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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손에 쥔 경국지색 양귀비(옮겨온 글 수신메일에서)2012.1.29

왕토끼 (秋岩) 2012. 1. 29. 08:27

황제를 손에 쥔 경국지색 양귀비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양귀비 얼굴

 

양귀비(楊貴妃)는

중국의 대시인 이백과 백거미등이

그 아름다움을

노래할 정도로 유명하였을 뿐만아니라,

 

경국지색리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인데

본명은 양옥환이고 지금의 섬서 화음현 출신이다.

 

양옥환은 17살 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황제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로 간택이 되는데

수왕의 생모는 현종이 가장 총애한 무혜비이다.

 

 

740년, 양옥환은 현종이 여산의 화청궁으로 거동할 때

왕비의 한 사람으로 수행하는데

무혜비를 잃고 낙담하던 현종은 양옥환에게 반하고 만다.

 

현종은 양옥환을 위해 화려한 욕실을 짓게하여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고

자신은 그런 옥환에게 아주 푸우욱 빠져버린다.

 

양옥환은 분명히 자신의 며느리였기에

그대로 빼앗아 후궁에 들일 수 없었던 현종은

 

양옥환을 비구니로 만들어 며느리로 여긴후

그녀를 궁중의 태진궁에 들여놓는다.

 

 

그 후 나라일을 제쳐둔 채

태진궁에만 머물렀는데 아침이 되어도

조정에 나오지 않는 날이 허다하였다한다.

 

이때 현종의 나이 56세이고

양옥환의 나이는 22세였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고

 

더구나 자신의 며느리를 취한 것이니

그 충격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중신들은 이미 그 모든 과정에서 반대를 했지만

이미 양옥환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현종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현종에게 선택을 받은 5년째 되는 해,

양옥환은 귀비의 칭호를 하사받는데

그로부터 양귀비가 된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고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덕에

그녀의 일족들도 고관의 자리에 올랐다.

 

심지어는 이미 고인이 된 양귀비의 부모에게도

각각 관직이 주어졌을 정도였다.

 

 

양귀비가 그렇게까지 현종의 총애를 입은 것은

단지 미모때문만이 아니었다.

 

양귀비는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처음 현종을 만날때도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는데

양귀비의 창의성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양귀비는 뛰어난 말솜씨와 재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런 역량들은 현종이 왜 수많은 후궁들을 제치고

양귀비에게만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러나 현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양귀비는

현종에게 정숙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양귀비와 현종의 형인, 영왕 사이에 불미스런

소문들이 있었으며,

양귀비는 이로 인해 잠시 현종의 진노를 사기도 한다.

 

더구나 양귀비는 늙어버린 현종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안록산을 끌어들이는데,

안록산은 양귀비의 입김으로 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영주 도독에 임명된 그 이듬해에 평로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고, 2년후 범양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어사대부에 하동절도사 자리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안록산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755년 양국충을 친다는 명목으로 군사를 일으킨

안록산은 모반을 일으키고,

 

장안을 수비하는 요새인 동관을 함락시켰으니

이에 현종은 양국충의 권유에 따라 장안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가 된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기 전,

모반의 낌새를 눈치 챈 양국충이나 태자홍이

현종에게 병사를 정비라하고 간언했으나

 

현종이 양귀비의 말만 듣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양귀비라는 한 여인의 일국의 황제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피난 행렬이 함양을 지나 마외에 당도했을 때

굶주림과 피로로 지친 장병들은, 양씨 일족과

양귀비에 대한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의 세 자매를 찾아내서 죽였으며

 

현종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몰려가

양귀비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습니다.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양귀비를 내주었으며

양귀비는 불당 안에서 고력사의 손에

목 졸려 죽었는데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다.

 

양귀비의 죽음을 본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양귀비의 시신은 서쪽 들판에 묻혔다.

 

 

양귀비의 화려하면서도 비참한 일생을 보면서

그 큰 영향력을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총명하고 능력있는 황제로 유명했던 현종을 꼬드겨

자신의 가족이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광분하였으니

모두가 불행해진다하는 교훈을 다시 생각케 된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높이는 데 쓰지 않고,

제데로 듣는 사람들을 높이는 데 쓰지 않고,

 

제데로 된 사람을 등용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나라를 튼튼하게 세우는데 일조했다면,

 

그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고 않았을 테고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자리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일전에 올린 글에서 어떤 노여배우가,

"늙은이나 젊은이나 같이 살아보니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라는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