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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왕토끼 (秋岩) 2012. 1. 16. 07:45



조선왕실의 영원한 성역 경기전(慶基殿)과 인근에 있는 호남 최초의 성당인 전동성당(全洞聖堂
)을 오랜만에 둘러보고 전주한옥마을의 중심을 가르는 태조로(太祖路)을 지나 한옥마을 동쪽에
솟아난 오목대를 찾았다. 서울의 인사동(仁寺洞) 골목과 거의 비슷하게 꾸며진 태조로는 찻집,
주막, 다양한 공예관 등이 즐비하여 인사동과 북촌골목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공예품전시관을 지나면 한지관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목대로 오르는 나무 계단길이
있다. 계단길 외에도 공예품전시관 주차장에서 직진하여 500년 묵은 당산나무를 거쳐 오목대의
서남쪽 허리로 오르는 길도 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계단을 3분 정도 오르면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는 현장 오목대이다.


♠  태조 이성계가 종족(宗族)들을 모아 연회를 배풀며 새 왕조의 개창을
암시했다는 현장, 오목대(梧木臺) -
전북 지방기념물 16호

전주한옥마을 동쪽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둥지를 튼 오목대는 1380년 이성계가 전주이씨 종족들
을 모아 연회를 베풀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
날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런 사연으로 오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가 끝없이 기울어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倭寇)는 고려와 명나라를 침범하
여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개경(開京)에서 가까운 강화도까지 쳐
들어와 선왕(先王)의 어진(御眞)까지 약탈해갈 정도였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때려잡고자 안간
힘을 썼으나 충렬왕(忠烈王) 이후 몽고의 통제로 강력했던 고려의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토벌에 적지 않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최무선(崔茂宣)이 화약(火藥)을 개발하여 1380년 진포
(鎭浦, 금강 하류)에서 왜구를 500척을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면서 상황이 다
소 반전이 된다.
하지만 그때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 잔당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 내륙지역으로 줄
행랑을 치면서 고려 정부를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
都巡察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이성계는 여진족(女眞族)인 의제(義弟)인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 운봉(
雲峯)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 패거리를 죄다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렸는데. 이 전투가 그 빛나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대승을 거두고 귀경(歸京)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서 전주 이씨 종족(宗族)들을 불러 모
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高祖)의 대풍가
(大風歌)를 큰 소리로 부르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은은히 내비췄다고 한다.
이성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그의 대풍가를 들은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행위에 적지 않은 역
겨움을 느끼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말을 달려 단숨에 남천(南川, 전주천 상류)
을 건너 인근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서 말을 멈추고 개경(開京)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시(憂國詩) 한 수를 읊고는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이후 이성계는 1388년 조정의 명을 거역하고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서 명나라를 향해야 할 창
을 개경으로 돌렸다. 개경(開京)을 점령하여 정몽주와 최영(崔瑩) 등 고려의 보루(堡壘)들을 죽
이고 끝내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1900년 고종(高宗)은 그런 자랑스러운 조상, 태조를 기리고자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웠다. 비
신(碑身)에는 '太祖高皇帝駐蹕遺址(태조고황제 주필유지)'라 쓰여 있는데, 이는 고종의 친필이
라고 한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전주한옥마을을 묵묵히 굽어보는 오목대는 한옥마을과도 길이 이어져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허나 이곳까지 오르는 답사객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예전에 비각 주변으로 철제(鐵製) 담장이 둘러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
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비각 좌우로 멋드러지게 가지를 올린 나무 여러 그루가 비석을 호위한다.


▲  고종이 세운 비석을 소중히 품에 안은 오목대 비각

▲  오목대 동쪽에 마련된 누각(樓閣)

오목대 동쪽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 이후에 만든 것으로 누각의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오목대나 오목대 누각이라고 부르
면 된다. 이성계가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족을 모아 연회를 베풀 때 이곳에는 누각이나 정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거나 막사(幕舍)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누각은 이성계가 연회를 베풀던 장소를 상징하여 만든 것으로 시인 묵객들이 남긴 시액(詩額
)들이 어지럽게 누각 평방(平枋)위에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이성계가 읊었다는 대풍가 시액이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맨다. 대풍가는 한글과 한문 버전이 따로 걸려있다. 시문의 내용을 중얼거
리듯 읊으며 누각 난간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그리 차갑지 않은 겨울바람을 즐겨본다.


▲  대풍가 한문버전

▲  대풍가 한글버전

집안 종족들과 회포를 풀며 술에 거하게 취한 이성계가 어떤 태도로 저 시를 읊었는지 가히 상
상이 간다. 으뜸석에 앉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종족과 부하장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황제
가 된 양 가슴을 크게 피며 거만하게 대풍가를 읊었을 것이다. 종족과 부하장수는 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을 것이고, 그 광경에 속이 단단히 뒤틀린 정몽주는 술잔을 상에 쾅 내려놓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예로부터 전주의 중심부인 풍남동(豊南洞)과 교동(校洞) 일대에 넓게 조성된 전주한옥마을은 서
울의 북촌(北村)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2곳 밖에 없는 대규모 한옥밀집지역이다. 전주시의 꾸준
한 홍보와 정비사업으로 전주의 대표적인 명소로 부상하여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온다.


전주한옥마을은 총면적이 76,320평에 이르며, 약 900여 채의 전통한옥이 모여있다. 대부분이 왜
정(倭政) 이후에 지어진 한옥으로 100년 이상 된 집은 거의 없다. 이곳에 기와집이 많이 뿌리를
내린 것은 왜정이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던 전주성(全州城)을 말끔히 부시고 도로를 뚫으면서
성 밖에 사던 왜인들이 성 안으로 마구잡이로 기어들어와 물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전주 사람들은 전주를 지키고자 너도나도 한옥을 지어 살면서 거대한 한옥마
을이 된 것이며, 왜정 때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향수가 진하게 서린 고풍(古風
)스러움을 선물하고 있다. 몇몇 한옥은 북촌의 한옥처럼 문화공간이나 공예관, 찻집, 식당, 민
박집이나 한옥체험장, 전통체험관 등으로 탈바꿈하여 나그네의 호기심을 부드럽게 자극시킨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한옥마을 동쪽
(공예품전시관과 한지관 등이 정면에 보인다)

▲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는 구름다리 (오목교)

▲  오목교 건너편에 바라본 오목교와 오목대

오목대 동쪽에는 남원(南原)으로 달리는 17번 국도(기린로)가 뚫려있다. 전주 도심을 우회하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수레의 굉음이 귀를 진하게 때려댄다. 길 건너편 동쪽에는
이목대가 있는데, 도로 위에 육교 같은 다리를 놓아 오목대와 이목대를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이름은 '오목교'로 '구름다리'라고도 불린다. 겉으로 보면 도로로 단절된 양쪽을 이어주는 육교
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이 다리에도 깊은 사연이 깃들여져 있다.

원래 오목대와 이목대는 하나의 언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왜정이 1931년 전라선(全羅
線) 철도를 내면서 오목대와 이목대를 잇던 산줄기를 싹둑 끊어버렸다. 전라선이 개통된 이후,
이곳에서는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열차가 이곳만 지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무임승차로 열차에서 뛰어내린 사람
이 많았다고 한다.
혈맥(血脈)의 단절로 기차의 속도로 느려진다고 여긴 전주 유림들은 오목대와 이목대를 연결시
켜야 된다고 민원을 넣어 1960년경에 오목교를 설치했는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기차의 속도
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전라선이 동쪽으로 이설되면서 오목교는 철거되고, 옛 전라선 자리에 기린로가 놓이면
서 1987년 지금의 오목교를 만들었다. 오목교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승암산(僧巖山)의 산줄
기가 단절되어 사고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  오목대를 마주보는 이목대(梨木臺)

오목교 구름다리를 건너면 이목대라 불리는 비각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은 오목대와 마찬가지
로 비석과 그것을 품에 안은 비각이 전부이다. 오목대가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면 이목대는 배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던 언덕이었다. 그래서 이목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목대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의 유허(遺墟)로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 시절부터 후손들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이안사는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고려를 등지
고 원나라 땅인 함경도(咸鏡道)로 넘어가 새롭게 터를 일구었다. 태조는 그를 목조(穆祖)라 추
존했으며, 1900년 고종 황제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碑文)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
)'라 쓰여 있다. 비문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완산지(完山誌)'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몇가지 설화가 적혀있는데,
그는 발산(鉢山) 남쪽 장군수(將軍樹)란 나무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바로 이목대라고 한다. 아마도 집 앞에서 그 흔한 전쟁놀이를 했던
모양이다. 또한 호운암(虎隕岩) 설화도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각에 제대로 갇힌 듯 답답해 보이는 이목대 비석

어느날 이안사는 애들을 이끌고 병풍리 좁은목에 놀러 갔다가 비를 만났다. 그들은 급히 근처에
있는 바위굴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랑이 1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났다.
호랑이는 당장이라도 덮칠 기세로 으르렁거려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애들은 무서움에 질질 짜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안사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호랑이가 한꺼번에 우리를 물지를 못할 것이다. 기껏 해봐야 한 사람 밖
에는 물어가지 못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 웃옷을 벗어 던져서 호랑이가 무는 옷의 주인이 모두
를 대신해서 호랑이한테 가도록 하자'
그 말을 들은 애들은 더욱 겁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가운데 형이 제일 나이가 많으니 형부터 던져봐요~'
'좋아. 내가 먼저 던질테니 호랑이가 내 옷을 받아 물면 내가 흔쾌히 호랑이한테 가겠다'
그러면서 웃옷을 벗어 호랑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호랑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옷을 덥석
물고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안사는 속으로 '아오 젠장~~'을 수없이 중얼거리며 약속대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눈을 감으며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나갔다.
굴 밖으로 나가니 갑자기 천둥이 콰당치면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호랑이는 보이
지 않고, 굴은 무너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는 살고 나머지 애들은 굴에 갇
혀 죽은 것이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기(王氣)가 깃들여져 산신령이 호랑이로 변해 그를 살려낸 것이
라 여겼다. 이 설화는 태조 이후에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차원에서 생겨나거나 윤색
된 설화일 뿐이다. 태조 왕건에게도 이와 비슷한 설화가 있으니 제왕에게는 꼭 갖춰야 될 설화
인 모양이다.
이목대는 오목대와 한덩어리로 묶여 전북 지방기념물 16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오목대, 이목대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① 서울과 주요 지역에서 전주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15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고양, 의정부, 인천, 부천, 안양, 수원, 안산, 대전(유성, 서대전), 군산, 광주, 순천, 대구
  (서부). 울산, 부산, 창원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익산, 용산행 전라선 열차 이용
② 전주 현지 교통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남부시장이나 풍남문을 경유하
  는 시내버스를 타고 전동성당(한옥마을) 하차. 이들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는 물 흐르듯 빈번하
  게 다니므로 교통은 편하다. 전동성당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가면 풍남
  문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태조로(太祖路)로 진입하여 7분 정도를 가면
  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 언덕 정상에 바로 오목대가 있다.
* 전주역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병무청 방면 시내버스로 병무청
  에서 하차하여 기린로를 따라 남쪽으로 도보 15분
* 금암광장에서 429번(1일 12회), 486번(1일 18회) 시내버스를 타면 오목대 앞까지 간다. 허나
  차가 별로 없고, 전주교대와 좁은목으로 삥 돌아서 가므로 교통편이 좋은 전동성당에서 내려
  걷는 것이 속 편하다.
* 오목대에서 전주한옥마을과 반대방향(동쪽)을 보면 기린로란 큰 도로가 있다. 도로 위에 걸린
  오목교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이목대 비각이다.
③ 승용차
* 호남고속도로 → 순천~완주고속도로 → 동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전주 방면 → 인후동(모래내)
  → 기린로 → 오목대
* 호남고속도로 → 전주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조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기린로 직진 → 
  오목대
* 오목대 부근 주차장소는 공예품전시관이나 한벽당 부근 전통문화센터에 하면 된다.
* 관람료 없음 / 관람시간 제한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  전주8경의 한 곳, 한벽청연(寒碧晴烟)의 현장
한벽당(寒碧堂)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5호

한벽당은 전주천변 가파른 바위에 터를 닦아 들어앉은 정자로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
晴烟)의 현장이다. 
승암산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전주천을 뜰로 삼은 이곳은 1404년 월당 최담(月塘 崔霮)
이 낙향하여 지은 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달의 연못이란 뜻에 월당루(月塘樓)라 하
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벽당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후대 사람이 '벽옥한류(碧
玉寒流)'란 시귀에서 '한벽(寒碧)' 2글자를 따와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
모의 팔작지붕 정자로 동쪽에 따로 별채를 두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주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명승지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구름처럼 찾아들
던 곳이다. 또한 상관계곡의 물줄기와 의암, 은석 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 한벽당
앞으로 흐르는데, 옛 사람들은 그 정경이 마치 벽옥한류와 같다고 시를 지었으며,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8경의 으뜸으로 삼았다.

바위 위에 교묘히 둥지를 틀어 전주천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히 단아함 그 자체이나, 1931
년 뒤쪽 바위에 전라선 철마가 땅굴을 파고 달리면서부터 운치가 서서히 녹슬기 시작했다. 전라
선은 그나마 훨씬 동쪽으로 이설되어 더 이상 시끄러운 기적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정자 바로 앞에 기린로란 넓은 신작로가 생기면서 그림 같은 풍경은 많이 손상되어 버
렸다. 비록 정자를 비롯하여 주변 숲과 바위는 온전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라는 4발 달린 수
레들이 그 옆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나가니 예전의 시를 읊고 낮잠을 즐기던 그 고즈넉한
분위기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린 것 같다.


▲  승암산 서쪽 바위에 또아리를 튼 한벽당

한벽당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 바로 옆에 있고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바로 다리 밑에 있다.
허나 한벽교에서는 보기와는 달리 그곳으로 가는 길이 없어 접근이 불가하고 무조건 전주천 산
책로로 내려가야 된다. (이목대와 다리 중간에 옛 전라선 터널을 이용하거나 한벽교 북단 서쪽
으로 내려가면 됨)

한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한벽교 바로 밑에 있어 운치가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위를 의지하며
베풀어진 돌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의 한벽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정자
안으로 발을 들일 때는 신발을 섬돌에 두고 맨발로 들어서야 되며, 내부에는 시인,묵객들이 걸
어놓은 현판들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이경전(), 이경여(
),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문인들이 한벽당에 올라 지은 시문이 전해
오고 있어 당시의 풍류를 느끼게 한다.

누각에 앉아 전주천을 중심으로 좁게 보이는 천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소리라곤 17번 국
도를 질주하는 수레들의 요란한 굉음들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어찌 옛날처럼 차분하게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겠는가..? 문명의 이기에 희생된 한벽당의 풍경은 서울 세검정(洗劍亭)과 다를
것이 없다. (서울 세검정 관련 답사기 ☞ 보러가기)

▲  별채를 좌측에 품은 한벽당 전경

▲  한벽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계단 바로 위가 기린로가 지나는 한벽교이다.


▲  한벽당 기적비(紀蹟碑)
한벽당의 내력을 소상히 적은 비석이다.

▲  전주천 산책로에서 쳐다본 한벽당
나는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90도로 그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지만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굽어보며 전주천과 나그네를 바라본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현판
필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한벽당 3글자, 누구의 글씨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한벽당에는 내부에도 정자의 이름을 알리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  한벽당 내부에 걸린 여러 시액(詩額)들
한벽당을 침이 마르도록 예찬하는 옛 사람들의 시문들
시문의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깨알같은 글씨가 무수히 담긴 한벽당 중수기(重修記)

▲  어여쁜 꽃단청이 그려진 한벽당 천정

샹들리에가 아름답다 한들 저 천정에 그려진 화사한 꽃그림만 할까? 굳이 불을 밝히는 등이 없
어도 앙증맞게 피어난 꽃잎으로 한밤에도 환할 것 같다. 거기에 전주천에 뜬 달님까지 한벽루
를 비추며 조명을 자처하니 굳이 현대식 조명시설은 필요없을 것이다.


▲  한벽당 밑 바위에 진하게 새겨진 바위글씨
○화담(?花潭)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도'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음

▲  한벽당 바로 앞을 지나는 전주~남원 17번 국도 (기린로)

▲  기적소리의 추억이 서린 옛 전라선 터널
한벽당 뒤쪽에는 옛 전라선 열차가 지나다니던 터널이 남아 있다. 열차의 기적소리와
굉음이 아련하게 들려올 것 같은 이 터널은 전라선이 시내 외곽으로 이전된 이후
사람들만 통행하고 있다. 수레는 통행 불가

▲  겨울에 잠긴 전주의 젖줄 전주천

전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전주천은 겨울제국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을 죽여 봄을 잉태하고
있다.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오면 거추장스러운 얼음과 눈을 박차며 눈을 깰 것이다.

◀  전라선 옛 터널 앞에 있는 월당 선생 찬시
비(讚詩碑)
한벽당을 세운 최담 선생의 찬시비이다. 최담
은 조선개국공신으로 1402년 전주로 낙향하여
별장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한벽당은 그의 작
품이다.

한벽당 찾아가기 (2012년 1월 기준)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429, 486번 시내버스를 타고 한벽당 하차, 허나 배차간격
  이 무지 길다. (429번은 1일 12회, 486번은 1일 18회 운행)
* 전주역, 전주고속터미널,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빈번하게 다니는 남부시장, 교도
  소, 상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하차, 버스에서 내려 왼쪽으로 걸으면 바로 전주천
  과 싸전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둑방길을 15분 정도 걸으면 한벽교를 지나서 한벽당이 모
  습을 비춘다. 가는 중에 전주향교와 동헌(東軒), 강암서예관이 있으며, 전주향교를 지나면 전
  주의 별미(別味)인 오모가리탕을 취급하는 주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전주시외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725, 752, 782, 78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좁은목 하차, 좁
  은목4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전주천 다리(한벽교)를 건너면 한벽당이 보인다.
* 주차는 전통문화센터를 이용하면 된다. (오목대 부근의 공예품전시장도 괜찮음)
* 오목대에서 이목대를 거쳐 남쪽으로 도보 10분 거리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