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동거’한 중국인 처녀뱃사공 주애보
[기획-백범 60주기] 2009/05/10 09:09 정운현
하련생이 펴낸 <선월> 표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는 거금 60만원(현 시가 약 200억원)이라는 현상금을 내걸고 ‘배후세력’이랄 수 있는 백범 검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의거 직후 백범은 미국인 피치 박사 집에 잠시 몸을 피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집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백범은 일단 어디론가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범과 임시정부는 26여년을 중국땅에 체류했는데, 이 시기의 절반 정도(1919~1932)를 상해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이제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2년 5월 상해를 탈출한 백범이 처음 도착한 곳은 인근 가흥(嘉興)의 수륜사창(秀綸紗廠)이었습니다. 중국인 저보성(?輔成, 당시 상해 법과대학 총장)의 도움으로 백범은 이곳에서 중국인 ‘장진구’ 혹은 ‘장진’으로 행세하며 숨어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곳까지도 일경이 나타나 백범의 흔적을 수소문하고 다니자 백범은 인근의 해염과 항주를 오가며 몸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백범의 서툰 중국말과 ‘남자 홀몸’이라는 게 몸을 숨기기엔 좋지 않은 여건이었습니다. 일단 타지사람인 광동인으로 행세를 하고 지내긴 했지만 늘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중국인처럼 보일 수 있는 뭔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가흥에서 중국인 '장진구'로 행세하며 피신
이무렵 백범은 주애보(朱愛寶, 중국명 주아이빠오)라는 처녀뱃사공이 젖는 작은 배를 타고 인근 운하를 다니며 농촌 이곳저곳을 다니며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대로변에 있는 군대 훈련장에 구경을 갔다가 한 군관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하자 ‘광동인’이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군관이 광동인이어서 신분이 들통 나 보안대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백범은 은신처를 제공해준 중국인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鳳章)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봉장이 백범에게 완벽한 신분위장을 위한 방안으로 결혼을 제안하였습니다.
백범이 피신해 있던 가흥의 수륜사창. 상단부 글씨는 백범의 친필이다.
저봉장은 백범에게 자신의 친구 중에 서른 가까이 된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한 사람 있다며 그녀와 결혼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좋은 피신방법일 수 있다면서요. 그러나 백범은 저봉장의 이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유식한 중학교 교원이라면 바로 나의 비밀이 탄로날 것이오. 차라리 여사공(주애보)에게 부탁하는 편이 낫겠소. 주애보 같은 일자무식이면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백범과 주애보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백범은 57세, 주애보는 20세로, 두 사람이 정식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선상(船上)에서 두 사람이 동거생활을 하였으니 ‘사실상 부부’였고 백범 역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백범은 가흥에 피신해 있으면서도 박찬익, 엄항섭, 안공근(안중근 의사 둘째동생) 등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장개석과의 면담을 갖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36년 2월 백범은 가흥을 떠나 남경으로 옮겨와 있었는데, 거기서도 신변의 안전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백범이 남경으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암살대를 보낸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결국 가흥에 남겨두고 온 주애보를 데리고 와서는 방을 하나 얻어서 살면서 ‘고물상’으로 신분을 위장했습니다. 더러 경찰이 호구조사를 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애보가 먼저 나서서 답변을 하고 백범은 말하는 것을 삼갔습니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개전 초기 중국의 대일항전은 기세가 대단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리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일본군의 남경 폭격이 날로 심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도 일본군의 폭격이 심해 잠을 못 이루다가 공습해제 후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갑자기 공중에서 기관포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 방밖으로 나서는데, 벼락치는 소리가 나면서 천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만약 그 때 나가지 않았다면 천정에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뒷방에서 자고 있던 주애보도 다행히 무사하였습니다.
가흥에서 백범과 부부로 위장하여 5년간 동거했던 주애보
'뒷날' 기약하여 남경에서 주애보와 이별
남경의 상황이 위험해지자 중국정부는 중경(重慶)으로 전시수도를 정하고 정부기관을 하나씩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임시정부와 대가족 100여 명은 일단 호남성 장사(長沙)로 옮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상해, 항주 등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여비를 보내 일단 남경에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100여 명이나 되는 대식구를 이끌고 호남성 장사로 향한 데는 백범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곡식 값이 싼데다 홍콩을 통하여 해외로 계속 통신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경을 출발하면서 백범은 주애보와 이별했습니다. 영영 이별이 아니라 피난지에서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잠시 고향집에 가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백범은 분명 ‘뒷날’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백범일지>에서 관련 대목을 보면,
“남경을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本鄕)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부부같이(類似夫婦)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이후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광복이 되자 백범은 중경에서 상해를 거쳐 귀국하였으나 가흥에 들러 주애보를 만나볼 상황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환국하여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숨을 거뒀습니다. 이후로 백범과 주애보의 이야기는 세인들에게 잊혀진 채 하나의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년 전 우리 관계당국과 백범 후손들이 가흥 피난처를 기념관으로 꾸미기 위해 가흥을 더러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주애보의 행적을 수소문했다거나 또는 그녀의 유족들을 찾아가 감사인사를 전했다는 얘길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분명 배은망덕한 처사입니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현재로 치면 대통령이랄 수 있는 백범을 5년간 정성으로 봉양(혹은 보좌)했고, 백범 스스로 <백범일지>에서 '공로'가 있다고 기록한 인물이라면, 이건 훈장을 주고도 남을 공적이 아닐까요?
(*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주애보가 이미 사망한 것은 분명하나 백범과 이별한 후의 행적, 사망한 때와 장소 등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소설 <선월>의 마지막은 어떻게 대미를 장식할까요? 주애보는 남경에서 백범과 헤어진 후 백범과의 재회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주애보 역시 백범이 느꼈던 ‘유사부부’와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1949년 겨울 우연히 백범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주애보는 5년 가까이 부부처럼 지낸 백범이 피살됐다는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가 없었습니다. 주애보는 “아니야. 나는 믿을 수 없어!”라고 외치고는 백범과 배를 타고 선상생활을 했던 바로 그 강물에 배를 띄웠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당시 나이 37세였던 주애보. 그녀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백범과의 인연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백범과 주애보가 선상 동거를 했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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