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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다리의 과학성 (옮겨온 글 문화재청)

왕토끼 (秋岩) 2011. 6. 7. 17:04

제목 옛 다리의 과학성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11-05-16 조회수 162

 

 

사료로 본 다리의 기원
우리나라의 경우 문헌 속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실성니사금조實聖尼師今條’에 “12년 추8월 신성 평양주 대교十二年 秋八月 新成 平壤州大橋”라는 기록(413년)이다. 이를 통해 평양주 대교 이전에도 이미 다리를 설치하여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조東城王條’에 ‘12년 설 웅진교十二年 設 熊津橋’라는 기록(498년)도 있다. 이를 보았을 때, 백제에도 상당한 수준의 건축공학적인 다리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612년)에 백제 토목기술자인 노자공路子工이 일본에 건너가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인들이 다리축조에 있어 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거대한 규모의 목교지가 조사·보고되었는데, 굵은 밤나무 각재를 사용하여 귀틀모양으로 짜 올린 골조 위에 견고하고 튼튼히 맞물린 지지보를 놓은 다음 두꺼운 깔판을 대어 다리를 만들었다. 골조에는 기둥구멍과 함께 이음흔적이나 사개물림 등의 결구 흔적이 잘 남아 있어,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교량축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오래되고 큰 목교로서, 고구려인의 놓은 토목기술을 잘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문헌적인 고찰과 몇몇 유구遺構를 살펴볼 때, 옛 다리는 삼국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발전된 모습으로 축조·이용하여 민족적 정서가 함유되어 있는 동시에 도성이나 궁궐 내의 권위를 의미하는 전달어로, 불토국을 의미하는 상징어로, 상당한 수준의 과학적 사고가 깃든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옛 다리의 속살
옛 다리의 소재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쓰러진 나무나 돌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약간의 가지치기를 한 나무나 평평하게 생긴 돌을 그대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다리의 초기 형태인 나무다리는 습기에 약한 탓에 부후腐朽 또는 부식되어 그 예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가공성이 뛰어나 연장과 도구의 발달과 맞물려 정교하고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축조되었을 것이다. 나무다리는 대부분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침엽수인 소나무로 강송이 으뜸이다. 나무다리에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외나무다리부터, 과학적 원리와 사고로 축조된 평목교, 누교, 향교 등이 있다.


돌다리는 나무다리에 비해서 시간, 재력, 공력이 많이 들지만 재료구입이 용이하고 반영구적인 특성이 있다. 처음에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약간 가공하여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도구의 사용으로 차츰 치밀한 구조로 발전하였다. 돌다리를 축조할 때는 돌다리의 기초나 교각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돌과 돌 사이의 접합에 금속 은장隱藏을 사용했다.
다리의 종류를 살펴보면, 가장 초보적인 다리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다. 주로 얕은 개울가에 건너기 좋도록 보폭에 맞춰 큼직한 돌덩어리를 듬성듬성 놓아둔 형태다. 이것은 인체의 동작에 대한 행태를 반영한 매우 인간공학적(에르고믹스)인 대치구조이다.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징검다리에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다. 이 단점을 극복하여 발전한 것이 널다리이다. ‘널빤지로 만든 다리’를 뜻하며, 이로부터 ‘판교’라는 땅 이름이 생성되었다. 그 이름도 다양해 보다리, 농다리, 평석교로도 불리는데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된다. 청원 문산리 석교, 진천의 농교, 청주의 남석교 등이 현존하는 오래된 널다리로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

 

 

 

 

하지만 널다리는 폭이 넓은 곳은 건너기 어려워, 그 단점을 보안하여 구름다리가 만들어졌다. 구름다리는 옛 다리 중에서 가장 발전된, 과학적인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과학적 사고가 지표면과의 접촉 없이 다닐 수 있는 전혀 색다른 다리로 발전한 것이다. 상부하중이 홍예(arch)의 축선을 따라 전달되며 다리의 하부에는 인장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설계한 매우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다리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과학적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어 조형성이 돋보이는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구름다리는 성곽이나 사찰, 궁궐의 중요한 다리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이러한 다리의 원리나 기능에 만족하지 않고 다리가 생활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데까지 미치게 되었다. 다리가 생활 그 자체를 충족시키는 설비(equipment)가 되도록 축조된 것이 누다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각이 있는 다리인데, 누교 형식은 공간적으로 전이공간이고 완충공간이며, 기능적으로는 연결기능과 풍류기능을 겸비한 합리적인 형태다. 이러한 누교의 예도 『삼국사기』에 원성왕元聖王 14년(798) 3월, “궁남누교가 불탔다宮南樓橋災”라는 기록이 있다. 다리 위에 회랑식 건물이 있는 목교였음을 추정하게 되는데,  예로 백제 무왕 때 조성된 익산 미륵사지의 다리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누교는, 송광사 삼청교의 우화각, 청량각 누교, 곡성의 능파각 목교, 수원화성의 화홍문 등이다.


배다리는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그 위에 가로목을 질러 놓은 다음 널을 깔아 바닥을 만든 다리로 부교 혹은 주교라고 하는데, 깊고 폭이 넓은 강가나 바다를 건너기에 이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부력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고려 정종 1년(1045)에 임진강에 가설되었는데 “선교가 없어 행인이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지게 되는 일이 많으므로 부교를 만든 뒤로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밟게 되었다”라고 한 것을 보아 배다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 뒤 이성계가 요성을 공격할 때와 위화도 회군 때 부교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배다리에서 발전한 형태가 매단다리이다. 배다리가 깊은 계곡이나 낭떠러지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아주 새로운 방법과 기술이 요구되어 탄생했다. 길을 내기 어려운 낭떠러지나 절벽과 절벽 사이에 줄이나 쇠사슬 따위를 가로질러 줄의 지탱력으로 한 사람이 간신히 건너는 정도의 다리다. 매단다리는 오늘날 남해대교와 같은 현수교의 조형으로 옛 선조들의 탁월한 공학성과 조형성이 돋보이는 창의적인 다리로, 오늘과 같은 거대한 대교大橋로 발전하였다.

 

 

 

 

옛 다리가 품고 있는 정신적 가치
우리의 옛 다리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보다 치밀하고 합리적인 다리로 발전하였음을 확인했다. 옛 다리는 역사적인 삶의 흔적과 정신적인 얼이 담겨져 있으며 과학성이 스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기능적이고 조형적인 다리뿐만 아니라 시공을 뛰어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의 통로로, 단절된 세대 간, 지역 간의 새로운 소통의 통로로 다가와 답답하게 막혀있는 오늘날의 세상을 시원스럽게 뚫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옛 다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사진ㆍ황세옥 한국고건축문화재연구소장   사진ㆍ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