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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의미

왕토끼 (秋岩) 2013. 2. 4. 18:45

봄의 의미
오늘은 봄이 들어서는 입춘이다. 가끔씩 한파가 닥쳐와 몸을 움츠리게 하고, 외투를 입고 목도리까지 둘러도 살갗을 파고들기는 하지만 해는 제법 높이 올라오고 남은 눈과 서릿발 사이에서도 얼었던 풀잎이 푸른빛을 되찾고 있다. 봄을 일찍 맞는 강가의 나무들은 잎눈과 꽃눈을 틔울 준비를 하느라 조금씩 부풀고 들오리 떼도 얼지 않은 강물에서 더욱 활개를 친다. 모두들 봄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계절이 오고감을 더 피부로 느낀다. 소양의 기운이 뻗치기만 하던 어린 시절에는 혹독한 찬바람 속에서도 맨손으로 온갖 놀이와 장난을 다했고, 장년에도 그리 추위와 더위를 못견뎌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더위는 더위대로 추위는 추위대로 몸으로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연과 가까워지는 것일까? 옛 사람은 봄을 어떻게 맞이했고 어떻게 느꼈을까?

태극(太極)이 쪼개지고 음양이 나뉜 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서 네 계절이 생기는데, 해는 황도의 별자리에서 운행이 끝나고 달은 열두 달 뒤 운행이 끝나서, 해와 달의 도수가 마감이 되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것을 봄이라고 한다.
봄과 관련된 날은 갑을(甲乙)이고, 봄의 임금은 태호(太皞)이며, 봄의 신은 구망(句芒)이다. 봄은 무성하고 온화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피어 올라와 오로지 뭇 생명의 고동을 울려 만물을 이루어 자라나게 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봄의 작용은 ‘낳음[生]’이다. 여름의 ‘자람[長],’ 가을의 ‘이룸[成],’ 겨울의 ‘갈무리[藏]’에 간여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자람ㆍ이룸ㆍ갈무리가 낳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봄은 네 계절을 두루 꿰뚫고,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되며, 한 해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본받는 도리로써 말하자면,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인이라는 한 글자에서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일원(一元)이 흘러서 시간에 부여된 것을 봄이라 하고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인이라 한다. 시간상의 봄이 곧 사람에게서는 인이고, 사람의 인이 곧 시간상에서는 봄이다. 인을 얻으면 봄과 부합하고, 인을 잃어버리면 봄과 상반되니, 봄과 부합하면 온화한 기운이 이르러서 만물이 자라나고, 봄과 상반되면 사나운 기운이 응하여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
비록 그러하나 이 봄은 사계절을 통틀어서 시작이 되고, 이 인은 사단(四端)을 통괄하여 근본이 된다. 이 봄은 만고에 변하지 않으니 이 인은 천 년을 흘러도 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봄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으로 돌이켜야 하고, 시간의 봄을 체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을 다해야 한다. 만일 인으로써 도를 닦고 인으로써 정치를 행하여, 인을 행하는 공이 쉬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서 온 사방에 푹 젖어 들고 두루 관통하면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니 한 나라가 인을 일으키고 백성이 화평하고 만물이 자라나며, 온 세상이 봄이어서 저마다 제자리를 얻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만히 앉아서도 성대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竊謂自太極旣判陰陽旣分之後, 寒暑相推, 四時乃生, 日窮于次, 月窮于紀, 數將幾終, 歲且更始者, 其名曰春也. 其日甲乙, 其帝太皥, 其神句芒. 而其爲氣也沖和發揚, 藹藹融融, 專以鼓動群生, 化育萬物爲事, 則其爲德曰生也. 夏之長也, 秋之成也, 冬之藏也, 有不預也, 而其所謂長也成也藏也者, 非生則何以施功. 此所以貫徹四時, 資始萬物, 而爲歲之首者也. 以人體天之道言之, 則不可以他求者也, 在乎仁之一字而已矣. 蓋一元流行, 賦於時曰春, 賦於人曰仁. 時之春卽人之仁也, 人之仁卽時之春也. 得乎仁則合乎春, 失乎仁則反乎春, 合乎春則和氣至而萬物以育, 反乎春則戾氣應而千災以興. 雖然, 是春也貫四時而爲始, 則是仁也統四端而爲本. 是春也亘萬古而不變, 則是仁也歷千世而不異. 然則欲知在時之春, 當反在我之仁. 欲體在時之春, 當盡在我之仁. 苟能修道以仁, 發政以仁, 爲仁之功, 不息而久, 至於熏蒸透徹融液周遍, 則天下歸仁, 一國興仁, 民和物育, 八區爲春, 各得其所, 何足道哉. 煕然春臺, 可坐而登也.

-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봄의 의미에 대한 책문[對春策]」, 『고산유고(孤山遺稿)』


▶ 동대문 현판. 오행에서 목(木)은 계절로는 봄, 방향으로는 동쪽, 색깔로는 푸른색, 덕으로는 인(仁)이다. 그래서 한양 도성의 동쪽 문을 인을 일으킨다는 뜻에서 흥인지문이라 하였다. 봄을 맞아 삼라만상의 생명을 일깨우는 인의 덕을 느껴본다.

윤선도가 무진년(1628, 인조6) 별시 문과의 과거시험에서 제출한 대책의 일부이다. 윤선도는 이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고 고시관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된다.

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에는 국가이데올로기를 강요하던 때인지라 중요한 국가기념일이면 방학 중이라도 반드시 학생을 소집하여 국민의례를 행하였다. 다른 지방에 여행을 하더라도 그곳 학교에 가서 의식에 참석했다는 증서를 받아와야만 출석을 인정받았다. 새해 첫날인가 그 이튿날인가 아무튼 양력으로 해가 바뀌면 신년식이라는 걸 거행했는데 그때 ‘새해의 노래’라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온 겨레 정성덩이 해 돼 오르니, 올 설날 이 아침야 더 찬란하다. 뉘라서 세월더러 흐른다더냐?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

방학이 한창 중간쯤이라 아직은 뜨뜻한 구들방에 누워 뒹굴 시간에 추운 날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소집되어 운동장에서 벌벌 떨다가 식이랍시고 하니 반은 악이 섞인 목소리로 뜻도 잘 모른 채 꽥꽥 고함을 질러가며 노래를 불러댔다.

당시 의식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 뒤로 어쩌다 해가 바뀌고 달력을 넘기다 문득 그 노래가 떠올라도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는 노래 구절의 의미가 도대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한국의 근현대사를 알아가면서 그 노랫말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맥락과 조작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 이 말에는 근대적, 물질적, 기계적 세계관이 녹아들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도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의 변화원리를 파악하여 거기에 적응하고 문명을 일구어내고 문화를 창조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오는 봄을 내손으로 만들어내자’는 노랫말의 조작에는 이미 자연에 적응하여 문명을 일구어내는 수준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내 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자연의 법칙을 내 의도에 따라 변형시키고 심지어 왜곡시켜서라도 내 뜻을 관철하겠다는 자연개조의 욕망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 싹이 오늘날 크게 자라나 산천을 뜯어고치고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의 한살이는 태어남과 죽음 그것만 자연스럽고 나머지는 모두 인공과 인위의 조작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도 우리가 ‘인간’의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자연’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굳이 천재지변이 아니라도 한여름에 갑자기 정전이 된다든가, 대중교통이 파업을 하여 운행을 중단한다든가 하면 당장 우리는 몸이 ‘자연스러움’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린다. 에어컨으로 열을 식히고 차량으로 공간을 단축하다가 부채질로 땀을 식히고 몇 리라도 제 발로 걸어가야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자연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지 실감하게 된다. 대상과 내가 직접 관계하지 않고 중간에 다른 무엇인가를 개입시키게 되면 나는 그 대상에 소외(疏外)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자연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다른 온갖 수단을 개입시킴으로써 자연에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법칙과 원리를 이성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그 의미를 감성으로 느끼기도 한다. 노자는 자연을 불인(不仁)하다고 하였다. “천지는 불인하다. 만물을 풀개[芻狗]로 여긴다.” 풀개란 풀로 엮어서 제사에 쓰고 버리는 개 모양의 인형을 말한다. 그러니까 노자가 보기에 자연은 만물을 만들어내서 제각기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도록 두되 절대로 어느 하나를 특별히 배려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게 한다.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가 둥지에서 떨고 있어도 비바람은 사정없이 몰아닥쳐서 둥지를 떨어뜨린다. 그러니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거기에 적응하여 살아야 하고, 자기 몸을 흐르는 자연스러운 순환을 감지하여 순조롭게 흐르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유가에서는 자연을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보았다. 그리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흐름에도 의미를 부여하였고 의미를 찾았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정감을 도덕으로 추상화하고 이를 자연의 질서에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에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덕이 되고 또한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위대한 작용으로 연결되었다.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덕이 되고 또한 만물의 한살이를 정리하여 평가하고 마감하는 가을의 작용으로 연결된다.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덕이 되고 또한 만물이 저마다 번성하면서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여름의 작용으로 연결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덕이 되고 또한 깊은 침잠 속에서 한 해의 순환을 마감하여 새로운 순환으로 연결하는 겨울의 작용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정말 봄이라는 그 무엇이 존재하여서 만물을 소생시키게 하는가? 만물은 단지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서 대지에 쏟아지는 복사열이 많아지면서 열기를 받아 싹이 트고 자랄 뿐이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단지 태양의 고도에 따른 대지의 반응일 뿐이다. 이는 자연을 법칙적으로만 이해하는 물리적, 과학적 세계관에 따른 이해이다. 이런 세계관이 문명을 발전시켰고 인간으로 하여금 더 깊이 더 자세히 자연을 파악하게끔 하였다. 인간은 자연을 물리적 법칙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인간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외경과 친근함과 가족유비(家族類比)의 원초적 신화의식이 깔려 있어서 자연의 우호적인 측면을 부모의 자애로 여기고 자연의 비우호적인 측면을 부모의 꾸짖음으로 여긴다. 이런 의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봄을 찬미하는 온갖 노래와 음악, 축제, 그림, 신화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을 법칙으로 파악하여 문명을 일구어가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지만 자연의 의미를 엿보고 삶의 의미를 넓고 깊게 하는 것도 인간 삶의 진실한 한 모습이다. 노자는 천지가 불인하다 하였지만 유학자들은 천지의 큰 덕(기능, 작용)을 생명성, 곧 낳고 낳음으로 파악하였다. 생겨난 만물은 살아가게 마련이므로 생물의 살아가려는 속성은 ‘낳음’ 속에 저절로 포섭된다. 또 만물은 일체 인(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모든 만물에는 인의 원리가 지배하고 만물의 존재이유는 인을 실현하는 것이다.

삶을 기계적으로 자연과학적으로 보는 관점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누구나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삶이 물질적으로 재단될수록 의미를 돌아볼 일이다. 봄은 수억 년을 두고 오고 갔지만 봄이 오고 감을 느끼고 알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누군가가 없다면 봄은 수억 년 오고 간 그 봄일 뿐이다. 그러나 봄이 오면 “아! 봄이로구나!” 하고, 또는 “봄이 왔네!” 하고 말해주는 내가 있기 때문에 봄이 봄인 것이다.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