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8월 7일 한밤중 중국 산동성(山東省) 공묘(孔廟)에서 조선 선비 이병헌은 기도문을 읽었다. 시절은 팔월이라 한가위 다가오고 한밤중 사당 위엔 반달이 희미했을 그 때 공자에게 드리는 그의 기도는 비장했다. 아, 부자(夫子)이시여! 여섯 해 전 조선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지금은 중국마저 일본에게 국토를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유교가 잘못입니까? 유교 때문에 망국이 들이닥친 것입니까? 하지만 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유교 아니겠습니까? 조국의 혼을 부르는 것이 유교 아니겠습니까? 아, 부자(夫子)이시여! 소자 고국에 돌아가면 꼭 나라 구원하고 국혼 부르는 새 유교를 일으키리이다. 성령께서는 묵묵히 도와주소서.
엄혹하고 혼란스런 현실이었다. 1910년 대한(大韓)이 동양평화의 이름으로 일본에게 강제 병합 당하였다. 1912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국의 수천 년 왕정이 사라졌다. 1915년 중국 정부가 일본에게 굴욕적으로 21개조 요구를 수용하여 마침내 일본 세력이 산동성까지 잠식해 들어왔다. 역사의 거대한 파도는 조선을 쓰러뜨린 데 이어 다시 중국을 쓰러뜨릴 듯한 찰나였고, 조선과 중국의 공통된 유교문명은 마치 노쇠한 문명의 유아적 죽음을 맞이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바로 이 무렵 중국 상해에서 출간된 박은식의 『한국통사』는 한국의 ‘통사(痛史)’와 중국의 ‘통사(痛史)’를 함께 비통해한 한중(韓中)의 근대사이자 한국의 국혼을 절규한 간절한 기도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듬해 이병헌이 산동성 공묘(孔廟)에 와서 한밤중에 공자를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을 때 그것은 중국에까지 임박한 한중 양국의 공통된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자 발산된 국혼의 외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외침 소리가 울려 퍼진 중국 곡부의 공묘는 한국 근대 유학사의 어떤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곳이었다고 하겠다.
먼 길을 왔다. 이병헌은 이곳에 오기까지 중국의 많은 곳을 거쳤다. 사실 그의 공묘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의 첫 중국 여행은 두 해 전 1914년에 시작되었다. 유교를 종교로서 새롭게 정립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을 안고 경성(京城)에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安東), 심양(瀋陽), 북경(北京), 곡부(曲阜), 상해(上海), 항주(杭州), 향항(香巷) 등지를 다녔다. 강유위(康有爲)를 만나 공교(孔敎)에 관해 상의하려는 일념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중국에서 펼쳐진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었다. 상하이와 홍콩에서 1910년대의 근대 문물을 직접 경험하였다면 중국 강남에서는 고전 속의 역사와 문학을 향유하였다. 박은식과 동행하여 홍콩에서 강유위를 만난 이병헌은 환대와 격려를 받았고 강유위로부터 연재(淵齋) 윤종의(尹宗儀)의 『벽위신편(闢衛新編)』을 처음 알게 되어 이를 차람(借覽)하기도 하였다. 그로서는 중국에서 발견한 조선의 학술이었다.
두 해 후, 이병헌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박은식과 함께 다시 강유위를 만난 그는 곡부와 태산(泰山)에 오래 머무르며 최대한 공자에게 집중하였고 공자에게 본심을 기도하였다. 두 번째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는 김택영(金澤榮)이 살고 있는 남통(南通)이었다. 남통은 두 번째 여행의 종착지인 동시에 두 차례 중국 여행의 총결산이었다. 김택영의 도움으로 그 곳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그의 여행은 『중화유기(中華遊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중화민국을 체험한 조선 유학자의 여행으로 말한다면 이병헌에 앞서 이상룡(李相龍), 장석영(張錫英), 이승희(李承熙) 등의 여행도 있었고 관련 작품도 현전하고 있지만, 최초의 출판물로 말한다면 『중화유기』가 단연코 선하(先河)의 위치에 있다. 『중화유기』를 필두로 우리나라의 중화민국 여행 문헌이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근대적인 지(知)의 동아시아적인 복합성이 규명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