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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도시 서울의 수돗물 역사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8. 9. 21:48

근대도시 서울의 수돗물 역사
2010-07-09 오후 03:40




우리나라의 근대적 수도사업

2007년 초, 야구인들이 화가 났다. 서울시는 당시에 ‘디자인 서울’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업 중의 하나는 노후 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디자인센터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동대문운동장은 비록 오래되고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운동장이지만 우리나라 야구역사의 산 증인이었고 전국 고교야구대회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중요한 야구 경기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당연히 야구인들은 한국야구위원회를 중심으로 강하게 항의를 하였다. 서울시는 2007년 3월 동대문야구장을 철거하는 대신 새로운 야구장을 구로구 고척동에 건설하고, 구의정수장 등 4곳에 간이 야구장을 짓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한국야구위원회와 체결했다. 이어 서울시는 2007년 7월 초에 도시계획위원회를 개최하여 구의정수장 제1, 2공장부지 4만 8717㎡ 가운데 3만 9289㎡를 체육시설로 변경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도인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구의정수장 제1, 2공장이 간이야구장 부지로 지목되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구의정수장은 모두 4개의 공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제1, 2공장은 비록 시설용량도 크지 않고, 낡아서 운전을 멈춘 시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100년 수도사의 증인이었다. 우리나라에 상수도 또는 하수도는 신라시대의 안압지나 백제 사비왕궁 터에서도 흔적이 발굴되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근대적 의미에서의 수도는 1908년 9월에 개통한 뚝섬정수장 제1공장을 공식적으로 최초의 수도로 인정하고 있다. 당시 경성에서 전차사업을 하던 미국인 H.R. Bostwick과 H. Collbran이 1903년에 대한제국으로부터 수도사업의 특허권을 받아내었으며, 1905년에 영국인이 설립한 조선수도회사(Korean Waterworks Co.)에 양도하였다. 조선수도회사는 1908년 8월 31일에 12,500 ㎥/일 규모의 완속여과 정수장을 준공하였으며, 1908년 9월 1일부터 경성주민 약 122,500명에게 급수하였고, 우리나라의 근대적 수도 사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1922년에 뚝섬에 제2공장이 건설되었으나 늘어나는 급수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1936년에는 경성 근교 구의리에 수도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이 때 건설된 것이 구의정수장 제1공장이다. 구의정수장 제1공장은 급속여과지로 건설되었는데 1922년에 뚝도 제2공장에 처음으로 급속여과지를 도입한 후로 두 번째로 도입되는 급속여과시설이었다. 그러나 뚝섬의 제2공장이 이미 원형이 훼손되어 사라졌으므로 구의 제1공장은 급속여과시설로서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시설인 셈이다. 구의정수장 제2공장은 한국전쟁 이후 급증하는 서울시의 수돗물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1959년에 미국 공병단의 지원 하에 건설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던 급속응집침전기를 도입하여 설치하였다.

 


100년 수도 역사의 산실 구의정수장   

이런 역사적 건물과 시설들이 정식 야구장도 아닌 간이야구장을 만들기 위하여 파헤쳐지고 철거되어 영영 사라진다는 것은 서울시민 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화재의 망실이라고 할 만 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한상하수도학회, 한국물환경학회, 서울시 수질평가위원회 그리고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가 힘을 합하여 서울시에 재고를 건의하였고, 문화재청에는 구의정수장 제1, 2공장의 의미를 들어 등록문화재로 신청하게 되었다. 물론 간단하고 쉬운 과정은 결코 아니었지만 여러 방면을 통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고, 문화재청의 문화재에 대한 적극적인 보존의사로 인하여 구의정수장 제1, 2공장은 2007년 10월 22일에 등록문화재 제358호로 등재되었다. 서울시도 구의정수장 제1공장의 약품동과 침전지 1지 및 여과동 일부와 제2공장의 급속침전지를 보존하고, 여타 침전지는 매립한 후에 상부에 간이정수장을 최대한 축소하여 건설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였다. 이는 소유자의 자발점 보존의지를 근간으로하여 활용과 보존의 조화를 꾀하는 등록문화재제도의 취지에 다라, 방문객도 없이 썰렁하게 보존된 문화재보다는 간이야구장을 허용하여 야구장 관람객들이 구의정수장 제1, 2공장의 흔적을 가까이서 보고 우리나라 수도사업의 흔적을 느끼고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수도전문가들의 의견도 감안되었다. 또한 지중구조물은 철거된 것이 아니고 매립된 것이므로 명백하게 필요할 경우에는 다시 복구할 수 있도록 조치되었다.



보존된 구의 제1공장의 약품동은 정수에 필요한 약품을 보관하고 물에 투입하던 붉은 벽돌 조적의 2층 건물로서 1층은 벽돌이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2층은 흰색 회벽칠을 하였고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가로 세로 비율의 창이 가지런히 나 있어 보기에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약품동 앞에 펼쳐진 침전지는 약품을 투입하여 물속의 이물질들을 뭉쳐서 가라앉히던 구조물로서 지금은 볼 수 없는 중간정류벽이 조적조로 구축되어있다. 여과지동 역시 독특한 창호를 가진 흰색 회벽칠의 조적건물로서 내부에서는 급속여과지의 일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여과지의 대부분은 여과지동 옆에 펼쳐진 잔디로 상부가 덮혀있어서 현재의 여과지와 다른 초기시대의 여과지 건설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1959년에 건설된 구의정수장 제2공장의 급속응집침전지는 정수장의 부지면적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당시의 미국 최신기술로서 미 공병단(US Corps of Army)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어 현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신기술이었겠지만 실제로는 운전에 다소 어려움이 있어 오랫동안 활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현재로서 우리나라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적 시설물이다.    

우리나라의 수도 사업은 광복과 함께 일본기술자들이 일거에 퇴거하는 바람에 기술과 행정면에서 다시 시작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곧 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시설들이 파괴되어 새로이 복구와 건설을 하여야 하였다. 지금은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은 수도꼭지만 틀면 수돗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30년 전인 1980년 만하더라도 10명 중 5명은 수돗물을 공급받지 못하였다. 조금 더 전인 50년, 1960년대에는 수돗물은 10명 중 2명에게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였다. 거의 폐허에서 다시 시작된 수도 사업은 1961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급속한 양적 확장을 하였고,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수율이 70%를 넘어서면서 국민들의 수돗물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수돗물을 받는 시민들은 모두 기뻐하였으나 1989년 8월에 언론에 보고된  수돗물 오염기사 이후로 수돗물 수질은 불신을 받고, 정수기와 생수시장이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또한 수도사업도 이 시점을 전환점으로 삼아 수질개선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하게 되었고, 공급위주의 수도 사업에서 소비자의 기호를 중시하고 소비자의 만족을 위하여 노력하는 수도서비스 사업으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국민들이 수돗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수록 수도서비스는 개선될 것이다. 어렵게 보존한 문화재이니 만큼 부디 한번쯤 구의정수장에 들러 둘러보시는 것을 권해드린다.  


글·사진ㅣ최승일 고려대학교 환경공학과 교수
사진제공·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