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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민족 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옮겨온 글11.05.25)

왕토끼 (秋岩) 2011. 5. 25. 13:31

이광수-민족 개조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이광수-李光洙, 창씨명 香山光郞, 1892∼1950

1922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 발표.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 1942년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 참석

 

사랑의 도피 여행과 상하이 시절의 행각

 

1920년 4월, "종달의 소리가 끝도 안 나서/ 청인의 집 낮닭이 운다./ 종달이 또 운다, 바람이 또 분다/ 동자군(童子軍)의 행군나팔이 들린다/ 아아 사람을 곤(困)케 하는 강남의 봄이여"(이광수, [강남의 봄])라는 구절처럼 남쪽 지방 상하이의 봄이 무르익어 갈 때 춘원은 이미 두 해째로 접어든 타국 생활과 끝이 안 보이는 독립운동에 조바심을 느끼게 된다. 이미 장편소설 <무정>(1917)으로 전조선 여성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명성을 얻은 이 희대의 천재는 일본 유학중 19세 때 결혼한 아내 백혜순과 이혼한 후, 도쿄여의전을 졸업한 허영숙(창씨명 香山英子)과 베이징으로 석 달 가량 사랑의 도피 여행(1918)을 떠났다. 어려서 천애고아로 자라온 춘원은 애정 결핍증 소년이 지닌 민감성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썼는데, 베이징에서 뜻밖에도 단재 신채호를 만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이 문제아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문제아'의 내용은 "젊은 여자와 함께 산다는 문제, M(매일)신문에 글을 쓴다는 문제,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문제"였다. 일본 공사관에 다닌다는 말은 춘원이 여행을 떠날 때 총독의 측근인 일인 언론계 거물급인 아베(阿部充家)의 소개장을 소지하고 와서 공사관의 도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을씨년스러운 베이징에서 춘원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민족적 분위기를 안은 채 귀국, 도일하여 이듬해에 '2·8 독립선언서'를 쓴다. 그리고는 이를 외국으로 보내는 사명을 띠고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1919년 2월 5일이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 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의 조바심은 연인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에 솔직히 나타난다. "나는 상하이에 온 후로 작년(1919) 9월부터 대단히 자포자기한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술을 먹고 기생집에도 다녔습니다." 이 무렵 임시정부의 홍보로 <독립신문>을 펴내는 일을 맡았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와 긴밀한 사제적·동지적·육친적 관계를 맺게 되어 일생 동안 그의 이념 노선과 충고를 따랐다. 그런데 춘원은 <독립신문> 일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만은 도산의 충고를 거슬렀다. 허영숙이 상하이로 춘원을 찾아간 것은 1921년 2월이었는데, 이 때 그는 아예 상하이에 남는 길, 도산의 권고대로 미국으로 가는 방안 등을 버린 채 그 해 3월 귀국 길에 올랐다.

 

독립운동가를 숙청하라고 건의하다

 

춘원은 여러 글에서 귀국하면 징역을 살 것처럼 썼으나, 실인즉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5월에 허영숙과 정식 결혼, 9월에 사이토(齊藤實) 총독과 면담 등등 화려하고 세속적인 출세가도의 길로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아베를 통하여 사이토에게 보낸 건의서 [유랑 조선 청년 구제 선도의 건](1921. 4)은 이광수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 가운데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2천여 유랑자들(실은 독립운동가들)이 지닌 위험성을 세 가지로 나눠서 경고한다면서, 첫째는 '독립운동을 표방해서 무기를 들고 조선 안에 몰래 들어오는 일'이며, 다음은 '과격파 러시아의 선전자가 되는 일'이고, 그 다음은 '사기꾼 또는 절도, 강도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춘원은 이들이야말로 '수효에 있어 적은 것 같지만 그 실제로 일본의 국방 및 사회의 안녕에 대해 경시해서는 안 되는 관계'라고까지 강변한다. 이런 충언을 해준 춘원을 총독부가 어떻게 대했을까에 대한 명확한 입증 자료는 없다. 그러나 아베가 총독에게 건의한 여러 글들로 미뤄볼 때 민족개량주의론을 선양시켜 독립운동의 이념을 누그러뜨리면서 문화운동을 유도하려 했던 점만은 분명하며, 그 주역으로 이광수, 최남선, 최린 세 사람에게 정책적인 배려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증명된다.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자체를 총독부의 회유로 본 재일본 역사학자 강동진(姜東鎭)은 춘원이 192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받았던 수당이 한 달에 300엔이었다고 밝혔다. 1929년 무렵의 파격적인 부장대우가 100엔이었다니 그 위력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춘원은 그 보수에 합당하게 일본 제국을 위해 봉사했을까? 월간 <개벽>지에 [민족개조론](1922)을,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1924)을 쓰자 당시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들끓었는데, 결국 그 압력으로 잠시 동아일보사를 그만둬야 할 지경이었다. 이 두 글은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원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미 독립운동권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받은 춘원은 도산의 의사에 따라 수양동우회 결성에 앞장 섰는데, 이 단체는 그의 신원보증인 역할을 했던 아베를 통하여 총독에게 사전에 규약을 보고한 뒤에 창립되었다. '조선 민족 개조의 대사업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수양동우회는 그 뒤 비록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적어도 춘원이 초기에 창설했을 때의 기본 구도는 총독부의 정치적인 저의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춘원이 친일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행위를 시작한 시기는 이처럼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인즉 그 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즉, 춘원은 1916년 <매일신보>에 쓴 기행문 [대구에서]라는 글에서 "일찍 해외에 있어 격렬한 사상을 고취하던 자가 도쿄에 와서 2, 3년간 교육을 받노라면 번연 인구몽(引舊夢)을 버려 이전 동지에게 부패하였다는 조소까지 듣게 되는 것을 보아도 알지라. 신문과 잡지와 서적과 선량한 청년회 같은 사교 기관이 있어 기회를 따라 신지식을 주입하면 결코 여사한 무모를 행치 아니할 것이라"고 썼다. 이 말은 곧 독립운동가들의 부당성과 우매성을 지적한 대목으로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강한 친일 이념의 냄새를 풍긴다. 더구나 이 글은 형식이 총독에게 건의하는 서간체적 기행문으로 되어 있어 그 뒤의 [유랑 조선청년 구제 선도의 건]과도 일맥 상통한다.

 

일어로 된 처녀작 [사랑인가]와 친일 의식의 단초

 

최근에 발표된 이광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들은 그의 친일 의식의 단초를 [대구에서]보다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그가 일본의 기독교 선교사계 교육 기관 메이지(明治) 학원에 다닐 때(18세인 1909년) 쓴 단편 [사랑인가]에서 찾고 있다. 소설은 11세 때 고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 문길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인 소년 마사오에게서 그 감정을 느끼나 여전히 만족할 만한 애정은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마사오를 만나면 제왕의 앞에라도 선 것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극히 냉담한 태도를 꾸미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또한 그 이유도 몰랐다. 그저 본능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붓으로 입을 대신했다. 3일 전에 그는 손가락을 잘라서 혈서를 보냈다.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임종국은 이 동성애적인 사랑의 의미를 반민족적인 발상의 효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광수의 친일 행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생에 걸친 것이었다. 즉, 1919년 2·8 독립선언에서부터 상하이에서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했던 독립운동이 도리어 특이하게 보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그의 일생은 시종 국가 권력에 대한 신뢰와 성취 욕구, 안일함에 대한 갈망이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 개량과 문화주의로 일관하던 춘원은 1937년 일제의 동우회(수양동우회가 1929년부터 동우회로 명칭이 바뀜)사건 구속에 걸려 옥고를 겪지만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한편, 정신적인 지주 도산의 타계(1938)에 직면한다. 이어 그는 1939년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제3단계의 친일 행위로 들어선다. 즉, 춘원의 친일은 제1단계가 1919년 이전까지로 이 시기는 주로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 정신으로 볼 수 있고, 제2단계는 상하이로부터의 귀국 이후로 자신의 이상과 현실적인 욕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이념 체계인 민족개량주의와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던 때이며, 이어 제3단계는 1939년 이후로 이 때는 전시 협력 체제로 흔히들 친일이라고 하면 이 시기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오히려 그 앞 시기가 더 중요한 역사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9년같은 해 10월 29일 부민관에서 열린 총독부 지시의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은 박영희가 사회를 맡았는데 이광수가 회장으로 추대되어 만세삼창을 불렀다. 그러나 동우회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었던 그는 판사로부터 회장 사임 압력을 받아 12월에 그 직책에서 물러났다. 물론 이내 발표된 창씨 개명령(1940. 2. 11부터 접수)에 따라 그는 발빠르게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로 이름을 바꾸고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신무(神武) 천황께옵서 어즉위(御卽位)'를 한 고큐산(香久山)에서 향산을 따오고, '광수'에서 '광'자는 그대로 쓰면서 '수'자는 일본 이름식으로 '랑'으로 바꿨다는 이 기발한 이름 풀이는 [지도적 제씨의 고심담], [창씨와 나] 등에서 춘원 자신이 남긴 것들이다. 이 글은 장황하지만 인용해 볼 필요가 있다.

 

창씨의 동기 :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영향 : 금년 8월 10일까지 조선인의 창씨의 기한이 끝난다. 그날의 결과는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일본식 씨를 조선인 전부가 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 2400만이 진실로 황민화할 각오에 철저하였다는 중대한 추리 자료가 될 것이다. 만일 그에 반하여 일본식 씨를 창설한 자가 소수에 불과하면 그것은 불행한 편의 추리자료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가 조선인을 신임하고 아니함이 조선 자신의 행·불행에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적인 씨를 창설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 2. 20) 이후 고야마는 [의무 교육과 우리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 [반도 민중의 애국 운동] 등의 평론, [지원병 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하여 왕성하게 일제를 찬양한다.

 

생활과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 주장

 

고야마의 세계관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대적할 수밖에 없다는 동서양의 대결 의식에서 비롯한다. 그는 소박한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총독부의 통치 이념과 일치한다. '영·미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적대화할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그렇게 되면 '조선인도 일어날 날이 온 것'이라고 단언하는 고야마는 전쟁에 조선인이 참여하는 것을 '성은에의 보답'으로 인식한다. 이런 시국적인 인식을 국민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세력으로 좌익 운동가들을 지목한 것이 당시 총독부 문헌이었는데, 고야마 역시 같은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전향이라는 술어를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서 반의를 포회하였던 자가 새로이 애국심에 자각하는 것이 정당한 의미"라고 풀이하면서, 이를 각계의 지식인들에게 적극 권장할 뿐만 아니라 거짓 전향이나 전향 자체를 수치로 여기는 풍조에 대하여 강력히 비판한다. 물론 여기서 전향이란 사상적인 면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에서 친일화에로의 변화까지도 포함시키는데, 그 충성도의 목표는 '임전 태세의 완료와 응소(應召)의 자세'임을 분명히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생활 혁신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이 생활의 혁신은 생활의 황민화, 생활의 합리화, 그리고 생활의 임전화(臨戰化)의 3대 강령에 의하여서 하여야 할 것이다.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 순화하는 것이다. 예하면 혼상의례의 일본화, 가족·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崇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반도 민중의 애국 운동], <매일신보>, 1941. 9. 3)

 

이 글은 고야마의 친일 이념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내용의 골격은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주장했던 전시 동원 체제의 지령과 전면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 녹기 연맹이 편찬한 <오늘의 조선 문제 강좌> 전6권과도 맞아떨어진다. 이로 미뤄볼 때 아마 고야마(뿐만 아니라 당시의 친일파들)는 이념적인 동질성 확보를 위한 일정한 연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력과 위협에 의한 친일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신념에 따른 친일이었음을 나타내는 이런 '인간과 민족 개조를 통한 조선인의 일본화, 모든 풍속과 습관과 가치관의 일본화' 주장은 친일파 중에서도 고야마가 가장 열렬하게 내세운 사실들의 하나이다. 생활과 풍속의 원천적인 개조를 위하여 그는 역사까지도 왜곡하였는데, 예를 들면 단편 [원술(元述)의 출정]에서는 장군의 딸 아좌와의 혼례를 앞두고 출전했다가 패전의 굴욕을 씻고자 태백산에 은거하던 원술을 등장시킨다. 3년여의 은거중 약혼녀 아좌가 나타나 당나라의 침입을 알리자 원술은 출정을 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는 옛 이야기 한 토막이지만 고야마다운 친일 사상의 역사성이 스며 있다. 원술은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며, 이 소설은 역사적인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소설은 곧 중일전쟁에 조선인이 나서야 할 필요성을 긴 역사를 통한 진실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이다. 그래서 고야마의 친일 사상은 당대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전민족사를 통틀어 이를 일본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십이월 팔일 해 뜰 때

  빛나는 소화 십육년

 

  하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지니아와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륙

  프린스 업 웨일저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만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립힌 지 2백 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 ([선전대조](宣戰大詔), <신시대>, 1942. 1)

 

"조선놈 이마에서 일본인 피가 나오도록"

 

1942년 고야마는 일제 식민지 전지역을 망라하는 대동아 문학자대회 제1회 대회에 참석코자 도일하여 맹활약했다. 대회는 11월 3∼10일에 열렸는데, 고야마는 토쿄 도착 즉시 니주바시(二重橋 : 궁성 입구)로 가서 궁성 요배를 올리면서 "미신(微臣) 고야마 미타로, 삼가 성수의 만세를 비옵니다"라고 아뢰며 충심으로 '천황'을 받들 각오가 되어 있음을 드러낸다.(이 대회 참가기인 [삼경(三京) 인상기]) 대동아 문학자 제2회 대회는 1943년 8월 25일부터 사흘간 열렸으나 고야마는 불참했고, 제3회 대회가 1944년 11월 난징(南京)에서 열렸을 때는 다시 참가했다. 11월 12일부터 사흘간 개최된 이 대회에서도 고야마는 다른 식민지 작가에 뒤질세라 맹활약을 했는데, 정작 그 충성심을 보인 삽화는 동행했던 팔봉 김기진이 남겨준다. 내용인즉, 고야마가 어느 글에서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쓴 것에 대하여 현상윤(玄相允)이 "여보게 춘원, 어떻게 조선놈의 이마에서 일본 피가 나오겠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를 김팔봉이 거론하며 그 사실 여부를 고야마에게 묻자, 고야마는 "그래, 그런 글을 내가 썼지. 그건 사실이야!"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김팔봉, [나의 회고록], <세대>, 1965. 12)

 

이보다 앞선 1943년부터 고야마는 학병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했는데, 특히 토쿄로 최남선과 함께 가서 한 권유 연설에 얽힌 뒷 이야기는 고야마의 신념에 찬 출정 의지를 말해준다. 김붕구의 회상으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차마 여기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황실'에 대한 경모와 신뢰, 무한의 경건한 태도로 민족의 구원을 설교하던 그 병고에 시달린 상기한 얼굴, 미열에 손발이 바르르 떨리는 듯하고 금시 쓰러질 듯이 숨가쁜 고행자의 자세, 일제가 그에게 모진 고문 끝에 무슨 혼을 빼는 주사라도 놓은 게 아닐까?"([한국인의 지식인상], <신동아>, 1967. 3)라고 느낄 만큼 고야마는 몸과 마음 전체를 쏟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고야마는 경기도 사능이라는 시골에 있으면서 그 이튿날에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는다. 춘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이내 서울로부터 친일파 처단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온다. 피신을 권유하는 허영숙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시골에 그대로 머물며 그는 [나의 고백], [돌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 그 주조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해 투옥된 것은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였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그는 3월 4일 출옥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조금의 훼손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분단 한국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서울에서 북한 당국에 의하여 연행된 뒤 1950년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리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 가까이에서 58세로 최후를 마쳤다.

-임헌영(문학평론가, 반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