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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춘화도(春畵圖)의 으뜸사시장춘(四時長春) 옮겨온 글

왕토끼 (秋岩) 2010. 12. 10. 17:17
한국적 춘화도(春畵圖)의 으뜸
사시장춘(四時長春)


사시장춘.jpg

[사시장춘(四時長春)]
전(傳)신윤복 / 지본담채 / 27.2 x 15.0 / 국립중앙박물관

  

    멀리 계곡과 폭포가 보이는 한낮,
    한적한 후원 별당의 장지문은 굳게 닫혀있고,
    술 쟁반을 받쳐 든 계집종이 엉거주춤 서 있다.
    툇마루에는 두 켤레 남녀의 신발이 놓여있고,
    기둥 뒤에는 봄날을 암시하듯 꽃이 활짝 피어있는
    그저 밋밋한 그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참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폭포수와 웅덩이를 그린 원경(遠景)의 숨은 뜻에
    저절로 미소가 번짐과 동시에
    마루에 놓여 있는 신발에 눈길이 간다.
    신발은 원래 마루 아래 있어야 하는데,
    더군다나 두 켤레의 신발중
    여자의 것은 가지런한 데 비해,
    남자의 것은 한 짝이 비뚤게 놓여 있다.


    이 그림에 대한 최순우 선생의 명해설을 읽어보자.


    원래 조선 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극치는
    앵도화가 피어나는 봄날의 한낮,
    한적한 후원 별당의 장지문이 굳게 닫혀있고,
    댓돌위에는 가냘픈 여자의 분홍 비단신 한 켤레와
    너그럽게 생긴 큼직한 사나이의 검은 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면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아무 설명도 별다른 수식도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써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는 것이다...


    정사의 직접적인 표현이 청정스러운 감각을
    일으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뿐더러
    감칠맛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면,
    춘정의 기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보다 더 품위있고 은근하고 함축있는 방법은 또 없을 줄 안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격있는 에로티시즘은
    결국 '은근'의 아름다움에 그 이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순우 선생은 요컨데 이 [사시장춘(四時長春)]을
    한국적 춘화도의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정작 탄복할 것은 그의 글 솜씨다.
    굳이 낯 붉힐 설명 하나 없이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는 표현으로
    슬쩍 에누리하고 지나가는 그의 속셈이야말로
    어떤 의뭉스러운 그림도 따라가지 못할 고수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림이 그 사람이고 사람이 그 그림]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라 참말이다.
    최순우 선생의 해설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호기심은 속인의 버리기 힘든 버릇 아니던가?
    '있을 것'은 뭐고 '될 일'은 뭐란 말인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에 그칠지언정 [사시장춘(四時長春)]에도
    덧붙일 말들이 남았을 것 같아 자꾸 아쉬워진다.


    눈 똑바로 뜨고 못 볼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가 추태요, 하나가 미태다.
    어여쁜 자태를 무슨 배알로 직시하겠는가.
    성긴 그림자로 살그머니 볼 나름이다.
    하물며 남녀의 춘정을 표현하는 그림에서랴...
    지킬 것 지켜가면서, 가릴 것 가려가면서,
    버릴 것 버려가면서 그릴 때, 운치가 샘솟는 법이다.
    음욕이 붓보다 앞서면 그림은 망친다.


    이 그림은 한마디로 한국 특유의 은근함이 절절하다.
    요즈음 같이 거의 벌거벗고 다니는 처자들과
    길거리나 식당, 대중교통차량 같은 곳에서 마주하고 있노라면
    눈길을 어디에 둘지 민망하기 그지 없을진데,
    눈 내리는 풍경을 [머언 곳에 여인(女人)의 옷 벗는 소리]로 표현한
    김광균 시인의 싯구같은 은근함을 그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배운 게 있고 든 게 있어야 춘정의 진경을 안다.
    [사시장춘(四時長春)]을 그린 이는 철딱서니 없는 환쟁이가 아니다.
    우선 이 그림이 야룻한 장면임을 암시하는 곳은 기둥에 붙어있는 글귀다.
    떡하니 써 붙이길 [사시장춘(四時長春)] 네 글자!
    남녀의 운우지정은 더도 덜도 아닌 [나날이 봄날]이라는 말씀이다.
    그 짓이 깨어나고 싶지 않은 춘몽이라는 걸 아는 이는 안다.


    문제는 마루 위의 신발이다.
    여자의 신발은 수줍은 듯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그녀의 마음이 물들어서일까.
    두근거리는 도화색이다.
    눈여겨 볼 장면은 남자의 검은 신이다.
    도색 곁에 놓인 흑심인가?
    흐트러진 꼴로 보건데 후다닥 벗은 것이 틀림없다.
    긴 치마로 오르기에는 제법 높아 뵈는 마루라서
    남자는 먼저 여자를 부축해서 방안에 들였을 것이다.
    그러고선 얼른 문을 닫고 들어갈 요량으로
    조이는 신발을 채신머리 없이 내팽겨친 것이다.
    그 일이 얼마나 급했을꼬...
    남자 마음은 다 그렇다.


    흥미롭고 안쓰럽기는 술병을 받쳐든 계집종이다.
    엉거주춤 딱한 심사로 돌처럼 굳어버린 저 모습,
    뫼시는 어른은 꽁꽁 닫힌 장지문 안에서 숨소리마저 죽인 듯한데,
    자발없이 이 내 새가슴은 콩콩 뛰니, 들킬세라 숨어버릴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몸종은
    고약한 봉변을 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작가는 재치를 발휘한다.
    앞으로 쭉 내민 손과 뒤로 은근슬쩍 빠진 엉덩이가 그것이다.
    계집아이의 곤혹스러움을 묘사하는데 이보다 능수는 쉽지 않다.
    그 솜씨를 두고도 아이의 표정은 그리지 않았다.
    그것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속담에 "나이 차서 미운 계집 없다" 하지 않았는가.
    한창 때는 도화 빛이 돌기 마련이다.
    그러나 몸종 품신이 아직 성의 단맛을 알 나이는 아니다.
    연분홍 댕기마저 애잔해 보이는
    그런 아이의 풋된 표정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그대는 변태다.
    다만 한 줄기 홍조를 옆 얼굴에 살짝 칠한 것으로
    작가는 붓을 거둔다.


    방 안의 춘정은 문밖의 몸좀이 볼 수 없고,
    몸종의 춘정은 표정 없는 측면 묘사로 인해 또한 볼 수 가 없다.
    얼마나 공교로운 설정인가.
    이 구도가 이 작품을
    단순한 소품 이상의 것으로 떠받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화면 속에서 전경과 후경을 배치한 솜씨도 일품이다.
    물기 잔뜩 오른 앞쪽의 녹음과 사위어가는 뒤쪽의 꽃나무는
    깊이감을 드러낸 소도구로 훌륭하고,
    색정이 리리시즘으로 승화하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린이의 작의를 딴 데서 찾고 싶다.
    시절은 가히 녹음방초가 꽃보다 나을 때라곤 하지만,
    녹음도 조락의 전조일 뿐이니
    한나절의 열락이 사지장춘 가는 일은 결코 없다는 얘기다.
    더불어 저 계집종의 빨리 온 춘정을 어이할거나...
    혹, 후에 도화살 낀 여인으로 자라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 출처 : chosun.흙둔지 (ohsgo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