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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 만해 한용운 심우장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12. 6. 18:40

월간문화재사랑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 만해 한용운 심우장
2010-11-16 오후 02:03



 
뒤늦게 푼 숙제

만해선생이 살던 시대의 성북동은 성 밖의 시골 마을, 한적한 곳이었다. 오늘의 성북동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가득한 곳으로 변했건만, 그가 찾은 만해선생의 심우장 가는 길은 어쩐지 수백 페이지의 책 속에 껴놓은 단풍잎을 찾듯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야만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심우장을 향하는 골목이 자칫 지나치기 쉽게 너무 좁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터로 나가 모처럼 한산한 월요일 오후, 그는 그 좁고 가파른 골목을 따라 만해선생의 자취를 찾았다.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제야 와 보네요. 70~80년대에는 3·1절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에 관한 단막극들을 많이 했어요. 그때부터 만해선생님을 동경했습니다. ‘님의 침묵’은 셀 수도 없이 낭독했지요.”

그는 심우장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때, 혹시라도 심우장이 좁은 골목과 멋대로 피어있는 들풀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 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다. 하지만 한낮 가을의 고운 볕이 내리쬐는 대문을 지나 심우장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있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걱정의 자리를 메웠다.

“만해 선생님과 꼭 닮은 집이네요. 저기 보세요. 곧게 서 있는 소나무와 향나무가 꼭 심우장을 지키고 있는 것만 같아요. 저는 늘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혹시나 만해 선생님께 누가 될까봐 바지를 하나 더 챙겨오기도 했네요.”

그는 만해선생을 대신해 심우장을 지키고 있는 듬직한 소나무와 향나무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만해선생과 함께 보낸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나무들에게, 그 시절 만해선생은 어떠셨는지, 식사는 잘 하셨는지 눈으로 묻고 답을 기다린다.


한용운과 배한성의 만남          

“만해선생님께서 심우장을 산비탈에 북향으로 지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워낙 가난한 생활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남향이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와 마주하기 싫어 등을 돌려 지으셨다지요. 삶을 통해 행동하는 애국심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가 아는 만해 선생은 일본식 호적을 만들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 호적 없이 살면서,  조선 전체가 감옥과 마찬가지인데 어찌 따뜻하고 편하게 잘 수 있냐며 이 산비탈 북향집에 불 한번 피우지 않고 냉돌 위에서 겨울을 나셨던 분이다. 소박하고 단출한 심우장이 지금도 이렇게 그의 가슴에 뜨거운 감성을 불어 넣어 주는 이유는 비록 냉골에서 사셨으나 만해 선생이 남기고 간 그 온기 때문이었다.

“요즘 시대는 한 사람이 다양한 일들을 해내길 바라지요. 만해선생님은 당시의 멀티플레이어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승려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가였고 문학인이셨죠. 서민들에게 정신의 빈곤을 채우지 않으면 역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셨던 분이 아닌가 합니다. 단순한 계몽이 아니라, 함께 알아가자는 겸손한 선각자의 자세를 갖추고 계셨어요.”

일제의 계속된 탄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며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던 만해선생,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에 영양실조와 중풍으로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선생의 삶을 기리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심우장의 의미는 크다고 말하면서 심우장의 댓돌이며 낡은 문지방들을 매만졌다.

“난 도남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작은 집들이 즐비했던 당시였는데 어쩌다 창경궁을 가보게 되었어요. 어린 나의 눈으로 창경궁의 문을 보는 순간 그 거대함에 압도 되었지요. 궁궐의 모습은 우리나라에 대한 나의 틀을 깨뜨려 주었어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경이로움을 그때부터 느꼈던 것 같아요. 마치 오늘 심우장이 주는 이 느낌처럼, 문화재가 담고 있는 삶의 감성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에게 다가오죠.”

그는 간간히 심우장을 찾는 이들을 마치 집주인인양 반갑게 맞으며 그네들에게 연신 찾아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심우장을 자주 들르며 쉼을 얻는 사람, 만해 선생을 기리기 위해 멀리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오늘의 숨을 들이쉬는 이 공간이 더 잘 보존되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었다.
 


잊지 못할 옛사랑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 말고도 우리네 생활 속에 간직되어 있는 옛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요. 난, 그것들도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월의 흔적을 멋스럽게 간직한 고미술품들 자체에서 발산되는 아름다움에 저절로 이끌렸던 적이 많았어요. 그런 관심들로 인해 수집해 두었던 것을 ‘옛사랑전’ 이라는 전시회를 통해 알리기도 했지요. 호화스러운 수집가는 절대 아니지만 그저 오래된 것, 사연을 가진 물건들이 제공해주는 새로운 감성들이 좋습니다.”

옛것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였다. 자그마한 떡살무늬부터 한옥의 문살, 단청들이 자꾸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별다르게 미학을 공부했던 것도 아니었건만, 자연스럽게 옛것과의 친숙함을 쌓아갔다.

“남은 인생의 모토는 희생, 나눔, 봉사입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까지 독립운동을 하셨던 만해선생의 희생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나눔과 봉사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우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을 강의를 통해서 나누거나, 여러 봉사단체들의 홍보대사도 하고 있지요. 사회에 돌려 줄 것이 참 많습니다.”

그는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성을 꿈꾸며 심우장에서 따뜻한 세상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듯 심우장 앞마당의 태극기가 가을바람에 펄럭였다.   

배한성ㅣ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 예술대학 방송학과 2학년 재학 중 TBC 동양방송 2기 성우로 데뷔했다. 이후 40년간 성우로 활동하며 라디오 연속극, TV 외화 시리즈, TV 프로그램 사회자 등을 통해 많은 팬을 거느리며 ‘천의 목소리’, ‘목소리의 마법사’ 등으로 불리고 성우 지망생들의 롤 모델이 되어왔다. 본업 외에 자동차 칼럼니스트, 고미술 수집, 자원봉사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성우협회 이사장, 서울예술대학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 중에 있다.

 
글·김진희  
사진·최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