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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영조 가계도(1694-1776)

왕토끼 (秋岩) 2011. 6. 3. 21:27

제21대 영조 가계도 

숙종 - 숙빈 최씨

제 21대 영조

차남 : 연잉군(1694-1776)

재위기간 : 1724.8-1776.3(51년 7개월)

부인 : 6명 / 자녀 : 2남 7녀

1부인

정성왕후 서씨

자식없음

2부인

정순왕후 김씨

자식없음

3부인

정빈 이씨

1남1녀

4부인

영빈 이씨

1남3녀

5부인

귀인 조씨

1녀

6부인

숙의문씨(폐)

2녀

 

 

 

 

진종(효장세자

화순옹주

장조(사도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령옹주

화길옹주

 money.gif 주요 정치사

         1.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

         2. '이인좌'의 난

         3. 실학의 선구자들 :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 / 새 하늘을 연 홍대용

         4. [영조실록] 편찬

  money.gif 역사 개요

▣ 영조 (英祖)

  휘(諱) 금(昑). 자 광숙(光叔). 숙종이 양성(養性)이라는 헌호(軒號)를 내렸다.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延燥君)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04년(숙종 30) 20세 때 맞은 군수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첫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이고, 1757년(영조 33) 왕후의 승하로 1759년에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정언 이정소(李廷積)가 왕이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 발의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 중추부영사 이이명(李燎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들이 인원왕후(仁元王后)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측은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필두로 시기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신축옥사).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남인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임인옥사). 옥안(獄案)에는 왕세제도 혐의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 왕세제가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여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당습(黨習)의 폐해를 하교(下敎)하는 한편,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축출, 노론을 불러들이는 조치를 내렸다(을사처분). 그러나 노론 내 강경파인 준론자(峻論者)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에 이들을 축출하였다. 이 무렵 그는 붕당이 아니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 ·순의 시대처럼 탕탕평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9년에는 노론 ·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 즉 완론자(緩論者)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기유처분). 이 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1728년에 소론 ·남인 등의 일부 과격한 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것이 이러한 새로운 체제 확립의 결단을 더 앞당겨 주었으며 탕평정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1741년에 이조전랑(吏曹銓郞) 통청법(通淸法)을 혁파하였다. 이조전랑이 삼사(三司)의 언관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제도는 언관들의 언론권을 대신들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키면서 활성화하는 의도 아래 시작되어 붕당정치의 맥점을 이루던 것이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자파 세력강화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어 붕당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혁파조치가 불가피하였다.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조는 학식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특히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1758년에 성균관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대학》에 〈어제서(御製序)〉를 붙였다. 1746년에 《자성편(自省編)》을 지은 것을 비롯해 《정훈(政訓)》(1749) 《대훈(大訓)》(1755) 《경세문답(警世問答)》(1762) 《경세편(警世編)》(1764) 《표의록(表義錄)》(1764) 《백행록(百行錄)》(1765)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야 할 길을 밝히는 저술들을 다수 남겼다.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요 ·순의 치세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탕평정치는 민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들을 고치는 개혁적 조치들을 많이 단행했다. 먼저 양반관리, 사족들이 백성들에 대해 사형(私刑)을 많이 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형정을 쇄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1725년에 압슬형(壓膝刑), 1732년에 낙형(烙刑)을 각각 폐지하고, 1740년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刺字]을 금지하였다. 1743년에 《수교집록(受敎輯錄)》을 속편하고 이듬해에 이를 발전시켜 《속대전(續大典)》을 《속오례의(續五禮儀)》와 함께 편찬한 것은 왕조의 법치체계 전반을 재정비하는 의미를 가졌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였으며, 이듬해는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734년에 농정의 기본방향을 잡기 위해 세종조에 민을 이끌어 농사에 힘쓰게 한 성의를 관리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농가집성(農家集成)》을 대량 인쇄하여 보급하고, 1748년에는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고, 1750년 7월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양역 변통의 논의를 종결지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양역(군역)조의 납포량을 일률적으로 1필을 감하고 어염세 ·결전세(結田稅) 등을 부과해 결손을 채우게 했다. 1774년에 노비 신공(身貢)을 전면 혁파한 것도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되었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濬川), 즉 청개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 때 범람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흙을 파내는 대역사를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변란시 도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하지 않고 도성민과 함께 지킨다는 전략을 새로 세워 1745년에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하고 1751년 9월에 수성윤음(守城綸音)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왕조 초기의 5위(五衛)제도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1742년에 《병장도설(兵將圖說)》을 편찬한 이래, 5군영의 병권을 병조판서 아래로 귀일시켜 왕권을 뒷받침하도록 하는 체제를 꾀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 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같은 해 2월 세손의 건의를 받아들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1740년에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운 것을 비롯해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크게 벌였으며 1771년 10월에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 사실을 깨닫고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게 했다.

  1770년 정월 편집청(編輯廳)을 설치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상위고(象緯考) 편찬 단계에서(4월) 세종조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하는 한편, 양도(兩都)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尺寸)을 재서 보고하게 했다. 학교고(學校考)를 편찬하는 순서(6월)에서는 주(州) ·부(府) ·군(郡) ·학에 6현(賢)을 함께 배향하게 하고, 형고(刑考)를 만드는 순서에서는 포도청에서의 난장(亂杖)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의 편찬사업의 목적이 정사의 개선에 있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탕평정책으로 붕당의 대립과 벌열의 발호를 크게 억제하였으나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있었다. 1755년에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귀양간 윤지(尹志) 등이 나주 괘서사건을 일으켜 정국이 소용돌이쳤으며, 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