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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남사림의 형성(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1. 1. 8. 07:36

1. 호남사림의 형성

‘호남’이라는 말이 전라도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불린 것은 조선 초기까지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6세기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는 재지 중소지주로서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향촌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호남이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전라도가 행정 단위뿐만 아니라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지역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호남의 정체성을 형성한 주체, 호남의 유교문화를 형성한 주체는 ‘호남사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호남사림은 독자적인 세력이 아니라 기호사림에 포함되어 논의되어 왔으며 지역적으로도 경기․충청지방의 주변부로서 이해되고 독자적인 기반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사상계가 경기․충청지방의 서인과 영남지방의 남인으로 재편되는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타당한 점이 없지 않으나 그 이전 시기에 적용시키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16세기 호남사림들은 나름대로의 재지적 기반을 가지고 다양한 학파를 이루며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선조 초년에는 중앙 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호남사림은 기본적으로 호남지방, 즉 전라도를 기반으로 중종대에 성립되어 성장한 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조선 건국 이후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됨으로써 받았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로 연산군대에 서서히 등장하여 중종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흥기하였다. 물론 장성의 유창(강릉 劉氏)과 김영렬(의성 金氏) 등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공신에 봉해진 집안들도 있다.
이들이 이주지로 전라도를 택한 이유는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화가 쉽게 미쳐오지 않으면서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은둔의 최적지로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1) 왕조교체기

범세동(금성 范氏): 광주 출신. 간의대부 등 역임. 두문동에 은둔. 『華海師全』과 『話東人 物叢記』 저술.
정지(하동 鄭氏): 나주 출신. 해도원수 등 역임. 왜구 토벌.
전신민(천안 全氏): 병부상서 등 역임. 두문동에 은둔. 무등산 북쪽 산음동에 은거. 獨守亭을 지음.
조유(옥천 趙氏): 전농시부정 등 역임. 순창에 은거.
김자진(광산 金氏): 장성에 은거. 후손 김조원이 悠悠亭을 지어 기림.
김온(울산 金氏): 개국원종공신. 밀양부사 등 역임. 부인이 태종의 처족. 만년에 장성에 은거.

2) 세조의 쿠데타

김종서(순천 金氏): 좌의정 등 역임. 수양대군에게 피살. 김효우 등 후손들이 해남과 순천에 은거.
정분(진주 鄭氏): 우의정 등 역임. 장흥에 유배되어 죽음. 후손들이 장흥과 함평에 은거.
문맹화(남평 文氏): 영암에 은거.
박지흥(충주 朴氏): 광산에 은거.
박익경(무안 朴氏): 무안에 은거.
김린(충주 金氏): 좌찬성 등 역임. 장흥에 은거.
김필(영광 金氏): 사인 등 역임. 장흥에 은거.
이안(함평 李氏): 남부참봉 등 역임. 함평에 은거.
최덕지(전주 崔氏): 직제학 등 역임. 만년에 영암에 은거.
송간(여산 宋氏): 형조참판 등 역임. 고흥에 은거.
신말주(고령 申氏): 신숙주의 동생. 병조판서 등 역임. 순창에 은거.
이석(경주 李氏): 나주에 은거.
노종주(함평 魯氏):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다가 체포됨. 탈출하여 영암에 은거.
모순(함평 牟氏): 후손들이 함평과 무안에 은거.
원주 李氏: 해남에 은거.
문화 柳氏: 담양에 은거.
홍주 宋氏: 담양에 은거.
양성 李氏: 함평에 은거.

3) 연산군의 사화

최부(탐진 崔氏): 나주 출신. 교리 등 역임. 중국에 표류. 『漂海錄』 저술. 무오사화 때 유배. 갑자사화 때 처형당함.
송흠(신평 宋氏): 장성 출신. 이조판서 등 역임. 연산군 때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
이재인(경주 李氏): 이제현 후손. 장수현감 등 역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장성에 은거.
정여해(하동 鄭氏): 무호사화가 일어나자 화순에 은거.
신윤보(고령 申氏): 해주목사 등 역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순천에 은거.
김굉필(서흥 金氏): 김종직 문인. 무오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 최산두와 유계린 등 많은 제
자를 길러냄. 사상적으로 호남사림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

이미 옥과현감 김개 등이 지역의 사림과 유배 중이던 유빈․이과 등과 합세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정을 하려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그만두기도 했던 호남사림은 중종반정 이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조광조를 중심으로한 기묘사림의 세력 확대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사림은 기묘사림의 12%를 점하였다.
유성춘․안처겸․남주․기준․박수량 등이 1514년(중종 9)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윤구․양팽손․이영부․기형․정만종 등이 1516년에 과거에 합격하는 등 호남사림은 해마다 문과에 다수의 합격자를 냈다. 또한 1513년 사마시에서는 생원․진사 합격자 각각 100명 가운데 호남 출신이 각각 23명, 24명을 차지하고 생원 1등-5등에는 윤구․유성춘․기준 등 3인이, 진사 1등-5등에는 유성춘․안처순이 들어가는 등 능력도 다른 지역에 뒤지지 않았다.
이는 장원급제자가 많이 나온 데서도 잘 드러난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서 박우가 1등으로 합격하였으며 같은 해 문과에 유옥이 장원급제하고 1526년(중종 21) 문과중시에서는 박상이 장원을 하였고, 이어 나세찬(1536년 문과중시), 양응정(1540년 생원시, 1556년 문과중시), 정엄(1552년 생원시), 박순(1553년 식년문과), 고경명(1558 식년문과), 정철(1562년 별시문과), 이발(1573년 알성문과), 정상(1574년 별시문과) 등이 장원급제하였다.
아울러 호남사림은 훈척에 대항하여 사림을 정치적으로 결집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512년(중종 7) 소세양의 昭陵復位 주장과 1515년(중종 10) 박상․김정 등의 愼妃復位疏였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되면서 폐릉되었으며, 신비는 중종의 왕비로 중종반정 때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살해되자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출당했다. 따라서 이 두 왕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므로 다시 본래의 상태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소릉복위는 1년간에 걸친 논쟁 끝에 뜻을 이루었으나 신비 복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상과 김정은 유배되었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그리고 그 이후의 고변사건으로 인해 김식․최산두․양팽손․박상․고운․윤구․유운․유성춘․임형수․유희춘․송순 등 많은 인물들이 유배나 파직당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으나 오히려 호남사림는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 호남사림의 인맥을 보면 크게 여섯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김굉필계열

김굉필→최산두․유계린․윤신․최충성․유맹권→김인후․유성춘․유희춘

2) 최부계열

최부→윤효정․임우린․유계린→윤구․윤항․윤행․윤복→이중호

3) 송흠계열

송흠→양팽손․나세찬․송순․안처성→양응정

4) 박상계열

박상→송순․임억령․정만종․채중길․박순

5) 이항계열

이항→김천일․기효간․김제민․백광홍

6) 김안국계열

김안국→김인후․유희춘


명종대에 이르면 이미 서경덕과 이황․조식학파가 형성되면서 호남사림 역시 이러한 학문 경향의 영향을 받거나 대응하면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인맥에 학맥을 더하여 고려한다면 호남사림은 크게 서경덕계열과 송순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서경덕계열에는 서경덕 문인이었던 박순과 정개청, 그리고 노수신․윤행․윤의중․박응남․유희춘 등이 활약했는데 주로 최부계열이 여기에 속하였다. 송순계열에는 송순․김인후․나세찬․임형수․임억령․양산보․양응정․오겸 등이 활약했는데 대체로 최부계열을 제외한 김굉필․송흠․박상․이항계열이 여기에 속하였다.
서경덕과 송순 양 계열은 명종 말부터 서서히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다가 선조가 즉위한 이후에 노수신․유희춘․김난상 등이 乙巳被禍人으로서 복관되면서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중앙정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노수신․박순․윤의중․박응남과 유희춘․기대승․이후백․오겸․송순 등 선조 초에 고위관료로서 활약했던 인물 중의 상당수가 서경덕․송순계열의 호남사림이었던 것이다. 즉 사림들의 성리학적 이념을 구현시키는 방법의 하나였던 경연을 주도한 것은 유희춘과 기대승이었고 정치적으로 홍담․김개 등 舊臣들과 대립하면서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인물은 을사복관인인 노수신과 박순이었으며 여기에 오겸과 송순 등이 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 동서분당을 계기로 중앙정계가 동인과 서인, 서경덕․이황․조식학파와 이이․성혼학파로 정치적․학문적으로 양분되면서 호남사림도 서경덕계열은 동인으로, 송순계열은 대부분 서인이 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 서로 대립하였다. 당시 서경덕계열의 중심 인물은 이발․이길 형제와 정개청 등이었으며 송순계열의 중심 인물은 정철․고경명․김천일․이후백 등이었다.
특히 이발이 동인의 영수로 활약하고 정개청이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등 서경덕계열은 송순계열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를 계기로 몰락하고 정철을 중심으로 한 송순계열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의 주축은 고경명․고종후․고인후․김천일․최경회․변사정․양산숙 등 대부분 송순계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경덕계열은 주로 관군인 이순신․이복남 부대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전쟁 이후 정철계열의 정치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철 등 주요인물들이 죽고 인조반정을 경기․충청도지방 서인들이 주도하게 되면서 그리고 서인의 학문이 이이 이후 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시가․문학활동에 경도되었던 호남사림의 학문적 기반은 점점 약화되어 그 독자성을 상실해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인조대에 가면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 고경명의 아들인 고용후와 손자인 고부천 등이 중앙정계에서 활동하였으며 안방준 등이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쓰는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호남지방이 모두 서인에 의해 지배된 것은 아니었으며 해남의 윤선도집안 등은 명맥을 유지해 17세기 중․후반 허목․윤휴 등 북인계통세력과 제휴해 서인과 대립하였다. 또한 박소집안의 후손인 박세채도 노․소론이 분립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같은 집안의 박세당은 정통 주자성리학과는 다른 학문을 하여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다. 이들 집안은 모두 16세기 서경덕계열에 속했던 집안으로 학문적 차이에 따른 세력분화가 그 이후인 조선 후기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양득중과 임상덕 등도 윤증․박세채 등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소론화되었고 서경덕 계열의 근거지였던 나주는 영조대에 임상덕 등 나주 임씨를 중심으로 소론의 근거지로 변화하여 1755년(영조 31) 나주괘서사건 등으로 노론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이 역시 이전의 지역적 특성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2. 호남의 유학사상

호남지역이 유학과 관련을 맺기 시작하는 것은 이미 마한시대부터였다. 405년(아신왕 14) 왕인박사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유학을 전하였으며 일본 천황 응신은 그의 학문에 감복하여 태자의 스승을 삼을 정도였다. 또한 이때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가 선진기술을 전해주는 등 백제의 여러 문화를 일본에 전하여 일본 아스카문화을 배태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성리학이 도입되는 고려 후기부터였지 않나 여겨진다. 당시 활약하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종대 중국에서 태묘와 국자감의 그림을 가지고 온 김양감, 고종대 우리나라 최초로 유교적 덕목과 생활관습을 규정한「居家十訓」을 저술하고 효자로 유명한 서릉, 충선왕대 국학박사를 지낸 이성, 공민왕대 권문세족과 대항하다 유배 도중 사망한 전록생, 역시 공민왕대 古禮에 조예가 깊었던 박상충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 들어와 호남유학은 호남사림의 형성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호남사림의 대부분이 건국 이후 정치적 변동 속에서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에 연루됨으로써 받았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가문의 후예들이었기 때문에 초기 호남유학은 의리명분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고 16세기에 들어서면 실천적인 성격이 덧붙여졌으니 그러한 특성이 잘 드러난 것이 소릉복위 주장과 신비복위소였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으로 단종이 폐위되면서 폐릉되었으며, 신비는 중종의 왕비로 중종반정 때 아버지인 신수근이 반정에 참여하지 않고 살해되자 반정세력에 의해 강제로 폐출당했다. 따라서 이 두 왕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에 어긋나므로 다시 본래의 상태로 복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 사림이 반정공신의 세도에 눌려 감히 비판하지 못할 때 호남사림은 그 잘못됨을 과감히 지적했던 것이다.
이어 호남유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이 지역으로 유배를 온 김굉필조광조였다. 김종직의 제자로 평생토록『소학』만 읽었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한 김굉필은 무호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를 와 賜死되기까지 4년 동안 있었는데 그 동안 최충성․이적․윤신․유계린․최산두․유맹권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김굉필의 제자였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35일만에 사사당하였다. 그러나 호남사림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친구로, 또는 문인으로 교유하였으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죽음으로써 호남 유학이 도학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이 시기 호남사림의 학문은 김굉필․조광조의 도학정치사상․지치주의유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학정치․지치주의유학의 특징은 조광조가 경연에서 주장하였던 도학을 높이고[崇道學] 인심을 바르게 하며[正人心] 성현을 본받고[法聖賢] 지치를 일으킬[興至治] 것에 잘 나타나 있다. 도학은 성리학과 거의 같은 의미로 도덕․윤리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지치는 三代의 이상정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명종대에 이르면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명으로부터 양명학과 장재․나흠순 등의 학문이 들어와 퍼지면서 조선의 사상계는 다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학문적 성향에 따라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호남사림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비교적 단일한 학문적 성격을 가졌던 중종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학문집단이 형성되었는데 크게 서경덕계열과 송순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박순․노수신․정개청 등 서경덕 계열 인물들의 사상을 보면 대체로 정통주자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북송의 소옹․장재와 명의 나흠순의 학문, 양명학 등을 계승한 점이 없지 않았다. 우주론에서의 先天과 後天을 구분하고 인성론에서 인심과 도심을 體用관계로 보고 수양론에서는 지행합일을 주장하고 算數․易學․武를 강조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개청은 예학에도 정통하였다.
반면 송순․김인후․기대승․이항 등 송순 계열 인물의 사상은 서로 간에 학설의 차이가 없지 않았지만 크게 보면 정통 주자성리학에 가까웠다. 송순은 이이의 氣發理乘一途說과 비슷한 학설을 이이 이전에 이미 주장하였고 김인후는 이항과 노수신의 학설을 주자의 설에 입각하여 비판하였으며 기대승이 이황과 논쟁을 벌일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항은 이기가 一物임을 강조하며 기대승․김인후 등과 논쟁을 벌였으며 노수신과는 人心道心論爭을 벌이기도 하였다. 기대승은 理氣共發說을 주장하며 理氣互發說을 주장했던 이황과 8년간에 걸쳐 四端七情論爭을 벌였다. 이처럼 이 시기 호남의 성리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론적으로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기축옥사를 계기로 서경덕계열은 중앙과 향촌에서 서서히 세력을 잃어가고 송순계열은 향촌에서 주도권은 잡았지만 이기심성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신들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심화시키는 데 소홀히 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의 이론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 속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당시 사상계의 주된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또한 당시 사회경제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가졌더라도 재지사족의 입장에서 향촌사회의 구성원인 일반민들의 안정을 전제로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자는 소극적인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경기․충청지역의 서인산림의 사회경제개혁론보다 더 보수적인 것으로 영남남인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호남유학의 의리적․실천적․도학적인 성격은 호남사림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또한 많은 사림의병장들을 전쟁터에서 순절하게 하였다. 그리고 역으로 이러한 사림의병장의 순절과 활발한 의병활동은 호남의 성리학이 절의와 충렬을 더욱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호남사림은 이를 더 이상 이론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조광조 단계에 머물렀다.
물론 사상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기축옥사로 촉발된 재지세력 간의 계속되는 대립, 임진왜란 때 인재의 손실로 인한 정치적 구심력의 상실과 학맥의 단절, 인조반정으로 인한 경기․충청지역 서인사림의 정치주도권 장악, 충청지역 서인사림에 의한 이이학파의 적통 계승 등도 호남사림이 중앙에서 주도권을 잃고 재지적 기반 위에서 독자적인 학파도 형성시키지 못하면서 경기․충청지역의 이이학파에 개별적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