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한 옹기 돛단배를 말한다
옹기를 싣은 돛단배의 운항 노선(약 120㎞)은 강진 봉황(옹기마을)→고금도→평일도(1박)→시산도→외나로도(1박)→백야도→까막섬→소호요트장(1박)→여수 이순신광장 부두까지이다. 자연항해는 조류나 바람 등 조건이 합치할 때만 항해할 수 있다. 소멸된 돛단배의 자연항해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옹기배는 근대 시기 강진군 봉황마을에서 생산된 옹기를 싣고 여수를 중심으로 마산, 부산, 제주까지 옹기를 팔러 다니던 개량식 황포 돛단배다. 그러나 30여년 전까지 운행되다 소멸했다. 승선원은 세 명으로 구성되는데, 사공은 키잡이로 지금의 선장이고, 웃동무는 돛잡이로 선장의 지시에 의하여 돛을 조정하며, 화장은 식사당번과 잡일을 한다. 이번 탐사의 사공은 신연호(80세, 강진 봉황마을, 이하 ‘사공’)님으로 30년간 옹기배를 탄 분이다. 옹기배에 대하여 살펴보면, 갑판 아래에 옹기를 싣는 짐칸이 있다. 이번 탐사에서는 침실로 이용되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이라 한다. 이물에는 닻이 있는데, 닻줄은 호롱(물레)에 감겨 있다. 뒷부분을 ‘고물’이라하고 사공이 키를 잡는다. 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상 돛대와 돛이다. 3개의 돛대는 앞에서부터 야웃돛(선수, 10m), 이물돛(배 앞부분, 15m), 허리돛(배뒤, 16m)이다. 돛은 황토물을 들인 광목을 사용하며, 돛폭의 가로로 묶는 대를 활대(10개 내외)라고 하는데,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상활대, 맨 아래에 있는 것을 질활대라고 한다. 항해의 조건은 첫째 조류, 둘째는 바람이다. 조류는 밀물과 썰물을 말하는데 자연항해는 순류를 타야 하며 도중에 역류로 바뀌면 6시간을 정박하였다가 다시 항해하는 것이 원칙이다. 남해안에서 밀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썰물은 반대이다. ‘순풍에 돛달았다’는 말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말하는 순풍은 초속 10~12m정도로 주의보 직전의 센바람이다. 바람은 약 45°로 뒤에서 불어올 때 최고의 속력을 낸다. 조류, 바람의 조건이 맞으면 밤에도 항해하였다. 비는 항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출항! 용왕님께 무사항해를 빌다
“남해용왕님, 서해용왕님, 동해용왕님, 으짜든지 우리 선원들 무사하게 해주시고, 가는 곳마다 장사가 잘 되어 물 묻은 쪼박(바가지)에 깨 달라 붙듯이 돈 많이 벌게 해주시요잉!” 무사항해를 비는 뱃고사다. 옛적에는 선주가 돼지를 잡아 준비했단다. 무사항해 기원은 일상생활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꼭 ‘고수레’를 하면서 용왕님께 빈다. 이는 항해가 무사안녕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출항 전 배와 선창 간 안전거리를 확보하여 돛을 단다. 100여 미터쯤 노를 저어 벗어났다. “더~ 더” “으싸 으싸” 어찌된 일인지 돛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힘써! 잠깐 돛줄이 꼬였다.” 사공이 달려들어 풀었다. 제일 중요한 돛은 말썽도 많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엉킨다. 심지어 돛은 바람이 변하면 반대쪽으로 급회전한다. 이때 질활대에 머리를 맞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잃다. 따라서 배에서는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야한다. “자~ 가자, 허리돛 줄 당겨!” 바람을 머금은 돛이 부풀어 올랐다. 봉황호는 썰물따라 속력을 서서히 내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사공은 관습적으로 ‘연횃불’ 의례를 행한다. 연횃불의 전체모양은 원뿔형이다. 하단은 짚으로 지름 1m 정도의 원을 만들고, 거기에 삼발이 모양으로 깻대를 묶는다. 꼭짓점인 깻대 끝에 신문지를 붙이고 기름을 발라 잘 타오르게 한다. 사공은 연횃불 꼭대기에 불을 붙였다. “비키시오!” 사공은 타오르는 연햇불을 들고 이물(앞)에서 고물(뒤)로 바삐 움직였다. “남해, 서해용왕님…, 으짜든지 ~” 다시 한 번 사공의 소원이 빌어지고 연횃불은 바다에 던져졌다. “야 성공이다.” 타오르는 연횃불은 물 위에 똑바로 서서 떠내려가고 있다. 아니다. 사실은 연횃불은 가만히 있고 배가 움직이고 있다.
물 따라 바람 따라 자연 항해술
“전면에 막대기 조심, 양식장 있습니다.” 선수에서 망지기가 소리친다. “알았어.” 노련한 사공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장애물을 요리저리 피하여 가우섬 인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배가 거의 정지했다. ‘아니 왜 이러지!’ 바람이 섬에 막혔기 때문이란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봉황호가 돛단배임을 실감하였다. 거북이 마냥 나아간다. 초장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답답했다. 다행히 고금도 앞에 이르러 센바람이 나기 시작하였다. 배의 속력은 시속 7.4㎞(이하 ‘시속’은 생략)에 이르렀다. 바람이 남풍에서 남동향으로 변하자 속도는 7.7㎞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였다. 3분 후 속도는 곧 4.6㎞로 급감하였다가 4.2㎞로 더 떨어졌다. 잠시 후 “아이고 아파라.” 누군가가 소리를 냈다. 갑자기 바람이 나면서 돛조절하는 줄이 풀어졌는데, 그 줄에 맞은 것이다. 사공은 바람 중에서 통문바람을 제일 싫어한다. 배 뒤쪽과 일치하게 부는 바람을 말하는데, 돛이 갑자기 반대쪽으로 돌아가면서 전복 당한 적이 있었단다. 고금도 서쪽에 이르러 배가 거의 정지하였다. 잠시 후 배냉기 바람(산을 넘어오는 바람)이 불어와 배의 속력이 점점 상승하여 5.2㎞에서 10.1㎞에 이르렀다. 이렇게 섬 사이를 지날 때 수시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변한다. 섬이 많은 남해안 뱃길이 어려운 이유다. 사공은 하루만에 봉황에서 여수까지 간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30여년 동안 단 두 차례 뿐 이었고, 보통 3~4일 일정이었다. 그 때 항로는 안토배질(내해 항로, 마량~봉래도~여수)이었으니 이번 바토배질(외해 항로)과는 크게 다르다. 지금은 연육교, 양식장 때문에 돛단배의 안토배질은 불가능하다.
 오후 3시 무렵, 완도 신지대교를 지났다. 다리 상판을 아슬아슬하게 허리돛이 통과했다. 6.6㎞의 속력이다. 환호를 질렀으나 그 기분은 곧 바꿔야했다. 신지대교를 지나자 바람이 거의 멈추었다. 속력도 0.1㎞에 불과하다. 번갈아 노를 저었다. 잠깐 배냉기 바람이 불었다. 5분여 동안 겨우 100여 미터를 나아갔으나 들물(역류)을 만나 곧 정지하고 말았다. 잠시 후 “앗! 배가 뒤로 간다.” 앞에 있던 완도항의 방파제가 멀어지고 아까 통과한 신지대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밀리다가 갯바위나 신지대교에 부딪쳐 박살날 것 같았다. 바람, 조류에 밀려 난파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와 같은 경험은 고흥 나로도 인근에서 한 차례 더 있었다. 이럴 때 옛날에는 포구에 들어가 6시간을 쉬었다. 자연항해는 물 따라 바람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에 따라 예인선을 기다려 문제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해질녘, 신지도 끝을 지나자 큰 바다가 나타났다. 파도가 세어지고 들물이 빨라졌다. 어두워지면서 비까지 오락가락하였다. 사공은 손으로 키를 잡는 것이 힘들었는지 발로 조종대 끝을 꽉 밟고 있었다. 그 발을 본 순간 갑자기 멀미가 왔다. 식은땀과 구토가 나올 듯 말 듯했다. 메스꺼웠다. 토해버리면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 무렵, 고흥군의 남쪽 시산바다에서 두 번째 자연항해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류나 바람(초속 6m의 북동풍)이 역방향이어서 만만치 않았다. 그때 앞에 그물줄이 나타났다. “허리(허리돛) 돌려” 간신히 비켜 갔다. 돛단배는 정면에서 부는 바람을 60° 정도 방향으로 비스듬히 전진할 수 있다. 정면 역풍을 만나면 배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몬다. 북동쪽으로 가려면 북쪽과 동쪽으로 번갈아 진행하다. 이를 ‘헤쳐간다’라고 하고 직선 주행 후 꺽기 전까지를 ‘한참(육지에서는 30리 정도)’이라고 한다. 이때는 자칫 배가 뒤로 밀리기도 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북쪽으로 전환했다. 이때 아득히 멀리에서 보고 있던 해경에게 전화가 왔다. “왜 그리 가나?” 봉황호가 동쪽으로 가야하는데 북쪽으로 가고 있으니 해경은 의문을 품어 즉시 연락했던 것이다. ‘헤쳐가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만에 2㎞ 정도 전진했다. “우드드득” 그 때 갑자기 배가 진동하면서 굉음이 났다. “걸렸다” “넘어갔다” 순간 어망줄에 키가 걸렸던 것이다. 사공은 키에 줄이 걸리면 재빨리 키를 고정한 윗줄을 잘라 키가 풀리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서야 키대 옆에 식칼이 있는 이유를 알았다. 자연항해에서는 온탕(편안)과 냉탕(긴장)이 반복된다. 따라서 현명한 사공은 온탕일 때 냉탕을 대비한다. 따라서 긴장의 연속이다.
뱃사람은 뱃멀미 대신 육지멀미를 한다
선상 생활은 육상에 비하여 최소한으로 축소된다. 별도의 화장실은 없다. 고물에서 재주껏 해결 한다. 사공은 12월에 겨울 솜(겹)바지를 입고 나가 이듬해 봄이 되어 더워지자 솜을 점점 빼내 홑바지로 귀가했더니 죽었다고 소문이 났더란다. 3대 필수품은 쌀, 물, 화목이다. 육지에서는 보리밥이지만 바다에서는 쌀밥을 먹는다. 보리는 밥이 빨리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밥하는 사람을 화장이라 한다. 쌀 씻기는 먼저 바닷물로, 나중에 민물로 행군 후 밥을 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고, 심지어는 빨래도 바닷물로 한다. 밥 짓는 화덕은 옹기 뚜껑에 흙을 채워 넣고 그 위에 화덕을 놓는다. 화목은 칼집을 넣어 잘게 뽀개어 불이 잘 붙게 한다. 잠은 이물의 갑판 아래에서 잔다. “철~썩 철~썩” “흔들 흔들” 밤새 그네타기하면서 잔다. 파도가 배를 두드리는 소리는 다양하여 귀신도 흉내를 못 낸다고 한다. 돛단배는 후진과 브레이크가 없어 오직 전진만 한다. 따라서 정박은 항상 위험하다. 배의 무게(28톤) 때문에 선창과 충돌하면 배가 박살난다. 따라서 돛단배의 정박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된다. 또한 뱃사람들은 뱃멀미는 하지 않는다. 대신 육지에 나오면 육지멀미를 한다. 땅위에 서면 흔들흔들 어지럽다. 여수항에서 사라진 옹기배는 그렇게 40여년만에 나타났다. 강진옹기배의 탐사는 경이로움과 함께하는 감동의 여정이었다.
글·사진 | 변남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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