후 점차 시들해졌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탕건 만드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탕건 제작기술의 소중함과 장인에 대한 온전한 대접이 필요함을 공감했을 때에는 이미 평범한 장인들의 직업이 여러 차례 바뀌어 있었다. 탕건을 찾는 이가 없으니, 만드는 이 또한 사라져가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의 지정(1980년)은 사라져가는 전통공예 기술을 통해 어제와 오늘을 잇고자 하는 노력이 맺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탕건장, 말총공예의 내일을 엮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증조할머니부터 집안 대대로 탕건을 짜왔다 해요. 어머니는 7살 때 고모님께 탕건을 배웠어요. 제가 어머니 솜씨를 물려받아서 고맙지요.” 고령임에도 깔끔한 솜씨를 잊지 않았던 어머니 김공춘 명예보유자(탕건장 1대 보유자)의 성정과 솜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녀다. “가죽이나 나무, 짚공예에 비해서 말총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잘 몰라요. 요즘 탕건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죠.”

 

1950년대 이후 제주도에서 말총공예가 급격히 사라진데 대한 보유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진다. 탕건일은 보유자 집안의 가업이 되었다. 이는 예전처럼 삼삼오오 모여서 탕건을 엮어 갈 형편이 되지 못함을 뜻한다. 그래서 객지생활을 고집하지 않고 탕건일을 선택한 딸이 더욱 고맙기만 하다. 온전한 기술을 배우기 위한 인내심과 혼자서 탕건을 엮어가는 외로움을 함께 감내해야 하는 탕건장의 길. 기대와 고마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보유자가 탕건을 겯는 딸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제주 여성들이 간직했던 솜씨를 이어가는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 조선시대의 관모 문화와 제주가 낳은 말총공예의 내일을 그녀와 딸이 함께 엮어가고 있다. 

 

글· 황경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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