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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李陸史 , 1904.5.18~1944.1.16(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3. 7. 3. 11:56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아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文章> 1939년 8 월

이육사 李陸史 , 1904.5.18~1944.1.16 1904년 4월4일(음) 경북 안동의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그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지었다.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 하는 시를 썼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의 병장 凡山 許衡의 딸인,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 이육사는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 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그 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 고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 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 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 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 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 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 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문학세계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이다. 이어 발표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 〈노정기 - 자오선1937.12> 〈연보 - 시학1939. 3> 〈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을 발표했다. 〈청포도〉는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를 써서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 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절정 - 문장1940.1>〈광야 - 자유신문1945.12.17>에서 보이듯이 일제강점기의 민족 적 비극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점이 특징 이다. 특히 유작으로 발표된〈광야〉는 저항시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작품연보가 추가된〈광야〉라 는 시집이 발행되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 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 이 갖춰져 있다. 그동안에는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로 위탁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에 최유근 전 이육사연구회 회장, 초대 이육사관장으로 조영일 한국문협 이사가 내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이 전문문학인들이 운영주체가 되어 이 루어짐으로써 문학관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문학관으로 거듭나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도 자리매김 하고 있다. 또한 육사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육우당에 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 이 이육사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분이 태 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 이 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쪽 안채 는 반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사진 오른쪽)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메인가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 <강 건너 간 노래> 중 마지막 연 - ■ 내가 바라던 손님, 고달픈 몸으로 모시두루마기 입고 건너 오기를 기다리던 강, 이제는 메말라 개천으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