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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단공원(奬忠壇公園)의 기막힌 역사(歷史)

왕토끼 (秋岩) 2015. 4. 18. 09:39

장춘단공원(奬忠壇公園)의 기막힌 역사(歷史)

           奬忠壇  ( 장춘단 )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

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

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

(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당시 이 같은 항일 ·배일(排日)의 인물들을 장충단에

 제향한 일은 장병들을 크게 감격 고무시켰으며 일제의

 횡포가 극심함에 따라 일반의 장충단에 대한 경모심도

 더욱 커졌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애창된

한양가(漢陽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그러한 일면을 말하여 준다.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편으로 옮겼다.

 

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장충단은 지금의 신라호텔내의 영빈관자리가

유력하고  그남쪽의 타워호텔에 이르는 터는 南小營으로

 대한제국육군의 병영으로 군의 주둔지였으며 

 서로는 국립극장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였다.

3호선 동국대입구역 6 번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