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검색과 자료수집

[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속리산 숲(옮겨온글) 출처참조

왕토끼 (秋岩) 2010. 7. 30. 05:38
[숲 인간과 자연의 통로] 속리산 숲

 

지암 이동항의 「유속리산기」따라 산행 실제 4km인 소나무·갈참나무·대나무가 터널 이뤄

속리산은 충남 보은군·괴산군과 경북 상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제일 높은 천황봉(天皇峰·지난 1월 천왕봉으로 변경 고시)의 높이가 1,058m이다.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최고봉 천황봉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 등 8개 봉우리와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신선대(神仙臺) 등 8개 대가 있다.


속세의 티끌과 먼지 씻어내려 올라

사람이 자신의 분야를 제대로 하려면 성심·성의뿐만 아니라 탁월한 재주를 발휘하여 하나의 결실을 세상에 내놓아 주위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사람처럼 될 만한 자질이 없어서 핵심보다는 변죽을 울리며 살아온 듯하다. 이런 반성은 자신을 고양시키기도 하지만, 오히려 세상사를 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할 수 있다.


▲ 「광여도」에 나오는 속리산. / 해동지도에 나오는 속리산.
다행히 시간이 흐르자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위를 보면 자신의 분야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지천이고 그들과 같은 시대(幷世)를 사는 것이 큰 행운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옛날에도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각각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250여 년 전에 속리산을 탐방한 지암(遲庵) 이동항(李東沆·1736-1804)도 그런 분이 아닐까 한다.

그는 1787년(정조 11) 9월26일과 27일 속리산을 유람하고 「유속리산기(遊俗離山記)」를 남겼다. 이틀 동안의 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꼬박 이틀을 산에 머물렀다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산 근처에 와서 이것저것 준비했고, 다른 하루는 본격적인 산행을 했다.

이동항 일행이 거쳐간 길을 따라가 보자. 26일에 길을 떠나 북쪽으로 가서 밤재[율현(栗峴)]를 넘어 관음사에서 쉬고, 저녁에는 삼거리 마을에 투숙하였다. 다음날 속리산 산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칡고개[갈현(葛峴)]에서 법주사(法住寺)를 거쳐 한낮에 복천사(福泉寺)에 올랐다.

‘이 절(복천사)에서 북쪽으로 꺾어져 보현재(普賢岾)를 넘으니, 때는 가을이라서 하늘은 높고 낙엽이 온 골짜기에 가득히 떨어지면서 모두 바스락 소리를 울린다. 중사암(中獅庵)에 올랐다. 암자는 산의 뾰족한 끝에 있어서 높이가 이 산 높이의 절반을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산세가 뚝 끊어져 매달린 듯하고, 바위 뿔이 아슬아슬하다. 고대등마루를 올라서니 홀연 백석정(白石亭)이 보인다. 백석정은 하늘 한가운데 우뚝하게 솟아 있으니, 정말로 이것이 바로 문장대(文莊臺)의 참 면목이다(自寺北折, 踰普賢岾, 時秋高, 葉落萬壑, 皆鳴. 上中獅庵, 庵在山之     , 其高已過半矣. 自此山勢斗懸, 石角峻山曾. 登嶺脊, 忽見白石亭. 亭特立中天, 眞是文莊之面目)’

▲ 법주사 ‘호서제일가람’ 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느룹나무.

그는 법주사에서 복천사(현재는 복천암)를 거쳐 중사암~백석정에 이른다. 오늘날 보은쪽에서 법주사를 지나 문장대(또는 천황봉)로 가는 길과 같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예전의 그들과 달리 주변 숲을 생태환경적으로 보고 간다는 자부심에 감회가 매우 크다. 보은 사내리 마을에서 법주사까지는 이른바 오리숲이지만, 실제로 4km 길은 소나무와 갈참나무가 터널을 이룰 정도로 무성하다. 그리고 시내를 따라 키 작은 대나무가 촘촘하게 산 정상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대나무를 살피고 나아가자. 대나무는 종류가 많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대나무는 볏과라 나무보다는 풀의 습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알기 어렵다. 북쪽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대나무를 그림이나 사진으로만 보았기에, 남쪽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당연히 대나무를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어보지만 별반 신통한 이야기를 듣기 어렵다. 대나무는 일반 나무가 세월이 흘러 몸통이 자라는 것과 달리 처음 굵기가 평생을 그대로 유지한다. 대나무는 50년만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일시에 죽는다.

대나무를 가리키는 한자 죽(竹) 자는 벼 모습을 상형한 글자다. 대나무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글을 적던 재료다. 바로 죽간(竹簡)이 그것이다. 일반 나무에 글을 쓰면 목간(木簡)이라 한다. 대숲은 중국 진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인해 일찍부터 자유정신과 비판정신을 지닌 사람들의 공간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들은 불의한 권력에 거리낌 없이 저항하면서 대숲에 은둔하였던 것이다. 청나라의 정판교는 자신의 서체(書體)로서 대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지암 이동항의 「유속리산기」따라 산행 실제 4km인 소나무·갈참나무·대나무가 터널 이뤄
▲ 1872년 제작한 지방군지도에 나오는 속리산.
세심정 지나 신갈나무 군락 눈에 띠어

법주사를 지나면 예전의 이름난 곳은 거의 휴게소로 변해버렸다. 태평휴게소, 세심정휴게소에 이르면 왼편은 문장대로 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천황봉으로 가는 길이다. 법주사를 지나 세심정휴게소까지는 소나무숲이 산 깊숙한 곳까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당단풍과 서어나무가 자신의 영역을 뽐내고 있다.

소나무숲에 군데군데 포진한 서어나무는 참나무목에 속하는 낙엽고목이다. 잎은 끝이 뾰족하고 어긋나 있다. 잎은 홍색에서 녹색으로 변하고 붉은 단풍이 든다. 꽃은 4~5월에 피고 암수한그루이며,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이삭은 까치박달과 비슷하지만, 까치박달은 날개가 더 크다. 원산지는 한국·일본·중국 등지이며, 황해 이남의 표고 100~1,000m 지대에 자생한다. 다른 이름은 셔나무·초식나무·서나무·왕서나무·큰서나무·왕서어나무 등이 있다. 서어나무숲은 숲의 종착역으로 가장 안정된 극상림이며, 인간이 간섭하면 다시 소나무숲으로 변한다.

세심정휴게소를 지나면 이전과 달리 길 양편에 확연히 신갈나무가 많이 나타난다. 신선대로 가는 길도 그렇고, 천황봉으로 가는 길도 그렇다. 속리산의 신갈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속리교에서 본 계곡.
신갈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한 여섯 종류 중 하나다. 나머지는 갈참나무·졸참나무·굴참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다. 여섯 종류는 각각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 열매를 도토리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사실 도토리는 떡갈나무의 열매를 말한다. 상수리나무 열매는 상수리라고 한다. 과거에 상수리나무 열매는 흉년이 들 때 허기를 채워주는 구황식물이었다. 그러나 풍년이 들면 먹지 않고 대개는 가축에 주었다고 한다.

신갈나무는 돌참나무·물가리나무라고 한다. 높은 산에서는 순림을 이루며 키는 약 30m, 지름은 약1m까지 자란다. 나무껍질은 검은 빛을 띤 갈색이며 세로로 갈라지고 겨울눈은 달걀 모양이다. 잎은 어긋나고 가지 끝에 모여 달리며,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거나 타원형을 이룬다. 꽃은 4~5월에 노란 빛을 띤 녹색이다.

이곳을 지나 복천암~용바위휴게소~보현재휴게소~냉천골휴게소~정상휴게소를 지나면 문장대가 나온다. 속리산은 더 이상 청정한 곳이 아니므로 문장대는 속세의 문장대가 된 지 오래다. 이동항은 중사암(中獅庵)에서 중대(中臺)로 오른다. 이 길은 매우 험하다. 일행은 ‘갓과 옷을 벗고 바위틈을 따라 몸을 굽히고 꺾으면서 올라가니’ 바위틈이 끝나는 곳에 큰 왕골자리를 깔아놓은 듯한 넓은 곳, 중대(中臺)에 이르렀다.
▲ 1 오리숲에서 정상까지 곳곳에 대나무 군락을 볼 수 있다. 2 나무줄기가 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부르는 층층나무. 3 전나무. 4 서어나무와 비슷한 까차박달.

‘중대(中臺)에서 북쪽으로 나와 가로놓인 사다리 아래에서 몸을 비스듬히 하고 동쪽을 엿보니, 바로 상대(上臺) 터에 큰 마룻대가 비스듬히 나와 있는 것에 마주친다. 아래에는 하나의 맑고 깊은 물이 있는데, 잔잔하게 물이 모여 투명하고 깨끗해서 사람들이 감로(甘露)라고 말한다. 실낱같은 돌길이 그 왼쪽으로 이어져 있어서 그 물을 잔질하여 마실 수 있는 길을 이루었다. 그 앞에는 만 길이나 될 바위벼랑이 있는데, 사방으로 아무 장애가 없어 사방을 다 둘러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 리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한껏 다 바라보아서 속세의 티끌과 먼지들이 가득했던 가슴을 씻어내었으니, 이것이 내가 대에 올라온 목적이다(自中臺北出, 橫梯之下, 側身東窺, 則恰當上臺之址, 大廣斜出. 下有一泓水, 靜?畜瑩潔, 號稱甘露, 一線石逕, 乘其左傍, 可通酌飮之路. 前臨萬?刃之壁, 四無障?疑, 宜通望一國, 故一騁千里之目, 湯滌芥滯之胸, 是吾登臺之意也)’


그는 상대(上臺) 아래에 이르러 맑고 깊은 감로수를 마시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일망무제함을 알았다. 오늘의 우리가 산의 정상에 올라 가슴 속 통쾌함을 느끼며 야호 소리쳤을 것이지만, 그는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자, 나는 속리산에 들어왔다. 이러한 한 줄기 섬광 같은 깨우침은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 1 소나무 군락 사이사이로 당단풍이 소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2 숲의 종착역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서어나무. 3 속리산에서도 금강소나무를 볼 수 있다.
그가 속리산에 들어온 목적이 감로수나 마시고 사방이 탁 트여 가슴속마저 시원해지려고 한 것이라면 무어 대단하겠는가. 산은 땅의 기운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라 하였는데, 온 산에 땅의 기운이 응결해 있다기보다는 특정한 장소, 즉 청정한 지역에 선택적으로 응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들이 입산하여 그곳에 도착한다면 대지에서 선천세계(先天世界)를 느낄 수 있다고 여겼다.

선천세계란 우리가 사는 후천세계(현실세계)를 가능케 해주는 원리의 세계, 이념의 세계라 할 수 있으며, 추상적 세계이고 관념의 세계를 표상한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 세계와 비슷하다. 따라서 그는 속리산의 청정한 지역에서 자신의 내면에 부침하는 희로애락을 살펴 속세의 허상을 차단할 수 있었기에 얻은 바가 남달랐던 것이다.
 
▲ 문장대 인근에서 군락을 이룬 산뽕나무. / 정상 가는 도중에 신갈나무 숲이 확연히 드러난다. / 나무줄기가 물방울 처럼 희고 얼룩한 모습을 보인다 해서 이름 붙인 물푸레나무.
시간이 흘러 밤이 되자 사방의 검은 구름이 사라지면서 하늘 끝과 땅의 시작이 차례로 드러났다. 이에 영남과 기호 지역의 온 국면, 전남의 반쪽, 치악산 동쪽, 한수(漢水) 이북이 활짝 열려 사방의 봉우리와 골짜기들이 중첩하여 모두 발아래에 있었다. 이에 동행한 사람이 “삼한 땅이 눈앞에 있구나”하고 감탄하자, 다른 사람은 붓에 먹물을 찍어 제명(題名)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런 요구는 주변 영역을 표시하고 경계 짓는 일임이 분명한데, 이때도 벌써 청정지역은 점점 사라지고 속세의 영역은 확장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름 남기지 않은 이름이 정말 큰 이름’ 교훈 남겨

그러나 그는 처음 산에 들어올 때의 그가 아닌 것이다. 그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그만 두게나. 저 대석(臺石)을 쪼아서 붉은 칠로 화려하게 만드는 것은 어찌 그 이름을 만세토록 오래 남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만, 돌이 닳아지는 날에는 그 이름도 따라서 다 없어질 것이니, 어찌 먹 따위를 돌아볼 겨를이 있겠는가. 옛날에 충암(沖庵·김정) 선생과 대곡(大谷·성운) 선생이 문장대를 사랑하여서 지팡이와 신발로 유람하는 일이 이어졌지만, 결코 이름을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으니, 달갑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오. 그런데도 그 분들의 빛나는 자취는 아직도 대 위에 남아 있어서 후생들로 하여금 구름을 우러러보고 바위 위의 이끼를 어루만지며 감상하고 사모하게 만드는 것은 백세(百世)까지 전할 이름들이 우주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오. 이름을 남기지 않는 이름이 정말로 큰 이름이라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止矣. 彼   臺石朱丹交暎者, 豈不欲壽名萬世, 而石磨之日, 名隨埋沒, 尙何墨之恤也? 昔沖庵·大谷兩先生, 愛遊玆臺, 功   相尋, 而未嘗一字留名, 蓋有不屑而然. 然而遺芬芳趾, 尙在臺上, 使我後生輩, 瞻雲撫苔, 感想興慕者, 以其百世之名, 不磨於宇宙也. 子知不名之名, 眞大名也耶)’


자신의 이름을 남에게 강요한다고 기억되지도 않고, 운이 좋아 남이 알아준다고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 것은 아니다. 이동항은 ‘이름을 남기지 않는 이름이 정말로 큰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말했다.

일행은 여러 상념에 잠겨 있었지만 곧 마쳐야 했다. 날이 어두워지고 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차가운 기운이 뱃속까지 스며들자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그 길로 시냇물을 끼고 서쪽으로 내려가 2개의 돌문을 거쳐 ‘마치 열자(列子)가 바람을 몰아서 돌아온 것처럼’ 법주사에 투숙하였다.

▲ 속리산 숲 약도

찾아가는 길


승용차로 서울 경기 강원 방면에서 중부고속도를 이용할 경우 증평 IC→내수→초정→미원→봉황→가고리→장갑→상판→속리산으로 가는 방법과 서청주 IC(보은 방면)→미원→봉황→가고리→장갑→상판→속리산으로 갈 수도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엔 청주 IC(보은방면)→미원→봉황→가고리→장갑→상판→속리산으로 가면 된다. 영남 방면에서는 경부고속도로 영동 IC(보은방면)→청산→마로, 관기→장안→상판→속리산으로, 호남 방면에서는 호남고속도로→서대전→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부산)→옥천 IC→보은→ 속리산으로 가면 된다.

속리산직행이 남서울터미널(02-521-8550)과 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오전 7시20분에서 오후 6시40분까지 하루 약 10회 있으며, 3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청주, 상주, 대전에서도 갈 수 있다.


/ 나종면 숲과문화연구회?규장각 책임연구원  kongjaen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