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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⑫석천 임억령(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2. 12. 2. 09:25

[세계유산] 불의와 타협 않던 ‘대쪽’…조선 선비 나침반 ‘우뚝’
광주매일신문·KCTV광주방송·광주시 공동기획
무등산 서석대·입석대를 세계 유산으로

<49>무등산의 재발견-사람을 품은 산 ⑫석천 임억령

권력 좇던 동생과 의절…임금 녹권도 불살라
가사문학의 산실 식영정서 시로 세상과 소통


입력날짜 : 2012. 11.07. 00:00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선비들이 머물며 자연과 벗삼아 시를 주고 받았다.
무등산 줄기에서 문학의 향기를 뿜어낸 ‘성산사선’으로는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을 꼽을 수 있으며 ‘식영사선’으로는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을 꼽는다.

흔히 ‘가사문학권’이라 불리는 이곳은 뒤로 무등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곳 계곡의 물을 받아 이뤄진 거대한 광주호, 원효계곡이 운치를 더한다. 우리가 국어책에서 배운 면앙정가, 성산별곡, 속미인곡 등 주목받는 가사문학 18편이 이곳에서 탄생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특히 성산사선, 식영사선 두 줄기에 모두 속하는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563)과 무등산의 인연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었다.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1560년 식영정을 짓고 간청하자 석천은 제자이자 사위인 서하당의 지극 정성을 받아들여 65세에 이곳 식영정에 들어와 73세에 해남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8년 동안 이곳 자연과 벗하며 자신의 일상을 시로 그렸다. 그가 이 성산 식영정에서 지은 400여수의 시중 ‘식영정 20영’은 식영정에서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주변의 경관을 형상화 한 이 연작시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인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 식영정에 걸려있는 시구는 바로 석천이 ‘식영정 20영’을 짓자 면앙정 송순이 이 시에 화답하고 이어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이 차운(그 시의 제목과 운율을 빌려옴)하여 쓴 것이다. 다섯명이서 빙 둘러앉아 차례대로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움을 찾아썼다. 이곳을 얼마나 발이 닳게 오갔으면 구석구석 다정한 눈길이 닿아있다. 식영정 마루에 서서 순서대로 그 시구의 제목들을 보면 그들의 심성과 생각을 알 수 있다.



‘무등산에 떠 있는 구름/식영정 아래편에 흐르는 강물 부서지는 모습/물속에 있는 고기를 보며/볕바른 제방에 오이를 심으며/푸른 오동나무 사이의 서늘한 달/눈이 개인후 푸른 소나무에 쌓인 눈/조대에 서 있는 두 그루 소나무/환벽당 앞의 신비스런 연못/소나무가 있는 연못에 배를 띄움/바위에 앉아 더위를 식힘/학선리 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성밖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영추앞 다리를 총총히 가는 스님/하얀 모래밭에 졸고 있는 기러기/가마우지가 노는 바위/배롱나무가 여울지는 개울/복숭아 꽃길 만발한 길/방초가 피어있는 냇가/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신선들이 노니는 골짜기’

가사문학의 전승·보전과 계승을 위해 지난 2000년 문을 연 한국가사문학관.


시 제목만 봐도 다섯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곱고 정갈한가 알 수 있다. 마음은 道로 가득차 있고 자연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너무나 다사롭다. 똑같은 시제를 두고 마음이 통한 다섯 사람이 연작을 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한글로 쓰여 있다는 점도 빛나는 업적 중 하나다. 자신들이 지은 시를 일반 무지랭이 백성들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영정은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그러나 식영정에서 태어난 가사문학은 이곳을 찾는 선비들의 언론 수단이었을 뿐이다. 당시의 가장 멋진 의사소통 기구인 시를 주고 받으면서 세월과 세상을 한탄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면, 해남사람인데 광주 무등산에 은거하며 남도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석천 임억령은 어떤 사람인가. 석천이 남도정신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을 말하라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공직자상’이다.

석천의 성격을 엿보려면 ‘해남사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해남에는 500년 넘게 임씨 형제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이른바 해남사화의 두 주인공인데 두 형제의 엇갈림을 통해 조선중기 권력층의 갈등을 알 수 있다.

선천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임억령과 동생 백령은 어린시절부터 글재주가 비범했다. 둘 다 신동소리를 들으며 자라 당대 석학인 눌재 박상 선생에게 수학했다. 억령은 기질이 소탈하고 세속에 구애받기 싫어한 반면 백령은 자상하고 잡된 구석이 많아 스승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중종 14년. 백령은 생원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억령은 병과에 합격해 함께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벼슬길에서부터는 둘의 희비가 엇갈렸다. 억령은 외직을 주로 거쳤고 백령은 실세의 내직을 달려나갔다. 특히 억령은 무사안일로 농민에 대한 가렴주구를 자행하는 훈신들의 농간에 염증을 느끼며 여러 차례 임금에게 상소문을 보내 관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반면 백령은 기질이 호방하고 기백 있어 청산유수의 언변과 능문능서로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문정왕후의 총애로 을사사화의 주동인물이 된다.

조선 12대 인종이 부왕 중종으로부터 전위한지 불과 일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어린 이복동생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자 그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 섭정여왕이 되어 섭정에 반대하는 선비들을 모두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획책했다. 당시 호조판서로 있던 백령이 그 거사를 주동했다. 금산군수로 있던 억령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해 동생을 붙들고 거사를 중단하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출세욕이 강한 권세주의자 백령은 끝내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억령은 동생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동생의 초석 중간을 절단하고 형제의 의절을 선언한 뒤 비분강개해 내려와버렸다. 벼슬을 버렸음은 물론이다.

형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을사사화는 윤형원·임백령이 주동이 되어 계획대로 가혹하게 수행되어 어진 재상과 선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거사에 성공한 백령은 일등공신이 되어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원종공신 녹권을 고향의 형 억령에게 보냈지만 억령은 감히 임금의 녹권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버렸다. 해남사화다.

이런 임억령의 살신성인·구국정신을 배운 임극협 등 아들과 손자 3명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 장수로 명량대첩, 한산도대첩에서 큰 공과를 세우게 되지만 백령은 거사 얼마 안돼 객사했다. 잘못된 삶의 어두운 결말이었다. 그러나 석천은 가족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것이 아니었다.

1540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처벌받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이런 정치론을 폈다.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하는 말을 즐거워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간하는 말을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듣는 것이 유익함이 없고, 받아들이면서 즐거워하지 않으면 간하는 신하는 날로 소외감을 가질 것입니다. 요즈음 시종들이 행정폐단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몸소 반성하여 잘못을 고칠 것이요 비록 잘못이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여 전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잘못이 없는데 어찌 이런 말이 있는고 하시어 더욱 노력하여 광명정대한 덕을 쌓아 여러 신하들의 의심을 풀어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신 등이 언관의 직책으로 자리를 옮긴 뒤 청백한 행정에 대해 전하의 물음이 있을 때 연구하여 전하께서 듣기를 싫어하고 기뻐하지 않는 말을 아뢴다면 멀지 않아 천리 밖으로 쫓기는 몸이 될 것이요, 그로말미암아 언로가 막히어 마침내 백성이 구제되지 못할까 심히 걱정되는 것입니다.’

바른 언론관, 백성의 소리를 바로 전하는 신하의 말을 새겨들으라는 말, 임금은 석천의 이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리고 매사 바른말로 귀를 괴롭히는 석천이 미웠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곧 석천의 말을 이해하였다. 임억령이 식영정에서 해남으로 돌아가 별세했을 때, 왕은 예조 정랑을 보내 제문을 내렸다.

‘임억령은 뜻이 높고 행동도 결백하였기에 간사한 자들을 미워하다가 드디어는 그들에게 배제를 당했도다. 올바른 방향으로 아우를 꾸짖었으며 녹권을 불살라 자신을 격려했다네. 문장을 연구하는 것은 그밖의 일로 여겼으니 뛰어난 인물이었지. 말씀마다 뜻이 담겨있고 그의 모습 엄격하였으니 누구든지 그의 교훈을 들으면 겁쟁이는 자립할 수 있고 욕심쟁이는 청렴해질 것이다’

임억령의 올곧음과 청렴성은 나중 조선선비들의 귀감이 되어 정치·경제·문화·윤리·도덕 등 여러 방면의 나침반이 되었다. 바로 이 나침반이 수많은 내우외환의 고통을 흔들림 없이 이겨내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무등정신, 광주정신 역시 이런 선조들의 실천 속에서 싹이 텄을 것이다.

/글=남성숙 주필·이사 nam48@kjdaily.com

/사진=김기식 기자 pj21@kj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