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검색과 자료수집

나주 읍성 엣 지도(옮겨온 글)2012.01.21

왕토끼 (秋岩) 2012. 1. 21. 16:25

나주 읍성 엣 지도

 

 

1872년 지방지도 나주지도

 

나주지도 羅州地圖, 羅州牧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의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 의 경현동과 교동지역에 있었다. 羅州牧은 인근 務安縣의 地界를 넘어 서쪽 해안의 도서를 越境地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지도에도 해안의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무안현 境內에 있던 三鄕面도 나주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다. 이들 월경지는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로소 인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성곽이 있었던 읍치에는 주변의 산을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으며 각종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려 넣었다. 읍성의 동문 근처에는 당간인 木檣과 石檣의 모습까지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이들 당간은 나주의 지형이 行舟形이기 때문에 이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진다. 현재에도 석당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각 성문은 방어에 용이한 甕城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당시 右營에 해당하는 鎭營은 남문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에는 戰船, 商船, 그리고 나룻배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읍성내 현 나주시가지 모습

 

 

<1872년 지방지도 나주지도 읍성 부분> 

 

나주읍성(사적 제377호)
 

주는 백제시대 발라군(發羅郡)이었고, 통일기에는 발라주로 승격되어 전남일대의 치소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9년후 다시 발라군으로 강등되었고, 경덕왕때는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나주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후삼국의 쟁패시기부터였다.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경략하여 후백제의 견훤을 견제하고 나주평야의 풍부한 물산을 장악하여 중심기지로 활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주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과의 사이에서 다음 대를 잇는 혜종을 얻게 된다. 현종1년 거란의 침입당시 현종은 나주로 몽진와서 열흘을 지내고 가니 그 사연이 사마교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나주목은 전라도의 중심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그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나주읍성은 고려사의 기록에 고종24년(1237년) 김경손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이 물리치는 곳이 바로 나주성이었다. 나주성은 이후 조선조들어 태종4년 3개월만에 읍성으로 다시 수축된다. 이 수축은 계획적인 신축이라기보다는 기왕의 토축부분을 석축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나주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개축작업이 등장한다.

나주읍성은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남북장축의 평지성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양식을 취하고 있다. 총 길이 3,300m에 달하는 성벽유구는 대부분 훼손되어 있으나 서성문에서 나주고등학교 방면의 성벽이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다.

나주읍성을 취하는 자는 큰 업적을 이루었고, 취하지 못한 자는 실패했다. 나주를 공략해 차지한 왕건은 고려의 왕으로 등극하여 후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고, 전라도 53개고을을 얻었으면서도 나주읍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한 1894년 동학농민군은 끝내 혁명의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다.

현재 나주읍성은 서쪽 성벽만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일제 강점기 초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여 거의 무너졌다. 일제는 현재의 나주 소방서와 공공도서관 사이로 시내로 들어오는 신작로를 뚫으면서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나주로 들어오는 남쪽의 첫관문인 까닭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가장 중요한 두 요소라 할 수 있는 무력의 지배와 정신적 지배를 상징하는 한쪽에는 경찰서, 다른 쪽에는 일본사찰인 본룡사가 들어섰다. 

나주읍성 4대문의 명칭은 동점문(東漸門), 서성문(西城門),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으로, 그 명칭의 유래를 보면 동점문은 동문으로 영산강에 나아간다는 의미이고, 남고문은 남쪽으로 나가기 때문에 임금이 계신 북쪽을 돌아보고 나간다는 의미이며, 북망문은 임금이 계신 쪽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건물에 대한 안내판이다.

 

.

 

우선 재일 눈길이 가는 것이 안내판이다.

옛 읍성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옛 읍성지도 그리고 자료을 인용하여 멋지게 꾸며 놓았다

충주에는 덩그라니 관아 공원이란 돌덩이 하나가 놓여있다.(아래 참조)

 

  

충주읍성 지도

 

 

1_1.png

 

              고지도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충주목 지도의 읍성.

 

충주읍성/ 충청감영문

 

 

1.JPG

 

 

 

 

 

 

 

 

 

 

 

 

 

 

 

 

 

성관은 객사로 사용되던 공간인데,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곳으로, 지방에서 중앙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나주읍성이 있던 시대에는 모든 관아 건축물이 금성관을 중심으로 삼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금성관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5 나주목 궁실조다.

이후『여지도서(輿地圖書)』,『나주군읍지(羅州郡邑誌)』,『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등에도 나타나는데, 모두 [在銀杏亭南 牧使 李有仁 構]라 하였다. 또『금성읍지(錦城邑誌)』에도 [客舍 牧使 李有仁構後 牧使 朴奎東 重修]라는 기록이 있어 목사 이유인이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는데, 이들 기록의 선생안에는 이유인목사가 나타나지 않아 언제 나주에 부임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전주향교기(全州鄕校記)』에 이유인이 1479-1480년(성종 10-11년)에 전주부윤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금성읍지』선생안에는 1474-1479년(성종 5-10년)의 목사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는데, 이때 이유인이 나주목사로 나주를 거쳐가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따라서 금성관의 건립은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성관은 일제강점기때 개조하여 칸막이를 하고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여순사건때 나주에 왔던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퇴각할 때 금성관에 불을 놓았으나 군인들이 사라지자마자 이를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즉시 진화하여 피해를 보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은 1963년 9월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복원된 금성관은 97평으로 전국 객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그러나 완전한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에 나타난 원래 규모를 보면 팔작지붕의 본건물 양편으로 맞배지붕 건물(동헌과 서헌)이 잇대어서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1백30평은 넘었을 것이다.

금성관은 모든 객사가 그러하듯이 지방에서 중앙권력을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나주의 정신이 집결되는 곳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국난 극복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1592년 임진년 왜병의 침략이 있었던 때에는 호남창의사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이곳에서 왜병을 몰아낼 것을 다짐하고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다.

 

이후 김천일은 수원 독성산성에서 왜병을 물리치고 승리하였고, 강화도에서 한양 인근을 수복할 기회를 노렸으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고립무원의 성에 입성하여 주장으로써 왜병 10만대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최후를 맞이하여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왜병은 이 싸움에서 비록 성을 함락시키기는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진격할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구한말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곳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유림들이 모여 곡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금성관은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나주인의 의기를 상징하는 장소였던 것이다.현재 금성관은 나주시제2청사인 나주시의회 청사 뒷편에 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만 하더라도 현재의 소방서 자리에서 직선거리로 금성관까지 있었는데, 현재 금계 매일시장 입구 부근에 홍살문이 있었고, 객사의 정문인 망화루가 있었으며 그 안으로 중삼문과 내삼문이 있었고 맨 뒤에 금성관이 있어 멀리서도 한 눈에 금성관까지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칸막이를 하여 청사로 사용하였고, 부족한 공간은 별도로 옆에 따로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나주군청 청사를 새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금성관의 정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나주시는 관아 건물을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연차적으로 현재의 나주시의회 청사를 헐고 망화루를 복원하고, 나주목사가 정사를 보던 정청인 동헌을 복원하는 등 이 일대를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