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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근대의 신풍경 (옮겨온글)

왕토끼 (秋岩) 2010. 11. 23. 20:43

대한제국 근대의 신풍경
2010-11-16 오후 02:05




서구문물의 도입

대한제국은 서구 문물의 도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정부의 근대화정책에 따라 서구 문물의 도입이 가속화되었다. 황실은 프랑스 판화, 유럽의 보를 진열했고 연회 때에는 최고급 프랑스식 요리와 샴페인을 제공했으며, 덕수궁의 석조전을 서구식으로 건축했다. 명월관에서는 각종 서양 요리, 맥주, 브랜디 등을 선보였다. 일반 서민들도 서구문물 도입에 적극성을 보였다. 서양 물건을 취급하는 상점에서는 자전거, 맥주, 포도주, 안경, 경대, 시계, 양산, 양복, 수건, 모자, 장갑, 가죽지갑, 반지, 허리띠, 장난감, 유성기, 의자, 난로, 금계랍, 천리경, 직조기, 철도·우편·선박시간표, 소다, 서구 잡화, 우유, 재봉기계, 위스키, 식료품, 여행용구, 문방구, 주단, 모직물, 운동기구, 악기 등을 판매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물건들은 대부분 대한제국기에 도입된 것들이다.

한국인들은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시계를 매우 좋아하여 가게에 들어가서 시계 소리를 듣곤 했다. 그에 따라 뻐꾸기시계가 많이 판매됐다. 권위를 과시하던 둥근 안경테도 크게 유행했다. 1902년에는 사진관과 양복점이 개점되었고 1906년에는 명함 가게가 들어섰다. 학교 음악시간에 학생들은 교사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합창했으며 가을운동회 때는 공책, 연필 등이 상품으로 지급됐다. 훗날 대중문화의 핵심으로 부상한 서구 문물도 선을 보였다. 먼저 1899년 음악을 들려주는 유성기가 수입됐는데, 유성기는 기계가 운행하는 대로 노래, 피리, 생, 비파소리를 들려주어 마치 연극장과 같다는 평을 받았다. 프랑스인은 1906년 서울에서 활동사진관을 경영하며 활동사진을 상영했으며, 1907년에는 파리에서 유명한 활동사진 기계를 수입하여 밤 7시 30분부터 9시까지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밤 8시부터 매일 다른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근대적인 도시로의 탈바꿈을 꿈꿨던 대한제국

대한제국이 근대화 사업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문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이었다. 정부는 미국 워싱턴 D.C를 모델로 삼아 서울을 근대적인 도시로 바꾸려 했고, 그에 따라 도로 및 하천을 정비했다. 또 새로운 중심 건축물 축조를 위해 원구단,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비전 등을 세웠으며, 탑골공원, 독립공원, 경운궁공원 등 서구식 공원을 조성했다. 정동 거리는 원래 한국적인 화려함이 넘치는 거리였지만 점차 서구적으로 변모해갔다. 정동의 언덕에는 높은 탑의 러시아공사관이 자리했으며, 러시아공사관과 비슷한 높이의 프랑스공사관도 세워졌다. 덕수궁 주변 언덕에는 적색 벽돌 건물인 영국공사관이 들어섰고, 두개의 프랑스식 호텔이 들어섰다. 또 정동에는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좋은 장소에 예배당을 건립했다. 서울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물은 로마 가톨릭 성당인 명동성당이었다. 서울의 남쪽 언덕에 소재한 명동성당의 붉은 벽돌 건물은 웅장해서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서구인들이 웅장한 건물을 세운 이유는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도는 관리의 침탈을 받지 않았으므로 조선인들은 입교하여 도움을 받으려 했다. 명동성당에는 영세를 받은 남녀들이 밤낮으로 몰려가 마치 떠들썩한 시장 같았다. 또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구세군을 일컬으며 서울 평동에 영문을 만들었는데 10일 만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  
 
 

서울의 새로운 풍경들

서울의 거리 모습도 많이 변모했다. 서울의 대로는 종로거리와 남대문로였으며, 서울의  거리 중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종로였다. 서울에는 전선줄이 가설되어 밤마다 가로등을 켰다. 종로 거리에 처음 전등이 켜졌고, 서울의 다른 시가지에도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유럽인들은 서울의 대로가 베이징보다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1899년 5월 정부는 미국회사와 제휴하여 전차를 가설했는데, 유럽의 붉은 전차가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전차의 속도는 매우 빨랐으므로 하루에도 여러 명의 어린 아이가 전차에 치어 희생됐다. 그 때문에 민중은 전차회사에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 서울의 전기 가설은 동아시아 국가의 수도 중 최선두일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이 무렵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일본의 도쿄, 타이의 방콕에는 전화, 전차 등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특히 전차 운행은 일본의 도쿄보다도 빨랐다. 1899년 9월에는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경인선이 개통됐다. 한강에는 철교가 가설됐고 그 위로 기차가 하루에 네 번 왕복했다. 사람들은 걷거나 말을 타고 다니던 때인지라 기차를 보고 놀라워했다. 기차는 남자 칸과 여자 칸이 따로 없었으므로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관습을 깨뜨렸다.
열차 개통과 함께 석탄, 무연탄이 수입, 판매됐으며 교통수단의 시간표가 게시됐다. 1900년 일본의 고베, 오사카 등지로 가는 선박의 운행시간표가 공고됐고 1904년에는 기차시간표와 전차시간표가 게시됐다. 시계 볼 일이 없던 사람들은 열차 시각표에 맞추느라 정확하고 규칙적인 근대적 시간을 준수해야 했다. 그에 따라 각국의 시계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세계지도도 다수 팔려나갔다. 한편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서울을 방문하는 유럽 관광객이 증가했다. 서울은 몇 시간이면 구경이 가능한 코스였다. 유럽인은 궁궐, 도성을 보고 한국인의 탁월한 재능과 강한 의지에 감탄했다. 또 유럽인들은 북한산 등반을 좋아하여 평창동, 승가사, 대남문, 백운대, 문수사 코스를 즐겨 올랐다. 한국인들은 서울과 시골을 불문하고 유럽인에 호기심을 보였다. 시골 사람들은 유럽인에게 신중하고 정중했으며, 특히 여자들은 그들을 보면 얼굴을 가리고 숨었다. 그러나 개화한 여자는 유럽인을 보고도 당황해하거나 피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진촬영도 허가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상실 이유

대한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문화수준이 높고 평화를 숭상하며 질서 정연하여 치안이 필요 없다고 칭송했다. 또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온순하며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손님을 환대하며 노예근성이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나아가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배타성이 없어 타협적이고 학구열, 근면성이 좋아 유능한 지도자가 등장할 경우 한국의 신속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은 의욕적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구했으며 안중근 의사도 대한제국의 발전을 일정 부분 평가했다. 문제는 근대화의 속도와 철저함이었다. 빠르고 철저한 근대화만이 대한제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중근도 지적했듯이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완만한 속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첫째, 황실 기구의 강화와 황실 재정지출의 증가로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각종 근대화 사업이 신속히 시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둘째, 매관매직으로 근대적 관료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셋째, 근대적 법률의 시행이 철저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계속해서 대전회통, 대명률을 시행했고 체제 수호를 위해 참형까지 부활했다. 법부에서는 법관양성소 학생들에게 학습용 법률서로 대명률을 배포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복고정책으로 인하여 신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보호되었던 민권은 타격을 받았다. 국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으로서는 황실 및 지배층의 정치적 양보를 통한 정치체제의 변혁으로 국민통합을 추진하여야 했다. 국권을 유지하려면 국민통합이야말로 외세에 대한 의존보다 선결 과제였다. 그렇지만 황실과 사족은 기득권의 축소를 야기할 헌법 제정, 국회 설치, 징병제 실시 등에 부정적이었다. 프로이센의 특권층과는 달리 대한제국의 특권층은 양보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권을 상실했다.   


글·현광호 한국근대역사연구소장  
사진제공·한국콘텐츠진흥원