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같은 비가 내렸다. 여린 빗물 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몇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 가슴이 먹먹했다. 26일 30여 명의 오월길 탐방단이 길을 나섰다. ‘역사로 읽는 오월길 탐방’이었다.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장소마케팅연구센터와 5·18 기념재단이 주최한 그 길은 ‘5·18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출발점은 시대의 빛, 들불야학이었다. 거기 들불 7열사의 눈물 같은 희생이 있다. ‘들불야학’이라는 상징과 함께 ‘5·18의 뿌리’도 선명해졌다. 윤상원은 단호하게 죽음 앞으로 걸어 들어가며 80년 오월을 ‘사건’에서 ‘역사’의 자리로 밀어 올렸다. 그 해 봄, 항쟁의 뿌리는 ‘저항’이었고, 정신은‘사람의 길’이었다.
광주가 품은 저항의 가치는 어디서부터 나왔을까? 5·18을 만들었던 올곧음의 가치는 80년 오월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학의 힘이 있었고, 학술과 정치가 하나 되는 나라를 생각했던 기대승의 꿈속에도 스몄다. 썩은 권력에 단호하게 맞섰던 임형수의 소멸 속에도 저항은 있었고, 2차 진주성전투에서 아름답게 죽은 양산숙의 의기 속에도 80년 오월은 이미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역사로 읽는 오월길 탐방’은 시간을 역으로 돌려 저항의 뿌리들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들불야학’과 광천시민아파트
광천동 성당 안에 있는 ‘들불야학 강학소’는 아팠다. 역사를 자기 자리에 놓는 것은 ‘기억투쟁’에서 시작되고, 기억을 일깨우는 것은 ‘원형보존’이다. 들불야학의 사람들은 80년 오월의 복판에 섰다. 그들의 힘으로 광주는 비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들불야학 강학소’를 지키지 못했다. 지역사회운동의 핵심활동가였던 윤상원이 노동자들과 함께 배우며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꿈꿨던 곳, ‘들불야학 강학소’는 세상에 없다. 몇해 전 도로를 내면서 헐렸고, 정문도 아닌 옆문 하나만 외롭게 살아남아 있다.
윤상원은 80년 오월 들불야학 사람들과 함께 투사회보 제작을 주도했고, 항쟁지도부를 규합해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80년 5월26일, 계엄군의 도청진압이 있기 하루 전 윤상원은 중고생들과 여대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가지 않으려는 그들의 등을 억지로 떠밀며 그는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사라진 ‘들불야학 강학소’ 앞에서 많이 아팠고, 윤상원 열사에게 많이 미안했다.
‘들불야학 강학소’를 돌아 나오면 곧바로 광천시민아파트가 있다. 거기 윤상원이 살았고, 김영철이 살았으며, 박용준이 살았다. 특히 김영철은 광천시민아파트 사람들과 변혁을 꿈꿨다. 그는 청년회를 부활시켰고, 어린이 주말학교도 열었다. 들불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을 가르치며 더 나은 내일을 꿈꿨다. 들불야학은 단순하게 보면 노동자들을 정치사회적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이었다.
들불야학에서 함께 활동했던 전용호 씨는 말했다. “당시 광천동은 기아의 전신인 아시아자동차 부품공장들이 밀집한 대규모 공단지역이었다. 들불열사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들불처럼 일어나고 싶어했다. 아래로부터의 쟁취를 꿈꾸는 민중생활운동을 진행한 것이다. 들불야학은 노동자 주민들과 이념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을 펼쳤고, 그 힘이 고스란히 80년 오월 그 역사의 복판으로 건너갔다.”
생각의 거처, 윤상원 생가
오월길 탐방단은 길을 돌려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로 향했다. 거기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다. 80년 5월27일 새벽 복부에 계엄군의 총을 맞고 그가 세상을 아주 떠날 때, 겨우 만 30세였다. 죽음을 뻔히 들여다보면서 죽음 속으로 아름답게 걸어 들어갔던 사람. 그는 죽음 속에서만 80년 오월이 마침내 역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명확한 전망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오래 전 전기누전으로 불에 타버린 그의 생가에는 열사의 물건들이 거의 없었다. 그가 품었던 생각들의 거처였던 책들은 불길 속에서 재가 됐다. 지금의 생가는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지 않았다. 윤상원에 대한 가장 선명한 증언인 그의 아버지 윤석동(87)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아버지는 일기를 썼다. 1993년 5월 아버지는 이렇게 썼다. ‘오늘이 상원이 제일(祭日)이다. 13년이나 흘러 (상원이가) 나이로는 44세가 된다. 그때를 회상하면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맞다. 이토록 허망한가. 산 자들은 무엇을 하여 왔을까.’ 1998년 5월29일의 일기는 먹먹했다. ‘상원이 친구들과 야학 제자 등 20여 명이 망월동의 상원이 묘를 방문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을 보니 상원이가 살아 있을 것 같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떠난 자식과 함께 살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을 위한 노래다. 노랫말을 쓴 사람은 소설가 황석영이다. 윤석동 씨는 “방북사건으로 황석영이 공주교도소에 있을 때 찾아갔어. 한 번은 보고 싶더라고. 면회신청을 했는데, 시국사범이라 면회가 안 돼. 그래서 영치금을 5만 원 넣으려는데, 3만 원만 받아줘. 집에 와서 며칠 있다가 황석영한테 편지가 왔어. 못 뵈어서 죄송하다고.” 때로 자식의 삶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운다. 전복이 역사라는 걸 윤상원 생가에서 배웠다.
‘5·18의 뿌리’, 기대승
광주가 품은 생각들의 학문적 뿌리는 고봉 기대승에게서 나왔다. 그의 삶은 월봉서원에 잠들어 있다. 기대승이 이황과 벌였던 ‘편지논쟁’이 목판의 형태로 거기 있다. 1558년 이황과 기대승이 만났다. 두 거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이황은 58세, 기대승은 32세였다. 이황은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기대승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했다. 26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무려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고, 8년 동안 왕복서신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모두 120여 통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에 이 논쟁은 큰 영향을 미쳤고, 이황은 ‘주리론’을 완성했다.
기대승은 끊임없이 시대와 불화했지만 학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다. 기대승은 31세 때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했다. 당대의 사건이었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살아서 700권의 막대한 저서를 남겼다. 거기서 핵심을 다시 추려 ‘주자대전’ 120권에 담았다. 기대승이 그 방대한 양의 ‘주자대전’을 혼자 독파하고, 해설까지 달아 ‘주자문록’을 펴낸 것이다. ‘젊은 스승’의 출연에 세상은 술렁였다.
1558년 기대승은 32세의 나이로 문과 을과에서 장원한다. 그러나 기대승은 벼슬살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썩은 정치 현실이 그는 못마땅했다. 중앙정치에 나선 14년의 시간 동안 그는 출사와 은둔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마침내 1572년 10월, 기대승은 조정을 아주 떠났다. 병이 깊어 도저히 정사를 맡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기대승이 떠나는 날, 수많은 선비들이 모였다. 한 선비가 물었다. “사대부로서 사회에 몸을 세우고 처신함에 반드시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대승이 짧게 답했다. “기幾, 세勢, 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
세 글자가 간직한 뜻은 깊었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 하며, 마침내는 목숨을 걸고 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단지 우연일까? 기대승의 ‘기·세·사’는 윤상원의 삶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임형수와 양산숙
호탕했던 선비 임형수, 그를 만나러 등림사에 간다. 그가 살던 시절 세상은 어두웠다. 그는 당대 권력의 정점이었던 문정왕후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뇌물이 내정으로 몰린다.” 내정은 문정왕후을 뜻했다.
1547년 9월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벽서는 문정왕후의 섭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임형수는 결국 사약을 받는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호탕했다. 아들에게 유언을 내리기를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이니 글을 배우지 말라. 배우더라도 과거는 응시하지 말라.” 마침내 사약을 들고 마시려다 의금부 서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양산숙의 삶은 광산구 박호동에 있었다. 1593년 6월22일 시작됐던 2차 진주성 전투, 거기서 호남의 의병들은 전멸했다. 관군들은 성을 비운다. 반면 김천일, 최경회 등 전라도 의병들은 죽음으로 진주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 진주성을 사이에 둔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팽팽한 공방은 9일 밤낮으로 계속됐다. 그리고 진주성의 조선군은 전멸했다. 양산숙은 의병장 김천일의 종사관이었다. 마지막 순간 김천일은 양산숙에게 도망가 살 것을 권했다. 양산숙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떳떳하게 죽는 길을 택했다.
양산숙의 죽음 역시 80년 5월27일 죽을 줄 뻔히 알면서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의 죽음과 겹친다. 오월길 탐방단은 시간을 거꾸로 걸으며 선명한 ‘5·18의 뿌리’를 봤다.
글·사진=정상철 기자(5·18기념재단 계간지 주먹밥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