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광주박물관 소식

서화문화실

왕토끼 (秋岩) 2011. 12. 17. 12:40

서화문화실

조선시대에는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이 서울이었듯이 회화도 서울이 중심이었지만 호남지방은 유일하게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회화적 전통이 계승 발전된 곳이다. 초기에는 화순 출신의 양팽손, 중기와 후기에 해남의 윤두서 3대, 말기에는 진도의 허련일가가 오늘날까지 5대에 걸쳐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허형과 교유를 했다는 화순 사평의 사호 송수면이 맥을 이었다.

서화실에는 호남지역 화가들의 대표적 작품을 전시하여 호남회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1. 우리 고장의 서예(書藝)

우리 고장의 서예는 조선 후기에 완성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동국진체는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을 거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23)에 이르러 완성된 우리나라 고유의 서체이다. 해남의 윤두서는 이서와 친밀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다. 이광사는 천은사와 대흥사의 현판 글씨(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대웅보전이라는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 저것은 글씨도 아니니 떼어버리라고 초의에게 말했었는데, 유배가 풀려 돌아오면서 다시 그 현판을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를 쓰고, 신지도로 유배를 와 우리 고장의 서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진도의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이어간다. 광복 이후에는 진도 출신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서예(書藝)라는 용어를 만들고, 소전체(素筌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한국 현대 서예를 꽃피운다. 근대 서예는 목정(牧丁) 최한영(崔漢泳. 1902-1988), 근원(槿園) 구철우(具哲祐. 1904-1980)와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1907-1981), 남룡(南龍) 김용구(金容九. 1907-1982),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1926-2007) 등이 있다.

 

입구 좌측에 집자되어 있는 ‘운업(芸業)’은 옥동 이서의 글씨.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業)’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이익(李瀷)의 형제들

이익{1681(숙종 7)∼1763(영조 39)]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팔대조 계손(繼孫)이 성종 때에 벼슬이 병조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이 때부터 여주 이씨로서 가통이 섰다.

증조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지냈고,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에서 사간원대사간으로 환임(還任)되었다가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다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하진(夏鎭)과 그의 후부인 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2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죽었다.

이씨 소생은 청운(靑雲) 이해(李瀣), 서산(또는 섬계) 이잠(李潛. 1660~1706), 옥동 이서(李漵. 1662~1723) 등 3형제이다.

이잠(李潛)은 16세가 되던 1675년(숙종 1) 을묘사마시(乙卯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지만 아버지의 경계에 따라 대과 응시를 미룬다. 당시 매산은 그가 재주만 뛰어나고 덕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큰 그릇은 일찍 이루어지는 것을 꺼린다(大器忌早成).”고 경계하였다. 하지만 이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부친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되고, 2년 뒤 그곳에서 운명하자 이잠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이후 이잠의 삶은 비분과 강개에 가득 차게 되었다. 비록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6년간 남인(南人)의 재집권 시기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노론(老論) 계열이 정권을 장악하자 정치권에서 소외된 남인의 후예로써 그는 강한 좌절감을 느꼈다. 이런 좌절감 속에서 그는 무명옷과 짚신 차림으로 자연을 유랑하며 주변의 어린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의 삶을 일관하였다. 특히 그는 부친의 사후 안산(安山)에 은거해 있던 권대후(權大後)의 딸인 계모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문안을 드리고 막내동생 이익의 학업을 지도하는 것 이외에는 일정한 거처나 목적이 없는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다. 평소 노론계 김춘택의 행위에 강한 불만을 느껴 김춘택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인 원자(元子) 이윤(李昀: 뒤의 景宗)의 세자 책봉을 미루는 것이 원자를 제거하고 연잉군(延礽君: 뒤의 英祖)을 후사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그는 1706년(숙종 32) 9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당시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계의 거센 반발과 숙종의 진노를 일으켜 그는 참혹한 국문을 당한다. 9월 18일부터 25일까지의 국문(鞠問)에서도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25일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의 상소는 이후로 계속 언급되어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양 극단으로 나뉘어졌다.

이서(李潊.1662~1723)의 자는 징지(徵之), 호는 옥동(玉洞)ㆍ옥금산인(玉琴散人). 아버지는 대사헌 하진(夏鎭)이며, 이익(李瀷)의 형이다. 관직은 찰방에 그쳤다.

충주에 살고 있던 그가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은 1694년(숙종 20)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박세채(朴世采)의 천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글씨를 잘 썼는데, 진체(晉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필법을 계발하여, 『성재집(性齋集)』에서 이르기를 “동국(東國)의 진체(眞體)는 옥동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다.

권씨 소생으로는 이익(李瀷. 1681~1763)과 그의 형이 있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경신년인 1680년(숙종 6) 3월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에게 궤장이 내려졌다. 궤장은 나라에 공이 있는 공신이나 조정에 오래 봉직한 신하들에게 내려지는 지팡이로써 궤장을 하사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인 셈이다. 더구나 그의 조부인 허잠에게까지 시호가 내려져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연시연((延諡宴 : 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열렸다.

  연시연 당일,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일명 ‘유악(油幄)’이라 불리는 이 차일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세도가 높은 양반이라도 일체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왕실에서만 사용하였고, 왕의 윤허없이는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이 왕의 윤허도 받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빌려가서 썼던 것이다. 숙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허적의 집을 염탐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남인이었고 서인은 김만기 ․ 신여철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즈음 이번 연회에서 병조판서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독주로 죽일 것이며, 허적의 서자 허견은 무사를 매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만 참석하였던 것이다.

   이에 숙종은 훈련대장을 서인계인 김만기에게 넘기고, 총융사를 신여철로 삼게 했다. 병조판서가 김석주였기 때문에 남인은 손쓸 방도가 없었다. 거기에다 철원에 귀양가있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에 앉히고 조정의 요직을 모조리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하여 문 밖으로 내쫓으라고 하였다. 바로 환국(換局), 정국이 확 뒤바뀐 것이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남인 인사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들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는 이 환국 이후 드디어 저 유명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2. 윤두서 일가의 예술세계

(尹斗緖 一家 藝術世界)

해남 윤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은 우리 고장 전통화단의 토대를 이룬 산실(産室)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자는 효언(孝彦)이다.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로 유학(儒學), 천문지리(天文地理), 수학(數學), 병법(兵法) 등 각 방면의 학문에 능통했다.

또한 <자화상>과 〈심득경 초상〉등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내면의 정신세계를 사실적 표현하여 인물화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아가 회화의 새로운 장르로 풍속화를 개척하고, 남종화를 수용하여 조선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이로 인해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부르고 있다.

그의 아들 윤덕희(尹德熙. 1685~1776)는 아버지와 함께 말 그림의 대가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다양한 신선그림을 남겼다.

손자 윤용(尹愹. 1708~1740)도 가법(家法)을 전수받아 나비와 잠자리 등의 미세한 부분까지 살피고 똑같이 그렸다고 한다.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를 뛰어넘는 사실적 묘사가 돋보이지만, 뜻을 펴지 못하고 33세에 요절하였다.

 

(1) 물소리를 듣는 노승(樹下老僧圖)

윤두서(尹斗緖) 18.8×56.6cm

그림의 왼쪽 빈 공간에는 “가사는 어깨에 걸쳤고, 긴 눈썹은 희게 빛나는데, 지팡이를 기대고 앉아, 흐르는 샘물 소리 듣고 있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아니 한데, 내 마음 그윽한 곳에 이르니 생명 없는 나무와 돌까지도 함께 참선한다.”라는 시가 씌어있다.

그림의 배경은 나무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이 간결하다. 부채 아랫면을 따라 지면의 선이 그어지고, 중앙의 나무 한 그루는 옆으로 휘어져 올라가다가 가지들이 화면 윗면을 덮는 윤두서가 즐겨 쓰는 구도를 볼 수 있다.

깡마른 늙은 스님이 지팡이를 어깨에 기대고서 나무 그늘 밑에 걸터앉아 흐르는 개울 물소리를 듣고 있다. ‘늙은 스님’은 윤두서가 즐겨 그리는 소재로, 승려를 그릴 때면 항상 성총(性聰 1631~1700) 스님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관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노승의 튀어나온 정수리와 긴 눈썹은 오랜 수양과 경륜을 암시하며,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에서 그의 정신적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노승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듯하다.

윤두서는 물소리를 듣는 노승을 통해서 우주자연의 이치와 깨달음의 그윽한 경지를 표현하였다. 윤두서는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하면서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2) 하루를 마치다(家物帖)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종이에 색

비교적 빠른 필치로 간략하게 표현된 두 그림은 모두 삶의 터전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되돌아가는 인물을 각각 그린 것이다. 소박한 색채와 수묵으로 그려진 필법이 사용되어 윤두서가 모색한 고아한 화풍이 잘 드러난다.

가물첩은 1714년 윤두서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익한(崔翼漢)이 꾸민 화첩(畵帖)으로, 윤덕희가 ‘가물첩(家物帖)’이라는 표지 제목을 썼다. 이 화첩은 그림 23면과 글씨 6면, 그리고 발문(跋文) 1면 등 모두 3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9년 중앙박물관이 윤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던 화첩을 구입하였다. 공재의 인장이 찍힌 산수화는 6점(4점

 

은 산수화, 2점은 산수인물도)이다.

가물첩은 수묵과 백묘화법(白描畫法:채색, 음영을 가하지 않고 윤곽선만을 그리는 것)으로 그려진 점이 특징이다. 실린 그림들은 산수화 ․ 산수인물화 ․ 인물화 ․ 동물그림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한 시기에 일괄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3) 구름을 바라보다(坐看雲起詩)

윤두서(1668~1715). 종이에 색

시를 그림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멋진 서체로 썼다. 그림 옆에 쓴 “흥이 오면 자주 홀로 오가며, 좋은 일도 그저 혼자 알 뿐이다. 가다가 물이 끝나는 곳에 이르면, 앉아서 구름이 이는 것을 바라다 본다.”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왕유는 중년에 벼슬을 버리고 망천(輞川)에 은거하여 시를 짓고 살았다. 윤두서의 이 작품은 시를 그림의 화제로 사용하고, 시를 자신의 멋진 서체로 쓴 작품이다. 처사로서 시서화 삼절을 추구한 그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림의 스님은 윤두서가 즐겨 그린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이며, 다소 초췌한 선비는 도인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 그림이 있는 관월첩은 윤두서의 <강행(江行)>을 비롯하여 동시대를 살았던 박동보(朴東普), 김창석(金昌錫), 유천군(濡川君), 정서(鄭瑞), 김진여(金振汝) 등 선비화가와 직업화가의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4)공자와 제자들(十二聖賢畵像帖)

윤두서(尹斗緖) 1706년. 43.0×31.2cm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둘째 형인 서산(西山) 이잠(李潛. ?~18C초)의 이 화첩은 유교의 성인 등 열두 분을 네 폭에 담은 것으로 아래와 같은 서문이 있다.

“오늘날 육경의 문자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해가 얕은 사람은 그 말을 얻고, 깊은 사람은 근본을 얻는다. 근본을 얻었다는 것도 사람을 얻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이에 그림으로 상을 그려 생각하고 경모한다. 이것이 바로 그림첩을 만드는 까닭이다. 지난날 나의 가형 서산공의 친구이며 재주 있는 분에 윤효언(윤두서의 字)이 있었는데, 그림을 즐겨 절필이라 불렀다. 서산공이 네 폭을 부탁했다. 주공을 한 폭으로 했다. 공자가 책상에 기대고 안연과 자유가 앞에 서 있으며 증자가 책을 들고 앞에서 도를 강의하는 것을 합해 한 폭으로 했다. 주자가 의자에 앉아 있고 황간과 채침이 서 있는 것을 합하여 한 폭으로 했다. 합하여 열두 상이다.

공재가 승낙하고 그림을 다 그리기도 전에 서산공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금 후에 완성되어 공의 부탁에 따라 집으로 보내졌는데, 이승이나 저승에 바쳐도 보물로 삼을 만했다.”

이 화첩은 이잠의 부탁으로 1706년에 윤두서가 그린 것이다. 화첩의 오른쪽에 4점의 그림이 있고, 왼쪽 면에는 이잠의 동생 성호 이익의 찬문이 있다. 윤두서는 이 그림들을 통해 성현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나타내고자 했다. 특히 성현 가운데에서도 각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 주공, 공자, 맹자, 주자에 대해 존경과 흠모를 나타냈다. 그리고 각 그림의 주인공 네 분의 비중에 따라 주위의 보조인물과의 관계를 설정했다.

전시된 부분은 두 번째 면이다. 탁상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이 공자(孔子)이며 왼쪽에 서 있는 두 인물은 제자인 안연(顔淵:덕행의 상징)과 자유(子游:문학의 상징)이다. 무릎을 꿇고 죽책(竹冊)을 들고 있는 사람은 공자의 도를 계승한 증자(曾子:효행의 상징)이다. 12인의 성현을 경모하기 위해 그려진 만큼 필선이 매우 엄정하면서도 부드럽다. 네 명의 성현이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공자가 가장 크게, 그리고 중앙에 그려져 있으며, 기타 인물들은 낮게, 그리고 작게 그리는 이러한 특징은 고대의 인물화 표현법을 따른 것이다.

공자 뒷면의 방형을 가리개라고 하는데, 청나라 때까지 남쪽을 향해 세웠다고 한다.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둘째 형인 이잠(李潛. 1660~1706)의 부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윤두서의 뛰어난 인물화 솜씨가 잘 나타나 있다.

○주공(周公)

BC 12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정치가.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주(周 : BC 1111경~255)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공자는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했다.

주공은 주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무왕의 권력 강화를 도왔다. 무왕이 죽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신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길을 택했다. 그 후 성왕에게 통치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공이 섭정직에 오르자마자 그의 세 동생 관(管)·채(蔡)·곽(霍)과 몰락한 은(殷)의 후계자 무경(武庚)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반란을 진압했으며 또한 몇 차례의 정벌에 나서 황허 강[黃河] 유역의 화베이[華北] 평원 대부분을 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 근처에 제국의 동쪽 지역을 관할하기 위한 동도(東都)를 세웠다.

그는 은이 통치하던 지역에 대한 은의 지배를 완전히 뿌리뽑고, 정복한 지역에 새로운 행정단위를 설치하여 믿을 만한 주의 관리들이 이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7년 동안 섭정한 후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날 때쯤에는 주의 정치·사회 제도가 중국 북부 전역에 걸쳐 확고히 수립되었다. 그가 확립한 행정조직은 후대 중국 왕조들의 모범이 되었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주공을 대단히 숭배하여 한때는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허약해지고 늙은 것 같다"라고 했다. 중국 고전의 하나인 〈주례 周禮〉의 저자가 주공인 것으로 잘못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회(顔回 : B.C 521?~B.C 491?)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현인. 자는 연(淵).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이며, 공자보다 30세 연소(年少)이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학문과 덕이 특히 높아서, 공자도 그를 가리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고 도(道)를 즐긴 것을 칭찬하였다. 은군자적(隱君子的)인 성격 때문인지 그는 “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든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자(莊子)와 같은 도가(道家)에게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저술(著述)이나 업적은 남기지 못했으나 《논어(論語)》에 <안연편(顔淵篇)>이 있고, 그 외에 몇몇 서적에도 그를 현자(賢者)와 호학자(好學者)로서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전하는 구절이 보인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자유(子游)

공자 문하의 십철(十哲)의 한 사람. 오나라(吳公) 사람. 본명은 언언(言偃)

중국 춘추시대 인물로 문학을 대표 할 만 한 학자이다. 성은 言(언), 이름은 偃(언)이며, 자는 子游(자유)이다. 노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공자보다 45세 연하이다.

孔子의 弟子들 가운데서 文學的인 소양이 가장 풍부해 일찌기 魯(노)나라 무성의 城主(성주)가 되어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어느 날 孔子가 子游가 다스리고 있는 무성으로 가는 도중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흐믓한 기분으로 무성에 도착하여 子游에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있을까?’ 라고 말했다.

이에 子游는 孔子의 뜻을 알아차리고 ‘前에 제가 스승님으로부터 君子가 禮와 樂의 道를 배우면 백성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고 백성이 예와 도를 배우면 다스리기 쉽다고 하시던 말씀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자 공자는 수행했던 제자들에게 ‘子游의 말이 옳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은 농담이었다.’ 하며 껄껄 웃었다.

맹자도 "자하, 자유, 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이 있다."라고 하였다. 자유는 사람됨이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대화나 일의 처리에서 소홀함이 없었다. 이는 자하와의 논쟁에서도 알 수 있다. 자하가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출입하여도 괜찮다"고 하자 자유는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고 진퇴하는 예절을 당해서는 괜찮으나, 이는 지엽적인 일이요 근복적인 것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자하가 듣고 "언유의 말이 지나치다. 군자의 도에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전수하며, 어느 것을 뒤라고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초목에 비유하면 구역으로 구별되는 것과 같으니. 군자의 도가 어찌 이처럼 속이겠는가? 처음과 끝을 구비한 것은 오직 성인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하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누어서 논할 수 없음을 주장한 반면, 자유는 그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큰일에는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작은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십철(十哲)

공자(孔子) 문하의 열 사람의 고제(高弟). 곧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성균관대성전 등에는 문선왕과 네 배향의 신위를 문묘에 봉안하고, 십철은 동서 익실에, 역대로 종사한 여러 현인은 동 ․ 서무에 모시었다.

 

(5)윤덕희[尹德熙.1685(숙종11)~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 · 연포(蓮圃) · 연옹(蓮翁). 아버지는 두서(斗緖)이다. 벼슬은 도사(都事)를 지냈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특히 말과 신선(神仙)을 잘 그렸다. 1748년(영조 24) 1월 숙종 및 선왕들의 어용(御容) 모사에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감조관으로 참여했고, 그 공으로 2월 6품으로 승진해 정릉현감을 지냈다. 〈무후진성도 武侯鎭星圖〉·〈미인기마도 美人騎馬圖〉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은 그가 부친의 화풍을 성실히 추종했음을 보여준다. 산수화는 〈산수인물도〉(국립중앙박물관)와 같이 전통성이 강한 작품과 남종화풍의 작품, 그리고 〈도담절경도 島潭節景圖〉와 같은 실경산수화도 남겼다. 인물화는 〈진무상 眞武像〉(국립중앙박물관)·〈수로도 壽老圖〉(간송미술관)와 같이 선인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인물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필치를 사용해 인물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공기놀이〉는 풍속화의 일면을 보여주며 말그림은 기운이 없고 축 늘어진 모습이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은 그가 아버지의 작품을 정리해 꾸며놓은 것이다.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481호. 고산 윤선도 전시관 소장

소유자 :윤형식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인 윤두서(1668∼1715)의 서화첩이다. 윤두서는 정선·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3대 화가이며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말 그림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서화첩은 ‘자화상’과 ‘송하처사도’,『윤씨가보』라 쓰여진 화첩 2권과『가전유묵』이라고 꾸며진 서첩 3권 등이다. 화첩 1권은 선면(헝겊이나 종이를 바른 부채의 겉면) 그림을 모아 놓은 것으로 숙종 30년(1704)∼숙종 34년(1708) 사이에 그려진 것이다. 다른 1권은 크기가 다양하며 내용도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윤두서가 잘 그렸다는 말 그림은 ‘백마도’와 목기를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등이 있으며 다수의 미완성 그림들도 수록되어 있다. ‘백마도’는 말이 비대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며 뒷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생동감을 준다.

윤두서의 풍속화는 후에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화첩은 선비화가였던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그림솜씨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그의 실학자적인 면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다.

지본수묵(紙本水墨)또는 담채(淡彩)한 공재(恭齋)의 소품(小品)들을 어떤 기준 없이 집성(集成)한 것으로서, 크기나 소재가 다양하며 기법도 그러하여 공재회화(恭齋繪畵)의 이면(裏面)을 보여 주는 자료라 하겠다. 일일이 관지(款識)를 표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미정제(首尾整齊)한 완성품을 보기보다는 동기가 그러했듯이 자유스러운 선택이나 담담한 시필(試筆)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공재(恭齋)는 「편공인물산수비기소장(偏工人物山水非其所長)」이라 하여 인물에 장기(長技)가 있었던 듯 한데 그 기량을 추리할 자료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보이듯이 숙종(肅宗)이 그 어용모사(御容模寫)에서 공재(恭齋)를 생각하였으나 남구만(南九萬)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일, 또 사인(士人) 심득경(沈得經) 초상(肖像)을 사후에 그린일 등이라 하겠다. 그러나 인물화에 있어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추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 화첩(畵帖)과 함께 보존되어 온 그의 자화상이라 하겠다.

조선조 후기 초엽에 속할 화단(畵壇) 연대기적(年代記的)인 면에서 보아도 그는 산수(山水)나 준마인물(駿馬人物)에 있어 송대원체풍(宋代院體風)이나 후대(後代)의 화보풍(畵譜風)을 가장 두드러지게 견지(堅持)한 대표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화첩(畵帖)이 사인화가(士人畵家)로서의 회화 경향을 보임은 물론 향토의 풍습에 화안(畵眼)을 돌린 점은 풍속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된다.

 

(6) 폭포를 바라보다-연옹화첩(蓮翁畵帖)

연옹(蓮翁) 윤덕희(尹德熙. 1685~1786). 종이에 색.

34.9×22.1cm

「연옹화첩」은 산수화 4점과 <관폭(觀瀑)>, <군선경수(群仙慶壽)>, <나무 아래 준마(樹下駿馬)> 등 총 6면으로 이루어진 윤덕희의 작품집이다.

산수화의 구도와 필치, 인물의 묘사에서 부친인 윤두서의 영향이 보인다.

<관폭(觀瀑)>은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보통 관폭은 처사나 도인들이 폭포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그림은 아이 ․ 어른 등 모두 12명이 등장하며, 그들의 시선은 폭포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곳도 바라보고 있어 독특하다.

붓을 쓰는 법이나 나무를 그리는 법 등에서 당시 화풍보다는 화보(畵譜) 중심의 전통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아버지인 윤두서의 영향을 엿볼 수 있지만 윤두서의 그림에 비해서는 좀 더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폭포는 자연스러운 반면 인물들은 어딘지 세워 놓은 듯 딱딱해 보인다. 계곡에서의 특별한 모임인 듯 선비들과 시동(侍童)의 모습이 보인다.

 

<군선경수도>는 여러 신선들이 남극노인의 장수를 축하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남극노인은 인간의 수명을 맡고 있다는 남극성(南極星)의 화신으로, 노인성(老人星) 혹은 수성(壽星)으로도 부른다. 오른쪽 절벽 위의 넓은 마당에는 인자한 모습에 머리가 긴 남극노인이 있다. 남극노인 옆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사슴이, 뒤편에는 수명을 적은 두루마리와 약사발 등이 있으며 배경 역시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영지버섯이다. 절벽 아래 바다에는 호로병과 지팡이를 든 이철괴(李鐵拐), 파초선을 든 종리권(鍾離權), 칼을 찬 여동빈(呂洞賓), 박판을 든 남채화(藍采和), 복숭아를 든 동방삭(東方朔) 등이 그려져 있다.

<나무 아래 준마>는 나무 아래 서 있는 말을 빠르고 힘찬 필선과 짙은 먹으로 그린 작품이다. 말의 생태와 특징을 잘 포착하여 대상만을 강렬하게 표현하여 윤덕희의 말 그림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윤덕희의 부친인 윤두서는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해 항상 준마를 길렀는데, 남태웅은 윤두서의 말 그림에 대한 회화론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자세히 보는 것을 계속하였다. 말의 모양과 생태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 볼 수 있고,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후에야 붓을 들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의 참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터럭 하나라도 제대로 안 되었으면 즉시 찢어버렸다. 반드시 참 모습과 그림이 서로 어울린 다음에야 붓을 놓았다.”

 

(7) 소나기 내리는 강을 건너다(驟雨圖)

연옹(蓮翁) 윤덕희(尹德熙. 1685~1786). 종이에 색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소나기(驟雨)를 만난 사람들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실감나게 그렸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왼쪽에 치우친 구도이며 오른쪽에서 비바람이 불어오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멀리 험준한 암벽과 바위 위에 뿌리를 드러낸 나무를 우모준법(牛毛皴法)으로 그려 빗방울이 맺힌 듯 축축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화면 중앙의 사람들은 다소 이국적인 모습이며 우산과 옷을 이용해 비를 피하고 있다. 도롱이를 입은 뱃사공은 험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를 젓고 있는 모습에서 배에 탄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8) 말을 탄 사람(馬上官人圖)

-윤덕희 작. 1732년(48세 때)

-중국풍의 관복을 입은 인물이 말을 타고 행차하는 모습 표현

-먹선만으로 사람과 말을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묘사

-화면 오른쪽 중단에 ‘壬子菊月蓮翁尹敬伯寫’라는 화제로 보아 그가 48세 때인 9월에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말그림 솜씨는 아버지 윤두서에게서 전승

-우하단에 ‘阮堂’의 낙인이 있어 김정희가 소장한 듯하여 그림의 가치를 더해줌

 

3.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허련(許鍊) 일가의 예술세계

소치 일가의 전통 계승(5대째)

허련[小癡] : 양천 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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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큰 米山]○ ○ 허형[작은 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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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허건[南農] 허림[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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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문[林田]

허진[현재 全南大 美大교수]

 

우리 고장 진도 출신의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은 당시 유행하던 화풍을 자신의 안목으로 이해하여 남종화의 새로운 경지를 연 화가이다. 허련은 녹우당(綠雨堂)에서 윤두서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30대 초반에 대흥사(大興寺)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소개로 김정희 문하에 들어가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추사로부터 “그의 화법이 우리나라의 누습(陋習)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화수집으로 이름 난 헌종(憲宗. 1827~1849)은 그에게 서화 감평에 대한 조언을 구하며, 이를 계기로 당대의 지성인과 교유를 한다.

 

허련은 산수화 외에도 사군자와 인물화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허모란이라고 불릴 만큼 모란 그림에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또한 시문과 글씨에도 능통하여 소치삼절(小癡三絶)로 부른다.

허련은 49세에 고향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호남 예맥의 기틀을 마련한다. 1892년 죽을 때까지 계속된 그의 작품 활동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1~1938)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

 

친족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등으로 계승되어 우리 고장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허씨들은 원래 경기도에서 살다가 진도로 내려왔다고 한다. 진도에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입도조(入島祖) 허대(許垈)는 임해군의 처조카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이 역모로 몰리면서 임해군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진도로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허대의 장남 득생은 용,순,방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순의 후손이 소치, 미산, 남농이고 막내 방의 후손이 의재 허백련이다. 의재는 혈연으로 따지면 소치의 종고손(從高孫)이 되고 법연으로 보면 소치의 아들인 미산으로부터 직접 그림수업을 받은 제자다(남농과 의재는 18촌 쯤 된다).

 

(1)소치선생 글씨. 고각상설(橰閣賞雪)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

. 종이에 먹

-‘고각에서 눈을 감상하다’는 뜻

-한시의 각 행 끝자 ‘지수기치희(知垂奇痴噫)’를 운자(韻字)로 썼다.

 

산문을 한 번 나섰더니 세상이 다 알고(山門一出世皆. 산문일출세개지)

칠십 평생을 살았더니 백발만 드리웠네(七十年來白髮. 칠십연래백발수).

시렁 가득한 그림들은 모두가 특별하고(萬架圖書千本異. 만가도서천본이)

뜰을 에워싼 화죽은 사계절 알려준다네(繞庭花竹四時. 요정화죽사시기).

성은 특별하여 벼슬살이 시름에 늙었고(恩侈內府緣秋老. 은치내부연추로)

이름 날렸으나 중원의 대치는 잊었다네(名騁中州失大. 명빙중주실대치).

죽은 뒤 교묘한 서법 전수받은 사람 없어(死後無人傳妙法. 사후무인전묘법)

운림에서 미가홍월선 하렸더니 절로 탄식만(雲林虹月正堪. 운림홍월정감희).

-김경해(金經海)

 

*繞(두를 요, 얽힐 요). 侈(사치할 치). 騁(달릴 빙). 堪(견딜 감, 맡을 감=堪當)

 

소치선생 고아해 마음 통한 지 오래인데(先生高雅久心. 선생고아구심지)

마침내 벼슬살이 다시 고개 떨어뜨렸다오.(及覩官居首更. 급도관거수경수)

복자천 거문고 타도 저절로 이루어졌고(宓子彈琴應本趣. 복자탄금응본취)

왕교 신발로 날아도 이상할 것 없다오(王喬飛舃未爲. 왕교비석미위기).

틈틈이 그림 그려야 무병장수 합당할진데(每閒朱墨宜長壽. 매한주묵의장수)

너무도 그림 좋아하는 소치 선생 있었다오(偏愛圖書有小. 편애도서유소치).

원래는 나그네 아닌데 이리저리 떠돌았고(自是旅蹤萍梗轉. 자시여종평경전)

천애에 송별하여도 탄식할 필요 있을거라고(天涯送別不須. 천애송별불수희).

-소치 씀

 

*覩=睹(볼 도). 舃(신-履- 석, 까치 작). 閒(틈 한, 사이 간). 蹤(자취 종). 萍(부평초 평). 梗(대개 경)

噫(탄식할 희, 하품 애, 트림할 애)

 

(2) 산수 병풍

미산 허형(許瀅. 1862~1938). 종이에 색

허련(許鍊. 1808~1893)의 넷째 아들인 허형이 그린 산수도이다. 수묵담채로 4계(四季)의 산수를 그린 1폭은 미법산수이고, 9폭은 담담한 필치의 남종화풍을 보인다. 각 폭에는 14자의 제발이 있으며, 병풍의 끝 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冬景山水)에 ‘미산(米山)의 주문방인(朱文方印)과 그의 생애 말년에 개명했던 ’‘허준(許準)’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어 말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3)팔군자(八君子圖)

소치 허련. 종이에 색

허련은 사군자 외에 팔군자 또는 십군자의 형식으로 많은 병풍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처럼 팔군자도의 경우 네 폭에는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다른 네 폭

에는 소나무, 오동나무, 파초, 연 등을 그렸다. 각 폭에는 식물을 괴석(怪石)과 함께 배치하고 그 옆에는 해당 식물의 미덕을 칭송하는 시를 써 넣었다.

작품에서 다루어진 꽃과 나무들은 모두 동양에서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군자에 비유되어 시와 그림으로 다루어진 소재들이다. 허련은 여덟 가지 식물의 생김새에 따른 특징을 간결하며 힘찬 특유의 필치로 묘사하였다. 오동나무를 그린 것이 이 병풍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4) 산수화첩(山水畵帖)

허련(許鍊) 27.0×43.0

허련은 회화의 여러 방면에 모두 능했지만 특히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허련의 산수화는 대체로 그가 진도로 귀향하여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기 시작한 49세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전기의 작품 가운데 30대 이전의 것은 남아있지 않아 화가로서의 초년기 작품 경향을 알 수 없다. 36세에 그린『소치화품(小癡畵品)』은 김정희를 찾아가 그림을 그린 후 찬문을 받은 것이다. 산수화는 문인화가 추구하는 간일(簡逸)하고 소산(疏散)한 분위기의 사의적(寫意的) 화풍으로 명대 오파(吳派)의 영향이 느껴진다. 지두화(指頭畵)는 그가 3O대에 지두화에도 능했음을 보여주며, 그 가운데 산수화는 예찬식(倪瓚式) 화풍을 보여준다. 39세에 그린『연운공양첩(煙雲供養帖)』은 문인화의 여러 화풍을 소화하여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기가 남종문인화의 여러 화풍을 소화해낸 시기라면 후기에는 황공망·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거친 독필(禿筆:끝이 달아서 무디어진 붓. 몽당붓)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함께 푸르스름한 담청을 즐겨 쓴 개성 있는 담채가 돋보인다. 반면 중년 이후의 작품들은 대체로 식객으로 떠돌며 명사나 지방 유지들의 취향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제작한 것이 많아 새로운 면모보다는 양식화된 경향을 보인다.

8점의 산수화로 구성된 이 화첩은 원나라 말기의 사대가 예찬(倪瓚)의 산수화 화법을 따랐다. 근경의 흙으로 쌓아올린 둑 위에 수종이 다른 나무와 인적 없는 쓸쓸한 정자, 중경에는 물과 그 뒤로 원산을 배치하는 방식의 구도에 명대(明代) 문인화풍도 보이고 있다. 허련 특유의 푸르스름한 담채(淡彩)와 윤기있는 먹의 구사가 특징이다. 무르익은 필력에서 허련의 중년기 이후 득의작(得意作)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발(題跋)에 쓰인 내용은 명대의 문인화가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저술한 「화지(畵旨)」의 글을 옮긴 것들로 문인화를 지향하는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먹을 아끼기를 황금같이 해야만 화가의 상승경지에 오른다.’

 

(5)채소와 과일(菜果圖)

소치 허련. 종이에 색

각종 채소와 과일을 마치 사생(寫生)하듯이 수묵으로만 그려낸 작품이다. 남겨진 발문(跋文)에 의해 1839년 허련의 나이 32세에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또 ‘허유(許維)’라는 인장이 사용된 것도 이 작품이 초기작임을 보여주는 주요한 근거이다.

작은 화면에 여러 종류의 채과를 섬세한 붓놀림으로 정교하게 그린 것으로 보아 매우 정성을 다하여 그린 듯 하다.

채과도는 채소와 과일을 주제로 한 그림을 뜻하며 소과도(蔬果圖)라 부르기도 한다.

이 그림은 추사에게 그림을 사사하던 때로 중국의 화보를 보고 그린 듯하다. 본디 김황산이란 사람에게 주어 그의 조카가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여년이 지난 후 그 그림을 돌려받은 듯하다.

 

(6) 국화와 대나무(菊竹圖)

허련(許鍊) 22.5×32.0cm

국화와 대나무를 그린 이 두 그림은 본래 같은 화첩에 속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중앙에 접힌 선이 보인다). 늦가을의 추위와 찬 서리를 견뎌내며 늦게까지 꽃을 피우는 국화, 곧은 줄기로 추운 겨울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특성은 덕과 지조를 갖춘 군자에 비유되어 문인 사대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국화 그림에는 괴석 옆으로 뻗어난 가지에 탐스런 국화꽃이 피어올라 은은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푸른빛과 분홍빛이 어우러진 담채가 청아하다. 화면 상단에는 명나라의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이 지은 글이 쓰여 있다.

대나무 그림은 수묵으로만 그렸는데 곳곳하게 뻗은 굵은 줄기와 활처럼 휘어진 가는 줄기, 먹빛이 다른 잎의 조화에서 이루어진 아취와 격조가 뛰어나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당대(唐代) 18학사의 한 사람인 허경종(許敬宗. 592~672)이 지은 죽부(竹賦)가 쓰여 있다.

 

국화는 그려도 향기는 그릴 수 없고(중략)

위는 부드러움으로 이슬을 막고,

아래는 단란함으로 바람을 맞이한다.(중략)

 

* 모란(牧丹)

허련(許鍊) 26.0×12.6cm

허련은 사군자 외에도 모란 ․ 괴석 ․ 노송 등에서도 탁월했는데 특히 묵모란 그림에서 일가를 이루어 ‘허모란’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양에서 모란이 갖는 상징은 ‘부귀(富貴)’이다. 그가 모란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와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귀를 갈망하는 당시의 풍조와 함께, 추사의 죽음 이후 문인사대부적인 취향과 연결되는 사군자 그림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을 그렸기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중년 이후 이곳저곳을 주유할 때 지방관 ․ 지방 유지들의 요청에 따라 수월하게 그려줄 수 있었던 소재로 보기도 한다.

허련의 많은 묵모란도는 다분히 형식화된 구성과 소재, 필치를 구사한 경우가 많아서 다양한 화법을 구사한 산수도들과는 비교가 된다.

 

-모란은 ‘8군자’, ‘10군자’ 형식의 병풍그림의 소재

-허균의 후손으로 진도에서 ‘운림산방’에서 5대째 남종화를 이어오도록 한 원조

-모란은 화조화의 소재 중 하나임

-조선 후기의 심사정, 강세황이 잘 그렸고, 말기엔 허련이 유명함

-모란은 부귀 상징, 선물용으로 많이 그려짐.

-몰골법에 의해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빠르고 능숙한 필치로 그려내는 형식의 모란도는 4남 허형에 의해 가법(家法)으로 전수된 특유의 화풍

 

4. 송수면 일가의 예술세계(宋修勉 藝術世界)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1847~1916)은 우리 고장 화순 사람으로 허련(許鍊)에 이어 호남 문인화를 꽃피운 대표적 문인화가이다.

송수면은『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편찬한 우리나라 서화가의 인명사전]의 “대나무 그림이 뛰어나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묵죽(墨竹)에 뛰어난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작품에는 묵죽을 비롯한 사군자 그림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송나비”로 불릴 만큼 나비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비 그림에서 그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아들 매사(梅沙) 송대회(宋大會. 1882-1975)도 그림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조카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 1872~1941)는 한 때 송수면의 양자로 있었다. 보성에서 활동한 문인 소파(小坡) 송명회(宋明會. 1872~1953)와 서예가 설주(雪舟) 송운회(宋運會. 1874~1965) 형제도 같은 집안사람이다. 이렇듯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난 문인이 배출된 가문이다.

 

(1) 매화 1

송수면(1847~1916). 종이에 색

-매화 줄기는 가장자리를 굵은 선으로 두 번 그어 굵게 표현함

-지묵법(漬墨法)으로 꽃을 그리고 가는 선으로 꽃술을 그러 녛음

-꽃받침은 굵고 짧은 몇 개의 점을 찍어 가지에 바짝 달라붙은 매화의 특징을 살렸다.

-부러진 줄기와 가는 가지의 간결한 구도, 그리고 꽃술의 표현 등에서 조선 중기 매화그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눈 가득한 산 중에는 고사(高士)가 누워있고,

달 밝은 숲 아래에 미인이 오는구나. 사호

* 고사와 미인은 매화를 뜻함

 

○지묵법(漬墨法=거품먹법)

먹물에 아교를 타서 쓰거나, 아교가 칠해진 화지(礬水紙)에 먹물을 약간 두텁게 칠해 놓으면 천연적인 윤곽선이 형성되는데 더러는 바위의 이끼라든지 강이나 바닷가의 젖은 모래밭이나 뻘밭을 그리는 데 이 법을 사용한다. 획이 아니고 젖어서 생긴 거품자국처럼 자연적인 형상을 말한다.

 

(2) 매화 2

송수면. 19C말~20C초

-매화 줄기를 힘찬 필선으로 그어 표현한 작품임

-화면 아래에서 두 그루의 큰 줄기가 나오고 오른쪽의 줄기는 화면 중반부분에서 반전하여 아래로 꺾였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구성을 보인다.

-다른 하나는 중간에서 끝이 부러져 있다.

-굵고 거친 붓을 몇 번 꺾어 끝이 구부러진 뭉둑한 줄기를 만들고, 힘 있게 몇 번 그어 새로 난 마들가리를 그렸다.

-부러진 줄기와 가는 가지의 간결한 구도, 꽃술의 표현 등에서 조선 중기 매화도의 잔영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구슬을 두루 밟아도 눈은 녹지 않고

가지마다 흰 꽃(縞素)이 부드러운 비단(輕綃)을 감쌌네. 사호

#縞(호:명주, 흰빛), 綃(초:생사, 생명주실)

 

비백(飛白)

서법(書法)의 일종으로 후한대의 채옹(蔡邕)이 귀얄로 하얀 벽을 칠해가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했다. 글씨에 흰 귀얄흔적이 나타나며 획의 끝부분이 나부끼는 듯한 글씨체이다. 큰 글씨에 많이 쓰이는 이 비백은 일면에서는 단순히 획 속에 흰 공백을 남는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며, 이 부분이 효과적일 경우에는 획이 날아가는 듯 뜻을 내포한다.

 

* 태점(苔點)

산수화에 있어서 산이나 바위, 땅 또는 나무줄기 등에 자라난 이끼라든가 잡초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찍는 작은 점이다. 점의 크기와 농담(濃淡)의 차이에 의해 화면에 조화와 액센트의 효과를 주기도 한다. 붓을 세워서 끝으로 찍으며, 채색화에 있어서는 점 하나 하나를 윤곽선으로 돌리고 그 안을 녹청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위의 1, 2 그림은 명, 청 회화와 구성이 거의 같음

 

(3) 산수 1

송수면(宋修勉. 1847~1916). 종이에 색

-화순 출신의 문인화가. 진사시에 급제. 벼슬하지 않고 서울과 화순을 오가며 시서화(詩書畵) 전념.

-4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묵죽화가 많음

-두드러진 푸른 색조가 인상적인 작품

-구성과 표현에서는 전통적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간략한 묘사에 채색된 인물과 후경의 먼 산 사이로 보이는 건물의 모습 등은 조선 말기의 감각적인 산수화풍에서 영향 받았음을 보여줌

 

물가에 핀 복사꽃에 길 잃고

속세와 절연한 지름길 만들었네.

층층겹겹 산중에 따라 들어가니

비안개 침침하여 옛 계곡 막았구려.

-사호

 

(2) 산수(山水) 2

송수면(宋修勉) 75.3×32.5cm

-「고씨화보(顧氏畵譜)」 제 4책에 실린 막시룡(莫是龍 1537~1587)의 그림을 참고한 것이다.

-중국에서 1603년 발간된 「고씨화보」가 전래된 이후 조선 중기 우리나라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실제 중국 회화를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나라 화가들은 「고씨화보」등 화보를 통해 중국 회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자신의 회화적 기량을 연마하였다. 송수면의 산수화도 「고씨화보」에 실린 그림을 참고하여 그린 예가 적지 않은데 이 그림이 대표적이다.

 

낙엽은 궁촌 길에 깔려있고,

청산은 고사 문 너머 있네.

송라 옷은 가을빛을 띠고,

홀로 계곡의 근원을 찾아가네.“

 

화보(畵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판화로 제작하여 그것을 찍어 책으로 엮은 것으로, 후대에 화가들이 보고 그릴 수 있는 참고자료로서의 기능을 했다. 화가가 자신의 기량을 높이기 위하여 이전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중요한 방법이며 이를 바탕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게 된다.

화보로서 유명한 것은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등을 들 수 있다.

화보를 보고 따라 그리는 방법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① 임(臨) : 원작 옆에 비단이나 종이를 두고 옮겨 그리는 것으로 형태는 같으나 크기는 달라진다.

② 모(模) : 투명한 종이를 사용하여 윤곽을 본뜨는 것으로 원작의 형태나 필법뿐만 아니라 크기까지도 똑같이 베끼는 방법이다.

③ 방(倣) : 옛 대가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이나 필치를 본받아 그리는 것이다.

 

(3) 산수(山水) 3

송수면(宋修勉) 95.0×33.5cm

-미법산수(米法山水)로 그려진 작품으로 대부분 수묵으로 그려졌지만 인물과 나무 등의 표현에는 채색을 하였다.

-이 그림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송수면의 산수화에는 세부 묘사에서 어색한 부분들이 자주 눈에 띈다.

-화면 아래의 중앙에 보이는 가옥의 대문이나 이를 둘러싼 울타리의 묘사는 관념적으로 여기적(餘技的)인 모습이 보인다.

-시각이 일정하지 않고 관념에 의존한 표현방식은 마치 민화를 보는 것 같다. 산이나 언덕, 암석 등의 표현에서는 전통적인 양식을 습득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인물이나 가옥 등 세부 표현에서는 다소 서툴다.

-송수면은 사군자화 등에서는 격조 높은 수준을 보여주지만 산수화에서는 여기(餘技)에 머문 듯하다.

 

붉은 두견화 푸른 난 물가에 가득하고,

연기 피어 오른 평림은 망천과 흡사하네.

어떻게 이 같이 널찍하고 한가한 곳 얻겠는가.

산 바라보고 앉은 노인은 석양의 배에 있네.

 

*미법산수 : 안개가 자욱하고 습윤한 풍경을 발묵과 미점을 구사하여 표현한 산수화

 

(4) 산수(山水) 4

송수면(宋修勉) 88.4×36.1cm

-화면 아래에서 위로 산과 강이 대각선을 이루고 근경 ․ 중경 ․ 원경의 삼단 구성을 보이나 거리에 따른 비례나 먹의 농담이 변화가 없어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산과 암석의 묘사에서는 준법의 표현보다도 밝고 어두운 부분을 의식하여 표현하여, 굴곡을 따라 어두운 부분은 예리한 필선을 중첩한 다음 음영을 가하였다.

-이 외에도 나뭇잎을 나타낸 호초점(胡椒點)과 태점(苔點)들이 많이 찍혀있어 화면이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준다.

-근경의 가시만 남은 나무와 붉은 잎의 나무 표현으로 보아 가을 경치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사호는 사평 마을 앞의 호수 이름을 딴 것임.

*중국 화가들의 그림을 참고한 듯함.

*원근법이 느껴지지 못함

 

호초점(胡椒點)

붓끝에 먹을 묻혀 종이 위에 붓을 때리듯이 그리는 방법. 호초(胡椒)를 뿌린듯한 모양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