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에관한사진올리기

♣ 청렴결백의 본보기 박수량의 백비 ♣(옮겨온 글 수신메일)2011.10.26

왕토끼 (秋岩) 2011. 10. 26. 05:18

♣ 청렴결백의 본보기 박수량의 백비 ♣



이 백비에 서린 선비정신이 이 장성을 넘어 온 누리에 
넘치기를 무엇보다 그는 자칫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겉치레에 불과했던 선비정신이 아니라
이를 현실에서 실천한 옛 선비였음이 저 백비가 
산 밑 마을을 환히 밝혀준다.
비록 진정한 선비가, 지성인이 드물다는 오늘의 세태,
언뜻 박수량의 청백리 정신과 함께 고려시대의 교육자였던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이 두 아들에게 시를 지어 
가르친 "계이자시(戒二子詩)"라는 시가 자꾸 뇌리에 
스치는건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
정성읍을 지나 황룡면으로 5km쯤 가면 
금호리의 호미산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 중턱에 묘가 있고 그 앞에 고고하게 묘비가 서있다.
묘비이지만 그 비에 아무런 글이 없는, 
우리나라 유일의 글씨 없는 백비(白碑).
기념물 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 아무리 글로 찬사를 늘어논들, 
꼭은 어떻게 표현할래야 할 수 없는,
그래서 백비는 아무런 말없이 감동을 일깨워준다.
이 묘는 바로 조선시대에 청렴결백(淸廉潔白)의 
본보기였던 박수량(朴守良)의 무덤으로
박수량(1491~1554)은 본관이 태인으로
호는 아곡(莪谷)이며,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그는 김개(金漑)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에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광주(廣州)의 주학(州學)으로 벼슬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32살 때인 1522년(중종 17)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어서는 소격서의 폐지를 
극간(極諫)하기도 하였다.
그 후 35살 때 부친이 병이 들자 이를 간호하기 위해 
고부군수로 내려왔으며,
부친이 돌아가시자 사직하고 예를 다하였다.
그의 나이 39살 때 다시 복직하였으나 1531년(중종 26) 
모친의 병환으로 다시 보성군수로 내려오게 된다.
그 후 1534년(중종 29) 함경도 경차관으로 지방을 순시하다가
안원보, 권관, 전주남 등이 야인(野人)들에게 사사로이 
우마를 제공한 사실을 알고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때 투옥되기도 하였다.
1536년 나주목사에 기용되어 이듬해에 동부승지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546년(명종 1)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인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1년(명종 6) 좌참찬에 올랐으나 마침 모친의 
병환으로 사임을 요청한다.
그러기에 국왕이 고향인 전라도 관찰사에 배려하여 
모친을 봉양할 수 있었다.
1552년 우참찬을 거쳐 이듬해에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1554년(명종 9)에 졸(卒)하였다.
청백한 인품에 혹 흠이 될까봐 그냥 묘비만 세운 백비
그는 명망을 지닌 청렴결백한 선비로 손꼽힌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서원인 풍기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인물로 잘알려진 주세붕(周世鵬) 등과 깊이 교유(交遊)하며 
학식이 높아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으며,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했을 정도로 너무 깨끗한 공직생활을 
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것이다. 
30여년의 관직생활.
오직 덕과 예로써 임했을 뿐 사사롭지 않아 이미 
그의 고결한 인품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명종은 어사를 파견하여 은밀히 그의 생활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박수량의 청빈한 생활.
어사는 그가 겨우 식사를 연명할 정도로 청빈하며, 
집은 낡아 비가 샐 처지라고 보고한다.
이같은 보고에 국왕은 또 그대로 믿을 수 없어 
재차 어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이 어사도 그가 30여년이 넘도록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변변한 집 한 채도 없다고 보고한다.
이에 명종은 그의 청렴결백에 탑복하고 하남골에 
99간짜리 집을 지어주고,
청백당(淸白堂)이란 액호(額號)를 하사하였다.
그는 죽으면서 고향에 묻어주되 
묘도 크게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청백하기만 했던 그답게 유언한다.
그러나 어찌 이 훌륭한 선비를 
그냥 가게할 수 있었겠는가.
명종은 이 소식을 듣고 예장(禮葬)을 명하고 
비석을 하사한다.
그리고 비문을 만들다가 되려 누를 끼칠까 걱정하여
그대로 비를 세우니 이로부터 백비로 불리워진 것이다.
그 후 1806년(순조 11)에는 '청백수절(淸白守節)'
'애민호여(愛民好與)' 라는 의미를 지닌
정혜의 시호가 내려졌다.
현재 그의 가문에는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유물이 내려오며, 
송병선(宋秉璿)이 지은 신도비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묘지명이 전한다.
청백당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현판만은 
종가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가 읽었던 [요산당기(堯山堂記)] 등 
수 백권의 고서가 전한다.
특히 황룡면 신호리의 수산사(水山祠)에는 
그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며,
서삼면 모암리의 엣 모암서원(慕巖書院)의 
칠현단(七賢壇), 칠현유적지(문화재자료 119호)에도
효자 서능(徐稜) 등과 함께 받들어져 있다.
박수량은 진정한 선비정신의 소유자로서 이를 
현실에서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본래 선비들은 살신(殺身)하여 인(仁)을 이루는 유학적 
인격의 형성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선비는 일정한 생왈 근거인 항산(恒産)이 없어도 변함없는 
항심(恒心)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래서 비록 곤궁하여도 의를 잃지않고, 
비록 현다라하여도 그 도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선비는 덕행과 의리를 생명으로 삼는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국난을 당해서는 의용(義勇)과 절의, 
대의로 의병을 일으켜 극복하였고,
불의에 항거하였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본(本)을 앞세우고 말(末)을 뒤로 
돌렸으며 '대의멸친(大義滅親)'과 '선공후사(先公後私)'
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여기에는 덕치와 위민, 애민이 근본을 이루면서 
관직에 임해서는 청렴결백하여 청백 청빈한 생활을 즐겼다.


내 지금 두 아들에게 훈계하며(吾今戒二子)
덧붙여 우리 집 보배를 준다.(付與吾家珍)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淸儉銘諸己)
문장으로 한 몸을 수놓아라.(文章繡一身)
집에 전하는 것으로 나라에 보배 되고(傳家爲國寶) 
대대로 이어 나라에 신하가 되었었다.(繼世作王臣)
화려하고 떠들석한 사람을 배우지 말라(莫學紛華子)
꽃 피는 것은 잠깐 뿐이니라.(花開一餉春)
집에 대대로 내려온 큰 물건이 없으나(家世無長物)
오로지 값진 보배를 전하여 간직했으니(唯傳至寶藏)
문장은 바로 비단이 되고(文章爲錦繡)
덕행은 곧 옥구슬이 된다.(德行是珪璋)
오늘 너희에게 나눠 주노니(今日相分付)
부디 이 뒷날 이것을 잊지말라.(他年莫敢忘)
이것을 잘 가져 조정에 쓰면(好支廊廟用)
대대로 더욱 번영하리라.(世世益興昌) 
~ [출처]백비와 박수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