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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12. 8. 18:39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보물1683호
"검색문화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이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은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조영했던 다산초당의 전후좌우에 있는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의 
네 가지 경물을 읊은 칠언율시를 행서로 쓴 것으로 
어느 필적보다도 그 의미가 깊다. 
표지 제첨은 예서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다산친묵귤송당진장;茶山親墨橘頌堂珍藏)>
”이라 쓰여 있다.
정약용(丁若鏞)의 글씨는 초년에 전대의 명필 이광사ㆍ
강세황의 서풍을 따르다가 강진 유배 이후로는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이 첩은 강진 유배시절 이후의 정약용(丁若鏞)
의 서풍을 볼 수 있다.

정약용 필적 하피첩 보물1683-2호
"검색문화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소 재 지;
경기 성남시
《하피첩(霞帔帖)》은 
서문에 적혀있듯이 정약용(丁若鏞)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아내 홍씨부인이 바래고 해진 
치맛감 여러 폭을 부쳐오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구절을 직접 짓고 써준 것이다. 
제작연대는 경오년 즉 1810년(순조 10) 7월과 9월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이 서첩의 수량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 세 첩만 알려져 있다. 
현재의 《하피첩(霞帔帖)》3첩은 그 하나가 결락된 셈인데, 
각첩 표지에 ‘하피첩(霞帔帖)’이란 제목은 좀 남아 있으나 
그 아래의 ‘첩 순서’[帖次]는 탈락되어 몇 번째 첩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하피첩(霞帔帖)》3첩은 그 중 두 첩에 각각 
1810년 7월[首秋]과 1810년 9월[菊秋]의 서문이 있어 
강진 유배시절인 1810년 기년작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또 원래의 네 첩 모두가 전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세 첩 중에는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구절을 지어 써주다
[“작계어이유이자(作戒語以遺二子)”ㆍ“경
사계자구(聊寫戒子句)”]는
서문이 있어 정약용(丁若鏞)
이 직접 짓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강진 유배 이후 정약용(丁若鏞)
의 전형적인 행초서풍을 보여주며, 
특히 세번째 첩에 실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는 
다른 서첩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
이처럼 빛바랜 치마로 만든 서첩이어서 
안개하(霞)자, 치마피(帔)자, 하피첩(霞帔帖)
이라 이름 했다고 한다.
#妻病寄敝裙 
병든 아내가 날근 치마를 보내왔으니
#千里托心素
천리 머나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世久紅已褪
흘러간 세월에 붉은 빛 다 바래서
#悵然念哀暮
만연의 서글픔을 가눌 길 없구나.
#裁成小書帖
마름질 해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
#聊寫戒子句
아들을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庶幾念二親
부디 두 어버이 마음 헤아려서
#終身鐫肺腑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
*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