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陜川 海印寺를 踏査하고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1. 18. 09:52

 

 

* 陜川 海印寺를 踏査하고 !

* 槪      要.

1. 海印寺 創建의 참뜻은 海印이라는 낱말에 應集되어 있다. 海印이라는 말은 華嚴經의 海印三昧에서 비롯된 것으로 海印三昧는 一心法系의 世界를 가리키는 말이며 부처님 正覺의 世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世界 眞實된 知慧의 눈으로 바라본 世界 客觀的인 思想의 世界이니 바로 永遠한 眞理의 世界이다. 海印三昧는 또한 汚染됨이 없는 淸淨無垢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明鏡止水의 境地에 이르러 맑고 透明해서 있는 그대로의 世界가 그대로 비치는 世界를 가리키는 말이다. 佛寶 寺刹 通度寺 · 法寶 寺刹 海印寺 · 僧寶 寺刹 松光寺이다.

 

2. 이러한 모습을 한 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譬喩)되어 거친 파도 우리들 마음의 煩惱妄想이 비로소 멈출 때 宇宙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境地를 海印三昧라 하였다. 이러한 如實한 世界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衆生의 本 모습이니 이것이 곧 海印三昧의 가르침이다.

 

* 歷史와 文化財 .

 

1. 海印寺의 文化財는 1995年 世界文化遺産으로 指定된 國寶 52號 海印寺 藏經板殿과 江華島 선원사(禪源寺)에서 朝鮮 太祖7年에 옮겨진 國寶 32號 八萬大藏經, 寶物 第128號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寶物 264號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寶物 第518號 원당암 多層石塔 및 石燈이 있다.

2. 陜川 海印寺 장경판전(陜川 海印寺 藏經板殿)은 國寶 第52號로, 海印寺에 딸린 建物의 하나이다. 朝鮮 初期의 建築物로 南쪽의 것을 수다라전(修多羅殿), 北쪽의 것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는데 여기에 高麗 大藏經板을 保管하고 있다. 그 앞 두 동의 小黨에는 보판(補板)과 잡판(雜板)을 所藏하고 있다. 1995年 12月 UNESCO 世界文化遺産으로 登錄되었다.

 

3. 陜川 海印寺 毘盧遮那佛坐像은 國內 最古의 木造佛像이다. 1200年 된 쌍둥이 毘盧遮那佛坐像으로서, 833年에 製作된 新羅 木造 佛像이다. 그동안 八萬大藏經 殿閣의 法寶展에 모셔져 있던 佛像인데, 2005年 6月에 새로 金漆을 하던 過程에서 833年에 製作되었다는 記錄이 發見되었다. 이를 보기 위해 노무현 大統領이 2005年에 房門했으며 大統領이 約束한 特別支援金 30餘 億圓으로 毘盧遮那佛坐像 永久保存事業을 벌여왔으며 2年餘 만에 마무리됐다. 대 毘盧殿의 落成式에 다시 노무현 大統領이 參席하였다.

 

4. 韓國 戰爭과 海印寺는 光復 後 韓國戰爭 때 危機를 맞게 된다. 1951年 9月 仁川上陸作戰 以後 大韓民國으로 戰勢가 逆轉되면서 退却하지 못하고 남은 1千餘 名의 北韓軍 殘黨들이 海印寺를 中心으로 Guerrilla戰을 全開했다. 이에 UN軍에서는 爆擊機 4대로 海印寺를 爆擊하라는 命令을 내렸으나 當時 空軍 編隊長이었던 김영환 操縱士는 海印寺와 八萬大藏經이 燒失될 것을 우려해 命令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서 海印寺는 爆擊당할 危機를 넘기게 되었다. 現在 海印寺 境內에는 그를 기리는 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5. 歷史的으로 南北國 시대 新羅 哀莊王 3年(802年)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創建했다. 그들은 伽倻山에 草幕을 세우고 參禪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哀莊王의 王妃의 病을 낫게 해주어 哀莊王이 절을 創建하도록 했다. 順應과 利貞 以後 결언대덕(決言大德)이란 僧侶가 寺刹 創建을 繼續했고 住持(方丈)가 되었다. 918年에는 僧統 희랑(僧統希朗)이라는 當時 海印寺 住持가 高麗를 도와준 데 대한 報答으로 高麗 太祖가 국찰(國刹)로 삼았다. 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속장경(續藏經)의 刊行을 試圖한 곳이다.

 

6. 海印寺는 5次例가 넘는 火災로 인해 여러 번 重創되었으며, 그에 따라 創建 當時의 建築은 알 수 없고, 現在의 殿閣은 大部分 朝鮮 末期 때의 것이며, 3層 石塔·石燈 等이 現存한다. 朝鮮 成宗 12年(1481年) 以後 8年間 重建하였고, 朝鮮 初期의 代表的인 建築物로서 國寶로 指定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에는 有名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保管되어 있다. 海印寺는 1993年에 성철 스님이 入寂한 곳이기도 하다.

 

7.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伽倻山海印寺古蹟]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弟子인 순응(順應)이 766年(惠恭王 2) 中國에 건너가서 法을 傳受받고 歸國한 뒤 802年(哀莊王 3) 伽倻山에 海印寺를 創建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完成했다고 한다. 그러나 三國遺事에는 676年(文武王 16) 의상(義湘)이 浮石寺를 創建하고 곧 海印寺·華嚴寺·梵魚寺 等 華嚴10刹(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創建年代가 分明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由來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順應 역시 義湘의 孫 弟子였다는 事實 等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根本으로 하여 이루어진 華嚴의 大 度量이었음을 알 수 있다.

 

8. 高麗時代에는 高麗 太祖를 도와 後百濟를 滅亡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法師가 太祖가 獻納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重建하고, 이곳에서 華嚴思想을 크게 펼친 것으로 有名하다. 1398年(太祖 7) 江華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高麗大藏經을 海印寺로 옮겨옴으로써 護國寺刹의 中心地가 되었다. 1483年(成宗 14) 世祖의 妃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海印寺를 重建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9. 1488년 德宗의 妃인 仁粹王妃와 睿宗의 繼妃인 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命해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重建했으며 또 3年間에 걸쳐 大寂光殿을 비롯하여 法堂·寮舍 等 160여 칸을 새로 建立했다. 1695年(肅宗 21) 火災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等 여러 요사채(寮舍寨)가 燒失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等 나머지 寮舍寨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重建했다. 그 뒤에도 끊임없는 火災로 大部分의 建物들이 燒失되었다가 다시 重建되는 過程을 겪었지만, 大藏經版殿(國寶 제52호)만은 被害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保存되어왔다.

 

10. 이밖에도 大覺國師 義天, 四溟大師 等과 같은 高僧이나 崔致遠·이거인(李居仁)·金正喜·정인홍(鄭仁弘) 等 歷代 名人들이 한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現在 남아 있는 建物로는 大寂光殿(慶尙南道 有形文化財 第256號)을 비롯하여 명부전·응진전·삼성각·조사전·퇴설당(堆雪堂)·음향각·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 等이 있으나 大部分 近來에 세워진 것이다. 重要文化財로는 高麗大藏經板(國寶 第32號)·石佛立像(寶物 第264號)·원당암다층석탑(寶物 제518호)·고려각판(國寶 第206號 寶物 第734號)·반야사원경왕사비(寶物 제128호) 等이 傳해지고 있다. 또한 海印寺銅鐘을 비롯해 文化財로 指定되지 않은 수많은 遺物들이 海印寺博物館에 所藏되어 있다.

 

11. 高麗 高宗代에 板刻되어 現在 海印寺에 所藏되어 있는 八萬大藏經 經板 海印寺 장경각 內部에 진열된 國寶 第32號로 木版本은 1,516種에 6,815권으로 總 8萬 1,258매인데 이 가운데 後代에 板刻된 15種의 文獻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侵入으로 燒失된 뒤 1236年(高宗 23) 當時의 首都였던 江華에서 始作하여 1251年 9月에 完成되었다.

 

12. 이 事業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主管했으며, 濟州道·莞島·巨濟島 等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材料로 使用했는데 腐敗를 防止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充分히 말려 使用했다. 이 大藏經은 朝鮮 初期까지 江華島 선원사(禪源寺)에 保管되어 있었는데 海印寺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確實하지 않다. 現在 1398年(太祖 7)에 옮겼을 것이라는 學說이 가장 有力하며 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이때 2,000名의 軍人들이 護送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僧侶들이 讀經했다 라고 한다.

  

* 八萬大藏經의 特殊性.

 

1. 첫째, 思想的인 것으로 國土가 유린(蹂躪)된 狀況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通해 經典을 守護한 호법적(護法的) 性格을 띠었다는 것이다(護國信仰).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은 이 大藏經粗造의 思想的 意義를 天命한 글로 몽골을 野蠻示하고 文化的 矜持를 드러내고 있다.

 

2. 둘째, 經濟的인 것으로 大藏經의 역사(役事)에 대한 莫大한 經費를 政府가 負擔하므로 國民에 대한 再 投資的인 面이 考慮되었다는 것이다.

 

3. 셋째, 內容的인 것으로 科學的인 配列과 嚴格한 資料蒐集으로 定評이 나 있는 것이다. 高麗大藏經 以後에 編輯된 中國板 빙가장경, 日本板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等은 모두 이것을 模本으로 하여 板刻된 것이다.

 

4. 八萬大藏經은 現存하는 漢文 大藏經의 完璧한 淵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