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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기술의 DNA 한선韓船을 말하다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0. 12. 13. 20:04

우리 조선기술의 DNA 한선韓船을 말하다
2010-12-13 오후 02:24




여명기의 바닷길

선사시대의 배에 관한 대표적인 유물로 비봉리의 선편과 반구대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즉, 경남 창령군 비봉리 패총에서 발견된 길이 3.1미터 가량의 선편은 탄소동이원소 조사에 의하면 대략 8천 년 전에 사용하던 통나무배로 추정되어 지구상 가장 오래된 선편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한편 경남 울주군 반구대의 암각화에는 고래와 물고기 그리고 배와 사람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엔 십여 명의 선원이 반원형 배에서 거대한 고래를 잡는 모습이 포함되어 그 옛날 이 해역에서 펼쳤던 포경문화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인 삼한 땅이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95년으로 고조선의 마지막 왕準이 위만에 나라를 뺏기고 ‘좌우에 궁인 10여 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이주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타고 온 배가 어떤 종류이며, 어느 정도 크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항해하였는지에 대한 일체의 유물도 문헌적 단서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우리 선박 및 항해사에 견주어 볼 때 그 배는 뗏목 형태였을 것이며, 연안을 따라 지문항해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의 흥망 경기만에서 갈리다

삼국시대에도 해상활동은 이어져 내려왔는데, 특히 경기만에서 벌어진 삼국 간의 치열한 투쟁은 삼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처음엔 비류와 온조의 백제가 경기만에 선착하여 이곳을 지배하며 번창하였지만, 4세기가 끝날 무렵엔 고구려 광개토왕이 이끄는 5만의 수군이 교동도와 강화도를 거쳐 경기만에 상륙하자 백제의 아신왕은 이를 막지 못하고 항복하고 만다. 그 후 백제는 경기만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밀려가며 점차 힘을 잃어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신라는 진평왕 5년에 우리의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선박제조 관청인 선부서船府暑를 설치하여 해상세력을 육성하고 경기만을 차지함으로써 독자적인 대당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그 후 신라는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바다 그리고 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신라시대의 배가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배가 발견된 곳이 경주 안압지여서 놀이배로 추정되는데, 평편한 밑판 한 개가 양측의 측판과 나무못으로 연결된 구조를 지닌 세 쪽 짜리 통나무배다. 이러한 선박결구법은 오랫동안 전승되면서 발전하여 우리 한선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왕성한 고려시대의 해운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선박 11척이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중국 산동성에서 발굴되었다. 산동성에서 발굴된 봉래3호선은 중국식 격벽이 사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선형이나 결구법으로 보아 우리 한선임에 틀림없다. 이들 선박을 발굴된 연도순으로 나열하면 완도선, 달리도선, 나주선, 십이동파도선, 봉래3호선, 안좌도선, 대부도선, 태안선 그리고 마도 1, 2, 3호선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우리 선박인 완도선은 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바다에서 발굴되었다. 선체와 함께 청자 3만여 점, 청동제 국자와 숟가락 그리고 목제 망치와 함지 등이 함께 인양되어 당시의 청자와 선원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신안선에 이은 완도선의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그 후 많은 업적을 쌓게 된다. 청자의 제작지가 해남군 진산리로 밝혀졌으며, 연대는 대략 11세기 중·후반 경으로 추정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배는 해남 진산리에서 청자를 싣고 고흥반도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침몰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3은 복원된 완도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박의 앞뒤 쪽인 이물과 고물은 썩어 없어졌고, 배 밑 저판과 대부분의 삼판이 남아 있다. 이 잔존부재들은 진흙 뻘에 깊게 묻혀 산소와 해충으로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천 년의 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다. 비록 상부구조는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하부구조가 대부분 남아있어 우리 한선의 구조를 밝히는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완도선을 비롯하여 위에 열거한 11척의 고려선박이 모두 기본적으로는 평저선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한선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선박은 일반적으로 시대에 따라 매우 느리게 변하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은 바뀐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만곡종통재彎曲通材1)의 사용이다. 완도선에서는 만곡종통재를 좌우에 각각 한 개씩 사용했지만, 십이동파도선에는 저판재가 3개인 대신 만곡종통재가 좌우현에 각각 2개씩이나 쓰였다. 이 배의 길이는 7.4미터, 폭이 2.4미터이며, 돛대가 한 개인 소형의 연안운반용 평저선으로 완도선보다는 조금 작은 배인데, 시대적으론 완도선보다 앞선 10세기의 배로 추정된다. 이러한 만곡종통재가 13세기로 넘어오면서 아예 사라지고 만다. 즉, 달리도선, 안좌도선 등 13세기의 고려선박들은 기본적으로 여전히 평저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만곡종통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양현 끝 저판이 다른 저판보다 두껍고 이에 삼판을 직접 연결하는 구조로 발전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고유 한선은 기본적으로 평저선형인데, 만곡종통재가 십이동파도선에선 좌우 각 2개씩, 완도선에선 각 1개씩 쓰였지만 안좌도선에선 사라지고 만다. 만곡종통재가 없는 고려시대 13세기 선박의 형태는 후대로 내려와 조선시대 한선의 기본형으로 전승된다.


조선시대로 내려온 평저선

고려시대의 선박은 현재까지 11척이나 발굴되었지만, 시대적으로 더 가까운 조선시대의 선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선박이 언급되고 있으며, 관이 파악한 병선과 조운선의 숫자가 900척에 가까워 실제론 더 많은 수의 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병선 중 판옥선은 그 규모가 크고 성능이 우수한 포가 장착되어 크게 위세를 떨쳤는데, 특히 민족의 영웅 이충무공이 창제한 거북선에 대한 무용담은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정조 때 출간한 이충무공전집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나, 아직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임란시 맹위를 떨치던 거북선의 구조와 치수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조선시대 선박의 모습은 각선도본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미상이지만 조선조 말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에는 전선, 병선, 조운선 그리고 북조선 등 네 가지 종류의 선박 그림이 주요치수와 함께 그려져 있다. 이들 선박은 상장구조에서 차이를 보이나, 하부는 모두 저판과 삼판으로 이루어진 우리 고유의 평저선형을 보이고 있다. 순조 22년에 대마도로 보낸 사신선을 기록한 헌성유고에는 175개의 부재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배는 전선보다 큰 선박으로 임란 후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선과 같은 크기의 선박으로 비정된다. 이들 선박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고려 후기에 정착된 평저선으로 시대의 흐름에 그 크기가 점차 커져간 것으로 보인다.


천 년을 이어온 우리 조선기술

우리 고유의 선박인 한선의 특징은 밑면이 평편한 평저선이란 점이다. 이러한 형태의 선박은 용골이 중심부재인 중국이나 일본의 첨저형 선박에 비하여 건조하기가 용이하며, 간만의 차가 큰 우리 서해안에서 운용하기 적합하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함으로써 해수에 의한 부식문제를 해결하였다. 특히 격벽 대신 가룡목을 사용함으로써 재료를 크게 절감했을 뿐 아니라 건조기간을 대폭 줄였다. 현대적 구조계산에 의하면 한선은 가룡목加龍木으로 충분한 종강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밑면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먼 거리 항해에 불리한 점은 있지만 봉래3호선이 보여주듯 중국의 산동반도까지는 무난히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서남해안 같이 섬이 많고 물길이 자주 변하는 해역에서는 평저선이 첨저선보다 오히려 항해에 유리한 면이 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탁월한 조선기술에 관한 DNA를 물려 받아 우리나라가 오늘날 부동의 세계 1등 조선국이 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각주1) 만곡종통재
만곡종통재는 선체의 저판과 외판 사이에서 두 부재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L’자형의 부재이다.


글·사진 | 최항순 서울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사진제공·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연합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